74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원인이 버그이건 혹 다른 것이건, 현재의 아빠는 착해진 상태. 그러니 이미 내가 플레이한 <마.왕.꾸>의 크로셀 데네브와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뭐, 내가 곧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거지만. 다음번에는 꼭 성공할 거지만!’
그럼에도 크로셀 데네브가 직접 안젤리카를 죽이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플레이한 <마.왕.꾸>의 크로셀 데네브는 안젤리카 데네브가 죽었을 때 슬퍼했을까. 직접 죽이지 않았다고 한들 잔인하고 냉정한 흑막 캐릭터니까 그건 아닌가.
‘으음, 모르겠다. 애초에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고.’
나는 상태창을 켜서 시스템의 메인 화면을 띄웠다. 곧 몇 번이나 본 익숙한 문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안젤리카 데네브’ 인증되었습니다.
원하시는 메뉴를 선택해 주세요.]
그래, 내가 빙의한 세계는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세계. 그러나 동시에, 게임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계.
‘만약 크로셀 데네브가 성검을 노리고 안젤리카와 세이르를 죽인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 진짜 범인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내가 원작 진행을 뒤트느냐 뒤틀지 않느냐와 별개로 같은 비극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짜 범인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모든 것은 가정. 지금으로서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에휴우,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면서, 왕국 발전도 시켜야 하고, 의문점도 조사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빙의자 인생 정말 바쁘구나.’
물론 SSS급 흑막 왕국을 위해서니까 전혀 싫지 않지만!
“안젤리카, 생각이 많은 모양이구나.”
나를 안은 채 걷던 아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비워 낸 다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오늘 저녁 메뉴가 뭘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오늘은 아빠랑 저녁 같이 먹을까?”
“와아, 좋아요!”
그러고 보니 아빠와 저녁을 같이 먹지 않은지도 며칠 되었네. 전에는 한 주의 반 정도는 아빠와 함께 다이닝 룸에서 먹었는데, 요즘은 세이르와 같이 먹거나 방에서 혼자 먹을 때가 많았다.
요즘 아빠가 바빴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다른 일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치만 동화책 읽기도, 흑막 분장도 다 실패했는걸.’
아빠 본인을 직접 프로듀스하지 않고도 다른 영역에서 흑막력을 높여 줄 방법을 찾다 보니.
“그런데 그 전에…….”
“네?”
어느새 내 방 앞에 도착했다. 아빠는 나를 방문 앞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안젤리카한테 줄 게 있단다.”
아빠가 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젤리카 앞으로 편지가 왔더구나.”
“……? 저한테요?”
내가 이 세계에서 아는 사람은 대부분 왕성 안이나 주변에 있다. 내게 편지를 보낼 만한 사람이 없을 텐데 누구지?
그런 의문을 느끼며 일단 편지 봉투를 받아 들었다.
다음으로 아빠는 내 옆에 선 세이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이르 군, 잠시 할 말이 있단다.”
“……네.”
“따라오렴. 응접실로 갈까.”
“알겠습니다.”
표정이 진지하다. 모르긴 몰라도 둘이서만 할 말이 있는 듯 아빠는 내게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세이르를 데리고 갔다.
으으응?
아빠가 세이르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 * *
세이르는 크로셀을 따라 응접실로 갔다.
달칵.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천천히 문이 닫히고 시녀가 문 앞을 지켰다. 세이르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용하다.’
처음으로 느낀 감상이었다.
크로셀은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다. 안젤리카의 방 앞에서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온 뒤 자리에 앉기까지. 이 사람은 걸음 소리는 물론이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이렇게 안젤리카와 떨어져 있을 때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이 왕성은 안젤리카가 없을 때는 너무도 조용하다. 사소한 대화의 즐거움도, 환한 웃음도 모두 그 소녀를 위한 것이라는 듯이.
이야기가 길어질 모양인지, 시녀가 차를 가져다주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세이르는 눈앞의 남자를 관찰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공작저의 골방에 갇혀 있던 세이르도 크로셀 데네브의 위명은 들어 본 적이 있다.
강력한 마법사로, 한때는 대마왕이라고도 불린 남자.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바깥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데네브 왕국은 원래부터 극소수의 측근으로 이루어진 왕국이라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자연히 온갖 헛소문이 떠돌아다녔다. 겁쟁이가 되었다, 미쳐 버렸다, 외동딸 때문이다 등등…….
그래도 크로셀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고, 이제는 무성하던 소문들도 사그라졌다.
안젤리카는 크로셀이 무척 상냥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때, 크로셀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운을 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이구나, 세이르 군.”
“…….”
“흔치 않은 자리이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렴.”
크로셀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세이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부터 궁금하던 물음을 입에 담았다.
“저를 싫어하시면서도 이곳에 받아 주신 것은 왜입니까?”
“……하핫.”
크로셀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름다운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고 입술이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은 놀랍도록 건조해 보였다. 크로셀이 대답했다.
“나는 안젤리카가 바라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세이르를 싫어한다.’는 전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세이르 또한 그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세이르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시작된 아버지의 방치, 그 틈을 탄 다프네 왕비의 학대 속에서 자랐다. 늘 주변 눈치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의 감정에 민감해졌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제껏 세이르가 본 크로셀은…….
세이르를, 아니, 안젤리카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거슬려 하는 것 같았다.
크로셀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안젤리카가 너와 만나지 않길 바랐다. 만나면 그 아이가 세이르 군을 가엾어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안젤리카와 네가 만나기 전에 먼저 너를 처리했을지도 모르겠구나.”
“…….”
공기가 따끔거렸다.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세이르는 저도 모르게 늘 들고 다니는 검의 자루에 손을 올렸다.
크로셀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찻물로 목을 축일 따름이었다. 문 앞을 지키던 시녀 또한 잠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세이르가 여기서 정말로 검을 뽑더라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긴장하지 말렴. 만나지 않길 바랐지만 이미 만났으니 어쩔 수 없지. 지금 나는 세이르 군을 처리할 생각이 없단다.”
“…….”
세이르는 검의 자루에서 손을 치웠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크로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 세이르 군을 부른 이유 말인데. 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안젤리카에게는 함구해 주렴.”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본론이겠지. 세이르는 긴장을 꾹 눌러 삼켰다.
“세이르 군, 이대로라면 너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을 거란다.”
“…….”
크로셀의 말에 세이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낯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놀라지 않는구나.”
“알고 있었으니까요.”
“제법 머리도 똑똑한 모양이고.”
“…….”
다프네 왕비가 자신을 계속 내버려 둘 리가 없다. 그녀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죽이려 들 테고, 아무리 즐거운 시간이라도 언제고 끝은 온다.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잠식한 염세주의, 그리고 뿌리 깊은 절망은 피할 길 없는 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크로셀은 흥미롭다는 듯 세이르를 보더니 말했다.
“세이르 군, 때가 되면 베나토르 아카데미로 가려무나.”
“베나토르 아카데미, 라고요……?”
뜻밖의 이야기에 세이르는 살짝 놀랐다.
베나토르 아카데미는 대륙의 반대쪽 끝에 있는 명문 아카데미다. 대륙 각지에서 우수한 학생을 뽑아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기로 유명했다.
외부인이 쉽사리 드나들 수 없기에, 학문의 철옹성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그곳에서 과연 자신을 받아 줄까? 베나토르 아카데미 또한 다프네 왕비를 거스르고 싶지 않을 텐데.
그때 크로셀이 시녀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시녀가 작은 쟁반에 편지 한 장을 담아 들고 왔다. 크로셀은 품에서 도장을 꺼내 편지의 하단부에 눌러 찍은 뒤 세이르에게 내밀었다.
“추천장이다. 내 추천장이 있으면 베나토르 아카데미의 늙은이들이라도 거절하지 못할 거다.”
세이르는 얼떨떨해하며 그 편지를 받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혼란스러워하는 세이르에게 크로셀이 쐐기를 박았다.
“이건 제안이 아니란다. 때가 오면 반드시 아카데미로 떠나야 한다.”
“……그 ‘때’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죠?”
“그때가 되면 세이르 군 스스로 알 수 있을 거다.”
크로셀은 더 이상의 힌트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녀가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대화는 끝났고, 이제 돌아가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세이르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단어를 고르다가 불쑥 물었다.
“단지 안젤리카가 저를 가엾게 여기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