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 *
원래 오늘 오후쯤에나 아빠가 돌아온다고 들었는데, 예정보다 빨랐다.
아빠는 방 안의 이므시 백작을 발견하자마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이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를 붙잡고 화를 내던 것을 무마하려는 듯 이므시 백작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크, 크흠! 내가 여기 오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이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어제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니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기에.”
‘아빠가 이므시 백작을 만나러 갔던 거라고? 원탁회의가 아니라?’
원탁회의야 원작에서도 불참했으니 이번에도 불참했다고 한들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므시 백작이 아빠를 만나려 했다니…….
더욱 수상해진다. 나는 뭐 캐낼 만한 정보는 없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나, 날 의심하는 게냐! 급한 볼일이 있었다.”
“아, 그러시군요. 여기서 두 시간은 걸리는 먼 지역까지 불러내시고는 급한 일이라.”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게다.”
“옛날 일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더니…….”
옛날 일? 신경 쓰이는 단어였다. 그러나 아빠는 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
“그사이에 형님의 노예가 여기 와 있군요. 꼭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크흠, 크흠! 나는 바쁜 일이 생겨서 이만 가야겠다!”
뭐 찔리는 거라도 있는지, 이므시 백작은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 와중에도 루카를 향해 사납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루카, 네 처지는 네가 잘 알겠지.”
“윽…….”
탁! 이므시 백작이 자신의 스태프로 바닥을 소리 나게 쳤다. 루카는 그 소리만으로도 움찔거리며 놀랐다.
“네, 네에…….”
다음으로 이므시 백작은 나를 쳐다보았다.
“안젤리카가 루카를 치료해 준다니 아주 잘됐군. 노예에게까지 마음 쓰다니 대단한 조카님이야.”
“백부님보다는 제가 좀 그런 편이죠?”
이므시 백작은 마지막까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자신의 스태프와 루카를 번갈아 보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그럼, 루카가 다 나으면 다시 오마.”
아니, 영영 안 왔으면 좋겠다.
“세이르, 잠깐 루카 좀 부탁할게.”
“……알았어.”
“아빠,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 그럼 오랜만에 아빠랑 차라도 마실까?”
“네, 좋아요.”
루카 옆에 세이르를 남겨 놓고 나는 아빠와 함께 집무실로 갔다. 곧 사라가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안젤리카, 어제 축제에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기대 많이 했을 텐데.”
“그건 괜찮아요. 다음에 같이 가요! 그보다 아빠…….”
나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 루카를 발견한 경위를 아빠에게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아빠는 이미 사라에게 대강 사정을 들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부드럽게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을 따름이다.
사정 설명을 마친 뒤, 이윽고 나는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그 루카라는 애, 어디 아픈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치료할 방법을 찾고 싶어요.”
나는 당연히 아빠가 내 제안을 수락하리라 생각했다. 왜냐면 여전히 아빠는 착하고 다정하고, 루카는 아프니까.
그런데 뜻밖에 아빠의 반응은 냉정했다.
“안젤리카, 그 아이에게 더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네?”
“그 아이가 안젤리카를 해치려 했다지.”
“저는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마기에 물든 상태의 루카가 나를 붙잡아서 잠시 위험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멀쩡하다. 사라가 걱정하는 통에 의사의 진료도 받았으니 확실하다.
“하지만 다음에는 괜찮지 않을 수도 있잖니. 그 아이를 가까이 했다가 안젤리카가 다치기라도 하면 아빠 마음이 아플 것 같구나.”
“조심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러나 아빠의 반응은 여전히 단호했다.
“안젤리카, 그 아이를 이므시 백작에게 돌려보내렴.”
“그건 안 돼요! 이므시 백작은 루카를 노예라고 불렀다고요.”
“그래, 그 노예 아이가 안젤리카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잖니.”
“노예는 불법이에요!”
아빠가 곤란해하며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음, 정 그렇다면 이므시 백작을 노예 매매죄로 처벌하고 그 아이를 풀어 주마. 그자를 이제껏 살려 둔 이유가 있긴 하나…….”
“네?”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빠는 다시 말해 주는 대신 그저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웃었다.
“사랑스러운 우리 딸의 마음이 상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단다.”
“……아빠.”
“안젤리카, 아빠는 네가 다칠까 봐 걱정이구나.”
미묘하게 이야기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은 물론 진심이겠지만, 한편으로 아빠는 루카를 꺼리는 것처럼 보였다.
루카가 이므시 백작의 노예라서 혹은 사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루카 자체를 멀리하고 싶어 하는 느낌.
그러나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아도 아빠는 왜 루카를 꺼리는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 아빠, 은근히 비밀이 많단 말이지.’
늘 나한테 다정하고 상냥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아빠가 반드시 나에게 모든 일을 말해 줄 의무는 없었다. 나 역시 아빠한테 말하지 않은 일은 많이 있다.
하지만…….
‘이 착잡한 기분은 뭘까. 서운함?’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빠가 말해 주지 않는 일은 직접 알아내면 될 일이다.
루카의 등장, 저주 ‘암흑화’, 이므시 백작의 신경 쓰이는 행동…….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일이 연달아서 일어났다. 이 징조를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루카를 치료하고, 지금 일어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꼭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어젯밤에 저주의 영향으로 폭주한 루카의 행동을 다시 떠올렸다.
고통에 일그러진 눈, 바들바들 떨던 몸, 그 와중에도 내게 도망치라고 할 때의 목소리.
“아빠, 부탁이에요. 루카를 치료할 때까지만 여기서 머물게 해 주세요.”
나는 끈질기게 아빠를 설득했다. 아빠는 여전히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지만 결국 한발 물러났다.
“……알겠다.”
“정말요?”
“그 노예 아이를 살리고 싶구나. 내가 우리 딸의 뜻을 어찌 막을까. 안젤리카, 대신 조심해야 한다.”
“네! 고마워요, 아빠.”
기쁜 마음에 나는 아빠를 꽉 껴안았다.
“하하, 우리 천사는 참 착하기도 하지.”
아빠는 다정하게 나를 마주 안아 주었지만, 한편으로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 * *
“얘들아, 나 왔어.”
나는 아빠와 이야기를 마치고 루카와 세이르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세이르는 식사를 전부 마친 루카에게 디저트를 먹이고 있었다. 나는 깨끗하게 빈 접시를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좋아. 다 먹었네. 잘했어.”
“……!”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루카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눈만 데구루루 굴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얘 쫄았네. 하긴, 아까 상황이 정신없기는 했지.
디저트까지 전부 비운 루카가 내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 먹었어. 그, 아까 요리사는 그러면…….”
“응, 안 자를 거야. 아직 쓸 만하니까.”
“……휴우.”
겨우 안도한 듯 루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한 마디 더 쐐기를 박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음식을 남기거나 제대로 먹지 않으면 요리사를 자를 거야. 그러면 요리사는 어린 자식과 함께 길거리로 쫓겨나겠지. 굶주린 자식을 데리고 거리를 떠돌다가…… 그대로!”
나는 발을 바닥에 쾅 굴렀다. 루카는 흠칫 놀랐다가 곧 아닌 척 표정을 바로잡았다. 이미 다 봤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하루에 세 번, 남기지 않고 전부 먹도록 해.”
“……! 머, 먹으면 될 거 아냐!”
루카가 지지 않겠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터무니없고 어설픈 협박을 믿는 걸 보니 영락없이 어린애다.
‘이런 어린애가 왜 이므시 백작의 노예가 된 걸까.’
아까 이므시 백작에게 말했다시피 대륙법상 노예 제도는 한참 전에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므시 백작은 어떤 경위로 루카를 노예로 삼게 된 걸까.
‘게다가…… 이렇게 작은 애한테 심한 폭력까지 휘둘렀어.’
그리고 루카의 증상에 대해 이므시 백작은 분명 알고 있겠지.
혹시 루카의 그 증상을 이용해 어떤 나쁜 짓이라도 획책하는 것은 아닐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물어보고 싶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루카는 나를 경계했고, 자신의 사정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마.왕.꾸>에서는……. 으음, 아니야.’
이므시 백작도 그냥 순식간에 처리되는 엑스트라다. 하물며 이므시 백작의 노예 소년이 게임에 나올 리가 없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채 돕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루카, 이므시 백작하고는…….”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루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아.”
“왜?”
“왜냐니, 나는…….”
그때 갑자기 루카가 말끝을 흐리면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씨근거리는 모습이 괴로워 보인다.
“루카, 왜 그래?”
“괜찮……. 윽, 하아…….”
루카는 자신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눌러 삼키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했다.
그는 어깨를 굽힌 채 온몸을 덜덜 떨더니 곧 비명을 내질렀다.
“크윽……. 크아아아악!”
“……안젤리카!”
세이르가 다급하게 나를 뒤로 잡아당겼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루카의 몸에서 짙고 검은 마기가 새어 나오더니 순식간에 몸 전체를 감쌌다. 루카가 몸을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마기가 더 강해질 뿐이었다.
마기에 뒤덮인 몸이 검다. 방금까지 마주하고 있던 새침한 소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윽, 하아, 으, 으아아악!”
구속구 덕분에 루카가 내게 달려들거나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루카는 구속구에 피부가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날뛰었다.
키기기긱!
구속구에 연결된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크으으…… 으윽!”
눈앞의 광경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나는 루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것이 암흑화구나.
어제는 밤이었어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확실히 알겠다.
‘가슴 부근에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심장이 마기를 머금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