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안젤리카 님, 뒤로 물러서세요!”
사라가 곧바로 달려와 소년의 앞을 막아섰다.
타앗!
“크아아악!”
소년은 소리를 지르며 높이 뛰어올랐다. 빠르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이었다.
소년은 가볍게 사라를 피하더니 그대로 내게 다가섰다. 검게 물든 손이 내 팔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으윽……!”
“……안젤리카 님!”
검은 마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찌르르하고 섬뜩한 감각이 점점 강해졌다.
뭐지, 이거. 기분 나빠.
설마 나 죽는 건가? 이렇게?
산발적으로 떠오른 의문들의 답을 구하기도 전에 소년이 내 목덜미를 움켜쥐려고 했고.
그와 동시에 이대로 목을 잡히면 죽는다는 직감이 들었다.
“으으윽……!”
나는 있는 힘껏 몸을 버둥거리면서 소년이 나를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소년의 손을 완전히 떨쳐 내기는 불가능했지만 약간의 틈은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주 약간의 틈.
퍼억!
사라가 있는 힘껏 소년을 쳐서 쓰러뜨렸다.
“크윽, 크으으윽……!”
갑자기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온통 마기에 뒤덮여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그가 괴로워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멈춰……. 크, 크윽. 누가…… 그만……. 흐아악!”
소년은 그다지 또렷하게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털썩!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
“…….”
잠시 지켜보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방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끝난 모양이다. 몸에 힘이 쫙 빠졌다.
사아아악-.
소년의 몸을 뒤덮었던 마기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어째서일까.
공포와 안도를 느끼는 한편으로 머릿속에 어떤 신호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나 지금…… 죽을 뻔한 거구나.’
오늘 하루는 무척 즐거웠다. 드디어 마을 축제를 열 수 있었고, 왕국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기쁜 마음으로 귀가했는데 머리 위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 수천 시간을 플레이한 게임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미지의 존재가 있다.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 일어났다.
놀랍고 두려운 한편, 호기심이 불러일으킨 충동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이 위화감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소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작업대 옆에 놓여 있던 등잔을 손에 들었다.
“안젤리카 님, 위험해요.”
사라의 만류를 뿌리치고 쓰러진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등잔을 비추며 소년의 눈을 가린 검은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
땀에 젖은 창백한 뺨이 불에 델 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살짝 위로 치솟은 눈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
“어, 설마 얘는…….”
이 얼굴, 본 적이 있었다.
* * *
나는 쓰러진 소년을 일단 왕성의 빈 방으로 옮기기로 했다.
“안젤리카 님, 허락해 주시면 제가 감옥으로 옮기겠습니다.”
“아니야. 그러지 마. 안으로 데려가자.”
사라는 소년이 의식을 차리면 또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소년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데다가 열이 펄펄 끓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방치 상태인 감옥에 두었다가는 상태가 악화될지도 모른다.
로코의 이상한 반응도 마음에 걸렸다.
“피이잇! 피, 피이이이!”
로코가 갑자기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쓰러진 소년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소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피이, 피이, 피이잇!”
“피이이이!”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듯 로코가 거세게 울어 댔지만…….
“피이이, 핏 피이!”
“응? 뭐라고?”
“피이이이이!”
“로코, 미안해. 나 박쥐 말은 못해…….”
간식 달라, 놀아 달라, 졸리다 정도는 느낌으로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전혀 모르겠다.
“피이이…….”
실망한 듯 로코가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로코가 이 소년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까도 꼭 나를 따라오고 싶다고 떼를 썼지.’
꼭 이 소년이 나타날 일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어쨌건, 예로부터 동물이 말하면 들어야 된다. 동화책, 만화, 소설, 게임 등……. 어디든 동물이 말하는 거 들어서 잘못된 경우 못 봤다.
그리고 소년이 했던 ‘도망쳐’라는 말.
아까 이 소년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직전, 나더러 도망치라고 말했다. 마치 나를 공격한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갑자기 돌변했는지 신경 쓰였다.
“…….”
또 하나, 이 소년이 신경 쓰이는 이유가 있는데…….
그건 일단 얘를 안으로 옮기고 나서 생각하자.
“안젤리카 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사라는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내 의견에 따라 주었다. 대신 소년을 빈 방에 들이되 구속구를 채워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잠시 뒤, 평소에 쓰지 않는 방에 소년을 눕힐 수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마법 합금으로 된 구속구를 채웠다. 잠금장치에 아빠의 마력이 들어 있으니, 혹시 소년이 깨어나서 날뛰더라도 결코 풀 수 없다고 한다.
소년은 계속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열이 펄펄 끓었고, 이따금 신음을 흘렸지만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많이 아픈 모양이다.
“사라, 내일 아침에 의사를 불러 줘. 얘 많이 아픈 거 같아.”
“……알겠습니다. 안젤리카 님도 진료를 받으셔야 하니까요.”
“나는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그 마기가 몸에 닿았을 때 섬뜩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저 그뿐,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사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젤리카 님도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알았어.”
내 방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잠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확인하자 소년을 전에 어디서 보았는지는 금방 떠올랐다.
내가 빙의를 자각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므시 백작이 찾아왔었다. 아버지의 형, 그러니까 내게는 큰아버지가 되는 이므시 백작과 오찬을 했을 때.
당시 이므시 백작은 작은 소년을 대동하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얼굴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 소년이 그때의 그 애다. 그때 아주 잠깐 얼굴을 본 것이 전부.
그런데 소년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 어디선가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왜 이리 마음이 쓰이지.’
일단 소년이 깨어난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볼까.
그 검은 마기 하며……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을 방에 둔 뒤 나는 일단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지만, 낮에는 축제에 다녀온 데다 소년의 일로 너무 피곤했다.
“흐아암…….”
나는 애써 생각을 이어 나가 보려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도망쳐.”
“뭐?”
낯선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방으로 돌아온 다음 바로 침대에 누운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지금 화려하게 꾸며진 낯선 공간에 있었다. 천장을 장식한 번쩍번쩍한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이 공간…… 어쩐지 익숙해.’
이상하다. 이런 행사장에 와 본 기억은 없는데. 꿈인가? 예전에 꿈에서 여기를 본 느낌인데.
“뭘 하고 있는 거야! 얼른 도망치라니까!”
“뭐?”
나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는 두 개의 뿔, 등에는 검은 날개가 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손상을 입은 필름으로 찍은 영상처럼 그 부분만 흐려 보였기 때문이다.
“마, 마족……?”
<마.왕.꾸> 설정집에서만 등장하는 마족이 저렇게 생겼던 거 같은데.
그때.
“으윽……. 으아아악!”
휘이익!
눈앞의 마족이 큰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푹!
중심을 잃은 몸이 기우뚱거리는 순간,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이 꽂혔다. 제때 피하지 않았다면 저 검이 내 몸을 찔렀을 것이다.
‘꿈자리가 왜 이리 사나워?! 맛있는 걸 먹는다거나, 게임을 한다거나, 뭐 그런 좋은 꿈을 꾸면 좋잖아!’
나는 후다닥 뒤로 몸을 피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느닷없이 칼빵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흉몽 같잖아!
“으윽……!”
그러나 마족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마족은 공중에 가볍게 몸을 띄우더니 곧장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리 가! 으아앙, 저리 가란 말야!’
“후우……. 죽어랏!”
거친 외침과 함께 검이 날아들었다. 검의 궤적이 느리게 보였다. 피하고 싶었지만 몸이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이 가차 없이 나를 꿰뚫으려는 순간.
“읏……!”
나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검이 나를 찌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런 생각에 조심조심 눈을 떴다.
“……!”
검은 내 코앞에서 멈춰 있었다.
살짝만 손을 움직여도 나를 해치울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마족은 검을 휘두르지 않고 잠시 거친 숨만 내쉬었다.
괴로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