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는 구멍이 숭숭 난 장부 사이에서 <마.왕.꾸>의 낡은 수첩을 찾을 수 있었다. 표지에 낙서가 되어 있는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 게임 내 그래픽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런데 수첩의 페이지가 뭉텅이로 찢겨 나가 있었다. 남은 페이지에 있는 거라곤 낙서나 의미 없는 문자열뿐.
‘하필이면 제일 중요한 정화의 샘물 레시피 부분이 찢어져 버렸네.’
자세히 살펴보니, 이 수첩은 원래 문서고에서 보관하는 물건이 아닌 듯했다. 다른 책과는 양식이 달랐다.
어찌 된 연유인지 몰라도 다른 서류에 섞여서 잘못 들어왔거나, 누가 깜빡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수첩 주인을 찾아서 내용에 대해 물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우선 수첩을 챙기고 문서고 밖으로 나왔다.
‘어쩐다? 수첩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데 주인을 찾을 수 있으려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터벅터벅 걷던 그때였다.
푸드덕푸드덕!
정원의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갑자기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던 로코가 놀라고 말았다.
“어, 로코, 어디 가!”
“피잇! 피이잇!”
로코가 내 품을 벗어나 정원 한구석으로 날아갔다. 나는 깜짝 놀라 로코의 뒤를 쫓았다.
“로코, 언니 바빠! 얼른 가야 돼!”
“피이이이!”
“도망치지 말고! 이리 와, 로코!”
“피이잇! 피!”
“멈춰, 스톱! 언니 힘들어! 술래잡기 놀이는 다음에 하자, 제발!”
철푸덕!
“헉, 허억……. 잡았다.”
“피이이…….”
한참 뜀박질을 한 뒤에야 겨우 로코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나는 로코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틀어쥔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안젤리카 님, 거기서 뭐 해?”
짐을 잔뜩 들고 있는 니키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대차게 바닥에 슬라이딩한 상황인데 니키를 마주치니 퍽 민망했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변명을 내뱉었다.
“크흠, 흠! 잠시 체력 운동을 하고 있었어.”
“그래? 그럼 나도 할래!”
“뭐? 니키, 잠깐만!”
철푸덕!
니키가 나를 따라 바닥에 슬라이딩했다. 그 바람에 니키가 들고 있던 짐이 와르르 쏟아지면서 내 물건과 섞였다.
“아차, 물건을 든 채로 바닥에 구르면 쏟아지는구나.”
“응, 니키, 그걸 10초 전에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몸을 일으킨 뒤 로코를 주머니에 넣고, 옷에 묻은 흙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쏟아진 니키의 힘을 함께 주워 주었다. 전부 일관성이라고는 없는 잡동사니인 것을 보니 니키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니키, 오늘 오두막에 갔다 왔구나?”
“응, 이거 정리한 다음에 버리려고.”
왕성의 농사 관리인이 된 이래로 니키는 우리 왕성에서 숙식했다.
당연하다. 전에 니키가 살던 오두막은 너무 낡아서 도무지 니키가 혼자 지낼 곳이 못 되었다. 왕성에서 지내면 출퇴근 거리도 짧고 좋잖아.
니키는 왕성에서 지내면서 주기적으로 오두막에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 오빠가 두고 간 먹을 수도 없는 잡동사니가 많아서 정신이 없다나.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니키가 아직 모험가인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걸.
집 정리를 하러 가는 김에, ‘나는 왕성에 있으니까 돌아오면 찾으러 와.’라는 쪽지를 남기고 온다는 걸.
‘니키의 오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린 여동생 혼자 놔두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다니, 어지간히 모험에 미친 인간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짐을 정리하는데, 니키가 방금 문서고에서 찾은 낡은 수첩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 안젤리카 님, 이거 어디서 났어?”
“응? 니키, 이 수첩 알아?”
“이거 우리 오빠 수첩인데?”
“……뭐?”
뜻밖의 정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가 집 나가기 전에 쓰던 수첩이야. 버리려고 했는데 왜 여기 있지?”
니키가 버린 물건이 다른 서류와 섞여서 문서고에 있던 건가?
아니, 잠깐, 잠깐만?
지난번 마을 축제 날, 잡화점을 구경하는 도중 니키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오빠가 무슨 물을 집에 가져온 적이 있다고.
“응. 무슨 성스러운 샘물이라나? 마시면 아픈 게 다 낫는댔어.”
……만약 그 성스러운 샘물이란 게 내가 찾는 정화의 샘물이라면?
그래서 수첩에 레시피가 적혀 있던 거라면?
수첩의 나머지 페이지를 찾아야만 했다.
“니키! 이 수첩 페이지가 찢어져 있던데. 나머지 페이지는? 나머지는 없어?”
니키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으음……. 잘 모르겠는데.”
“잘 떠올려 봐, 제발!”
“그렇게 말해도……. 혹시 중요한 거야?”
“응, 엄청.”
니키가 면목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종이가 필요할 때마다 그 수첩에서 찢어서 썼거든? 그래서 없는 것도 있을 텐데.”
“뭐!”
이미 없어진 종이도 있다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수첩이 결정적인 단서인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원했다.
“남아 있는 페이지라도 좋아. 꼭 알아야 할 내용이 있어.”
“으음……. 잠깐만 있어 봐.”
니키는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뒤적뒤적했다. 곧 구깃구깃한 종이학 한 마리를 찾아서 내게 건넸다.
“지금은 이거밖에 없어. 나머지는 집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고마워!”
“근데 그거 순 허풍뿐인데. 안 읽는 게 좋을 걸?”
니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장 종이학을 풀어 헤치려는 그때였다.
“안젤리카, 니키, 여기서 뭐 해?”
등 뒤에서 세이르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막 마을에서 돌아온 듯했다.
“세이르, 왔구나.”
“그 종이학은 뭔데?”
“아. 니키의 오빠가 남긴 수첩이야. 여기 정화의 샘물에 대해 쓰여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거 허풍밖에 없다니깐.”
니키는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며 나를 말렸지만.
“흐음. 그래도 읽어 보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진심으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종이학을 잘 편 다음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포기했다.
“못 읽겠어. 세이르가 한번 읽어 봐.”
“내가? 뭐, 알았어.”
순순히 세이르가 내 손에서 모험 일지를 가져갔다. 그리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음……. 모험왕이 될 거야! 위대한 모험왕의 모험 일지……?”
모험 일지의 내용은 이랬다.
[모험왕이 될 거야! 위대한 모험왕의 모험 일지 첫 번째!
스릴 넘치고 멋진 모험을 즐긴 나는 강해졌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
우와! 저기 마침 나무 밑에 버섯이 있잖아!
역시 최고의 모험가인 나를 신이 이끄는군!
크으윽, 버섯을 먹고 저주에 걸렸다!
(※ 여기에 니키가 그린 듯한 버섯과 해골 낙서가 있었다.)
모험왕이 될 내가 여기서 스러지는가?
아아, 비극이여!]
내용을 읽은 감상은…….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모험가란 원래 다 이렇게 이상한가? 이렇게 이상한 인간이라 니키를 내버려 두고 돌아오지 않는 거야?
애초에 숲에서 버섯을 왜 따 먹어? 야생 버섯 취식 금지 몰라?
세이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손으로 미간을 꾹 누른다.
“그러게 내가 안 읽는 게 좋다고 했잖아.”
니키는 지금 여기에 없는 오빠가 쪽팔린지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황당한 마음을 삼키고 뒷면도 읽어 보았다.
[정신을 잃기 직전, 눈앞에 무지갯빛 돌이 나타났다!
무지갯빛으로 돌이 반짝반짝! 이 돌을 갈아서 물에 녹이면…….
꿀꺽꿀꺽!
우와! 힘이 솟는다!
나의 위대한 모험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모험왕이 될 때까지!
나는 성스러운 샘물을 병에 담아서…….]
느닷없이 ‘무지갯빛 돌’이라는 것이 언급된다.
그리고 이 돌을 갈아서 물에 녹이자 ‘성스러운 샘물’이 되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독버섯을 먹고 죽다 살아났다, 라. 정화의 샘물 같기는 한데.’
정화의 샘물은 엄연히 전설급 아이템이다. <마.왕.꾸>의 스페셜리스트인 나조차도 아직 만들지 못한 물건을 이 어처구니없는 모험가가 얼렁뚱땅 완성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나는 이 수첩에서 레시피를 발견했다. 어차피 실마리라고는 이 수첩 내용밖에 없으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니키, 다른 페이지는 없어?”
“으음……. 지금은 없는데, 집에 가면 있을지도.”
“다른 페이지 좀 볼 수 있을까?”
* * *
“들어와. 발밑 조심하고.”
니키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나와 세이르, 로코를 오두막까지 안내해 주었다.
세 명과 한 마리가 들어서니 꽉 찰 정도로 좁은 오두막이었다. 그래도 니키가 꾸준히 정리한 덕분인지 안은 깨끗한 편이었다.
“여기 어디 있을 거 같은데…….”
니키가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오두막 안을 뒤졌다. 그러나 부러진 펜촉, 다 쓴 잉크병, 현이 끊어진 악기 등 잡동사니만 나올 뿐 모험 일지의 뒤편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버리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어디 갔지?”
니키가 살이 다 부러진 부채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세이르가 창문에 붙여진 종이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이거 아냐?”
“피이이!”
창문에는 유리가 없었고, 외풍을 막기 위해 대신 문풍지를 붙여 두었다. 문풍지는 햇볕에 바랬지만 잘 보니 흐릿하게 글씨가 남아 있었다.
“아, 맞다. 추워서 문풍지로 써 버렸구나.”
“니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