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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86)화 (87/133)

86화

꽤 귀엽게 생긴 말이었다. 평소에 정성 들여 보살폈는지 연한 갈색 털에는 윤기가 자르르했다.

내가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데도 얌전한 것이, 성격이 순한 모양이다.

“세이르, 웬 말이야?”

“잡화점의 제랄드 아저씨에게 빌렸어. 왕성 마구간에도 말은 있지만, 거기서 빌리려면 행선지를 밝혀야 하니까.”

“반대하는 거 아니었어?”

“지금도 반대야. 그치만 반대하면 혼자 갈 거잖아?”

“뭐, 그렇지……?”

나는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세이르가 픽 웃었다.

“그럴 바에야 그냥 같이 갔다 오는 쪽이 마음이 편할 거 같아서.”

말의 고삐를 붙잡는 세이르의 모습이 무척 능숙해 보여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이르, 말 탈 줄 알았어?”

“이 정도야 당연히 할 줄 알지.”

설마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 대수롭지 않아 하는 투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는 말 못 타는데……?”

“괜찮으니까 이리 와.”

세이르가 자연스럽게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으, 응?”

“무릎 딛고, 다음은 손 밟고 올라가면 돼.”

“나 그렇게 안 작은데?”

“그랬던가?”

세이르는 이렇게만 말하며 생긋 웃었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었다는 투다. 예쁘장한 얼굴로 그렇게 웃으니 정말 얄밉다.

어쩐지 그의 말대로 손을 밟고 올라가면 작다는 걸 인정하는 기분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대안을 제시했다.

“여기 적당히 발 받침으로 쓸 만한 물건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마을 광장은 너무나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도무지 내가 딛고 올라갈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안젤리카, 괜찮다니까.”

“잡화점에 가서 발 받침을 빌려 오면…….”

“지금 손님 몰려서 제랄드 아저씨 바빠 보이더라. 빨리 출발해야 빨리 돌아오지. 괜찮으니까 그냥 올라가.”

“……알았어.”

결국 나는 세이르의 무릎과 손을 딛고 말 위로 올라탔다. 갑자기 발이 바닥과 멀어지니 기분이 이상해서 잠시 낑낑거렸지만, 어떻게든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안장에 제대로 앉았는지 확인한 뒤 세이르가 훌쩍 말 위로 올라탔다. 나와 달리 가벼운 동작이었다.

“위험해. 뒤로 더 기대야지.”

“더? 이만큼?”

나는 상체를 조금 뒤로 기울였다. 내 정수리 위에 세이르의 턱이 닿았다.

“조금만 더. 허리 편하게 펴고.”

“으, 응.”

완전히 허리를 펴자, 세이르의 품에 내가 안기는 형태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세이르는 팔로 내 허리를 감싼 채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이윽고 말이 출발했다.

세이르는 내가 놀라지 않도록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나는 점점 뒤로 멀어지는 주위 풍경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우와. 움직인다. 신기해!”

“무섭진 않아?”

“응!”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말이 살짝 속도를 높이자, 기분 좋은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갔다.

지난번에 사달멜리크에 갈 때 마차는 타 봤었다. 그런데 말을 타니 또 새로운 기분이 느껴졌다.

“우와아, 재밌어. 나도 말 타는 법 배우고 싶다고 할까?”

“좋은 생각이야.”

“그럼 세이르랑 나란히 타고 다닐 수도 있겠다. 누가 더 빨리 달리는지 경주하는 거야.”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고.”

“에이.”

지난번에 내가 느닷없이 달리기를 하자고 한 일을 떠올렸는지, 세이르가 물었다.

“왜 그렇게 경주를 좋아하는 거야?”

“재밌잖아.”

“승마를 배워도 어차피 초보자 수준으로는 나를 이기지 못할걸.”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 일이지!”

“응? 정말?”

세이르는 내 정수리 위로 고개를 올리고 키득거렸다. 이마를 뒤로 젖혀 턱을 때려 줄까 하다가, 다시 말의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마을이 금방 자그마해지고, 우리는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은 그늘이 졌지만 세이르가 뒤에 꼭 붙어 있었기 때문에 춥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주위 풍경을 구경하느라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겼다. 편안한 정적 속, 세이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

“뭐가?”

“기분이 풀려서.”

“…….”

내가 고개를 돌려 세이르를 쳐다보려 하자, 세이르는 위험하다며 말렸다. 마지못해 나는 다시 앞을 보았고, 등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뒤에서 세이르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가 나타난 이후로 계속 기분이 안 좋았잖아. 아니, 크로셀 님하고 이야기한 다음부터인가.”

“아, 아, 아, 안 그랬거든?!”

나는 당황해서 크게 소리쳤지만, 세이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티가 났나?

남이 눈치챌 정도로 기분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세이르가 말까지 빌려 와서 태워 주고, 간지럽게 구는 이유도 내 기분을 알아채서였던 모양이다.

세이르의 말이 맞았다. 지난번에 아빠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 실은 계속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빠가 처음에는 내가 루카에게 관여하지 않고, 왕성에서 내보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빠가 내 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뭐랄까…….’

서운하다, 고 할까. 아빠가 루카를 꺼리는 이유가 무엇이건 내게 말해 주지 않아서 서운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아빠한테 서운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나 역시 아빠한테 말하지 않은 일이 많이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켜 버려서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 된다. 어두운 기분 따위에 빠져 있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바쁘게 움직였는데.

‘알고 있었구나…….’

대화가 끊긴 틈으로 말의 발굽 소리만 들려왔다. 감추려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민망했다. 나는 괜스레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같이 와 준 거야? 내 기분 풀어 주려고?”

“마음대로 생각해.”

“사실은 루카가 걱정된 거지? 에이, 세이르도 솔직하지 못하기는.”

“……누구만 할까.”

세이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고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팔은 나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였다. 잠시 느려졌던 풍경이 다시 빠르게 바뀐다.

좁은 숲길을 빠져나오자 곧 목적지였다.

“여기 어디쯤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어! 저기다!”

나는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세이르는 폭포 근처 적당한 곳에 말을 멈춘 뒤 먼저 내렸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안젤리카, 잡아 줄 테니까 조심해서 내려.”

“응, 알았어.”

“천천히…… 으아앗!”

안장 위에서 몸을 돌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발로 바닥을 딛으려다가 중심을 잃는 통에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문제는 내 손이 세이르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이르는 나를 받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대로 나와 같이 굴렀다.

“아야얏……. 세이르, 미안.”

졸지에 내게 깔리게 된 세이르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승마를 배우게 되거든 말에서 내리는 법은 잘 연습하는 게 좋겠어. 항상 내가 받아 줄 수는 없으니까.”

“흥, 다음번에는 내가 세이르를 받아 줄 수도 있을걸.”

“그날이 정말 기대되는걸.”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니 얄밉다. 나는 괜스레 세이르의 뺨을 콕 찌른 뒤 몸을 일으켰다. 세이르도 곧 일어나더니 나를 뒤따랐다.

파와리스 폭포는 낙차가 약 20m에 수량이 많지 않은 작은 폭포였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좁은 시냇물이 되어 졸졸졸 흘렀다.

‘물은 별로 안 깊어 보이네. 물고기는 없나?’

물고기가 있나 없나 슬쩍 시냇물을 살피는데, 세이르가 나를 불렀다.

“안젤리카, 정화의 샘물을 진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응.”

“어떻게?”

툭 잘린 말이었지만 어렵지 않게 세이르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화의 샘물은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아이템이다.

거기다 우리가 손에 넣은 정보라고는 진위도 확신할 수 없으며, 해석도 할 수 없는 수상한 암호문이 전부.

여기까지 왔는데 성과가 없어서 내가 낙담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

‘아닌 척해도 역시 착한 어린이라니까.’

나라고 항시 대책 없는 자기 확신에 차 있을 만큼 긍정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루카의 저주를 치료하라는 퀘스트가 내 행동의 뒷받침이 되어 주었을 따름이다.

게임에서 퀘스트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가 클리어하길 바라서 주는 거다.

플레이어가 계속 퀘스트에 실패해서 패널티를 먹고 ‘에이, 안 해!’ 하면서 게임을 접길 바라는 제작사는 없다.

뭐, 가끔 난이도 설계를 엉망진창으로 해서 상당수의 플레이어가 ‘에이, 안 해!’라고 외치는 게임도 존재하지만, <마.왕.꾸>는 해당되지 않는다.

버그투성이인데도 <마.왕.꾸>가 흥행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절묘한 난이도 설계였으니까. 어려운 듯하지만 노력하면 깰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달까.

그러니까 이 퀘스트도 어렵지만 분명 깰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노력할 수밖에.

하지만 <마.왕.꾸>의 퀘스트니 난이도 설계 운운하는 이야기를 세이르에게 할 수는 없으니, 나는 에두른 말로 대답했다.

“으음……. 감?”

“……뭐?”

“어쩐지 잘될 듯한 느낌이 들어.”

“전에……. 날 구한 것도 감이었어?”

“그런 셈이지? 나는 감이 좋거든.”

“그럼, 이번에도 네 감을 믿어 보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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