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 * *
오늘은 왕성 앞의 마을에서 마을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축제라고 해도 엄청난 규모는 아니다. 상점가를 중심으로 자잘한 이벤트 따위가 열리는 조촐한 동네 축제였다.
그래도 나는 무척 신이 났다. 축제 첫날부터 니키와 세이르를 끌고 축제를 구경하기로 약속했다.
축제 자체도 즐겁지만 내가 신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드디어!’
<마.왕.꾸>에서 ‘마을 축제 이벤트’는 왕국이 일정 이상 발전해야만 발생하는 이벤트다.
즉, 마을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드디어 데네브 왕국이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왕국(D)’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만큼, 축제 첫날 아침이 밝자마자 눈앞에 우수수 상태창이 떴다.
[<이벤트>데네브 왕국 ‘왕국민’들이 새로운 마을 축제를 기뻐합니다.
30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시나리오 퀘스트> ‘SSS급 흑막 왕국을 향하여!’를 완료했습니다.
(1) 칭호아이가 살기 좋은 왕국(D)을 획득했습니다.
(2) 경험치 500exp를 획득하여, 플레이어 ‘안젤리카 데네브’의 레벨이 11 → 12로 올랐습니다.
(3) 새로운 설비암흑 기사단이 해금되었습니다. [관리][암흑 기사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칭호 : 아이가 살기 좋은 왕국(D)>
분류 : 생활
아이가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왕국입니다.
왕국이 치안 점수에서 상당한 평가치 보너스를 받습니다.]
‘아이가 살기 좋은 왕국’이라. 얼핏 흑막 왕국답지 않은 칭호처럼 들리지만 뭐, 괜찮다. 진정으로 훌륭한 흑막 왕국이라면 일반 왕국민들도 살기 좋아야 하니까.
문제는 퀘스트 보상으로 새로 열린 설비, ‘암흑 기사단’ 쪽이다.
‘하필 암흑 기사단이 벌써 열리다니.’
암흑 기사단은 멋진 이름에 비해서 <마.왕.꾸> 내에서 별로 실용성은 없는 설비다. 속된 말로 하면 룩템. 그냥 멋있는 용도다.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 크로셀 데네브로 팍팍 포인트를 벌어들일 때는 당연히 암흑 기사단도 SSS급까지 키웠다. 왜냐면 흑막 뒤로 검은 옷을 입은 기사들이 주르륵 서 있으면 멋있잖아! 당연히 키워야지.
하지만 여전히 아빠는 다정하고 상냥하다. 겨우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왕국(D)’에 도달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굳이 실용성 없는 암흑 기사단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으음……. 일단 방치할까.’
띠링!
그때 새로운 상태창이 하나 더 떴다.
[<서브 퀘스트> 어둠에 물든 기사
축하합니다! 드디어 암흑 기사단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멋진 기사단을 만들어 봅시다.
남은 시간 : 30일
달성 조건 : 암흑 기사단 설립하기
보상 : ???
실패 시 : 왕국의 호화도 하락]
“…….”
기분 탓인가?
방금 분명 내 생각에 반응해서 퀘스트를 띄운 느낌인데.
보상도 그냥 ‘???’뿐이다. 이거, 일단 퀘스트를 띄워 놓고 보상은 나중에 적당히 주겠다는 거 아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시스템은 나를 어디로 이끌고 싶어 하는 걸까.
아직까지는 나한테 우호적이고, 특별히 적의는 느껴지지 않지만…….
SSS급 흑막 왕국에 도달하겠다는 내 목표를 도울 뿐인 걸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걸까.
‘앞으로 더 나아가다 보면 알게 되려나.’
“안젤리카 님, 얼른 와!”
나는 채비를 마치고 약속 시간에 맞춰 왕성 로비로 나갔다. 그런데 니키와 세이르가 먼저 와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빨리 왔어?”
“쟤가 새벽부터 깨웠거든…….”
세이르는 벌써부터 반쯤 기력이 털린 것 같았다. 저런.
“빨리 안 가면 다 품절되어 버릴걸!”
그래, 지금 상태창을 붙잡고 생각에나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어차피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고 SSS급 흑막 왕국을 만들겠다는 내 목표는 확고하다. 목표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의문의 답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러니 오늘은…….
“으응, 그럼 얼른 가자!”
모처럼의 축제니까 즐기자. 나는 세이르, 니키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축제를 맞이한 마을은 이른 오전부터 북적거렸다.
마을 광장의 중앙에는 행사 진행용 간이 무대를 만들었고, 꽃과 리본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골목에는 간식 따위를 파는 노점이 즐비했다. 고대 던전을 노리고 온 모험가들이며 가족 단위 관광객들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표정이 밝다.
자기가 직접 키운 틸라를 선보이는 마을 사람들도 많았다. 수확의 기쁨으로 모두들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축제가 기쁜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모두 크로셀 님과 안젤리카 님 덕분이야!”
“흙이 마기에 오염되어 이제 농사는 못 지을 줄 알았는데, 어흐흑…….”
“이 틸라 뿌리가 아주 효자라니깐!”
아이참, 그렇게 다 들리게 칭찬하면 부끄러운데.
하지만 기분 좋으니까 더 크게 칭찬해도 좋다. 역시 왕국에 틸라를 심자고 하길 잘했다.
나는 이 번화한 축제 풍경을 보며 깊은 감동에 젖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이 풍경, 이 분위기…….
‘엄청나게 판타지 게임 마을 같아. 판타지물이라면 이거지!’
잔고 3 골드의 F급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에서 시작했을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상냥한 아빠의 착하기만 한 모습에 좌절했던 날들이 머리를 스쳤다.
마침내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왕국(D)’이 되어 축제를 열게 되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을 축제라면 완전 그거잖아.
판타지물의 주인공들이 잠행을 나와 간식도 사 먹고 음모를 발견하기도 하고 납치당하기도 하는 곳. 판타지물의 국룰, 판타지물의 국밥 전개!
‘크으……. 끝내준다.’
“안젤리카 님, 왜 그런 표정이야?”
이미 양손에 간식을 가득 들고 있는 니키가 나를 불렀다. 내가 감동에 젖어 있는 동안 벌써 한 바퀴 돌고 온 모양이다.
크흠,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이제 가자. 세이르도 얼른 와.”
“……그래.”
아직 시간은 많다. 오늘은 하루 종일 느긋하게 축제를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제일 먼저 ‘오싹오싹! 스릴 넘치는 모험이 기다리는 고대 던전’으로 향했다. 축제를 기념해서 무슨 이벤트를 한다고 하던데,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해서 궁금했기 때문이다.
축제 버전으로 화려하게 꾸민 고대 던전 앞은 각지에서 몰려든 모험가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이게 다 뭐야?”
“윽, 안젤리카 님, 난 사람 많은 곳은 좀……. 과자 쏟을 뻔했어.”
“저쪽에 뭐가 있나 봐.”
세이르가 가리킨 방향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축제 기념! 보상 확률 2배 업!
무지개 슬라임을 잡으면 호화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참가 신청하기]
“…….”
이건 트리스탄의 아이디어겠군.
그 밖에 출석 체크 이벤트와 파티 참여 이벤트 등도 있었다. 이 새로운 이벤트 덕분에, 고정 파티로 매일매일 던전에 도전하는 모험가들도 많았다.
무지개 슬라임을 잡으면 티켓 한 장이 나오는데, 이 티켓을 열 장 모아 오면 아이템을 뽑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확률이 꽤 낮았다.
“와아…….”
무서운 감각이다. 트리스탄, 이 판타지 세계에 뽑기 게임을 도입해 버렸다.
“우오오오! 이번에야말로 희귀 아이템을! ……에잇, 하, 한 번만 더!”
“제발, 여신님, 제게 0.5% 확률을 뚫을 수 있는 힘을……!
“저랑 던전 갈 사람!”
이벤트에 참여한 모험가들의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어쩌면 우리 왕국의 고대 던전이 모험가들을 타락시켜 버린 것은 아닐까.
다들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 데다 모험가들이 다칠 위험이 없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무섭다. 나는 뽑기 게임은 하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열렬한 모험가 인파를 피해 다시 광장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노점을 구경하려고 하는데, 바로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