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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87)화 (88/133)

87화

그럼 이제 암호문에 적혀 있던, ‘폭포수 위 달의 세 번째 기둥’이며 ‘자격 있는 자에게 열리는 문’ 운운하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세이르와 나는 파와리스 폭포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암호와 관련 있어 보이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냇물 바닥의 돌까지 조사했지만 평범한 조약돌이었다.

나는 결국 버럭 화를 냈다.

“대체 어디 있는 건데!”

나는 왕국 경영 시뮬레이션 전문이지, 퍼즐 게임은 약하단 말야. 장르를 존중해 주면 좋겠다.

“안젤리카, 진정해. 간식 먹을래?”

“세이르, 내가 니키인 줄 알아? 간식만 먹으면 금방 기분 좋아지게?”

“싫으면 말고.”

“……줘.”

나는 잠시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세이르가 가져온 구운 틸라를 먹었다. 단것이 입에 들어가자 조금쯤 마음이 차분해졌다.

“더 먹을래?”

“그럼 하나만 더.”

그러던 중 문득, 폭포의 맞은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작은 집이 있었다. 숲지기가 쓰는 오두막 같았다.

“세이르, 저기 봐.”

“응?”

이미 폭포 주변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문득, 조금 떨어진 곳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기 뭔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번 가 보자.”

가까이 가 보니 오랫동안 빈집이었던 티가 났다. 처마에 크게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문은 밖에서 열 수 없도록 잠겨 있었다. 하지만 창문을 타고 넘어서 들어가면 안에서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으, 창문에 거미줄이 있으면 좀 싫은데.’

“잠깐, 안젤리카. 내가 할 테니까 창문으로 넘어가는 건 그만……. 이미 늦었구나.”

“헤헤, 열었어. 들어와.”

나는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 안에서 문을 땄다. 세이르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다음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거 같지? ……캘록, 캘록!”

“안젤리카, 괜찮…… 캘록!”

“캘록, 캘록, 캘록! 뭐 이리 먼지가 많아? 캘록!”

오래 방치되었는지 안쪽은 먼지투성이였다. 낡은 집기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최소 몇 년은 아무도 살지 않았던 것 같다.

“안 되겠어. 일단 환기부터 하자.”

나는 안을 자세히 살피려던 생각을 포기하고 창가로 달려가 창문을 전부 열었다. 겨우 기침이 멎었다. 그리고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쉬다가 흠칫 놀랐다.

“……세이르! 얼른 이쪽으로 와 봐. 이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세이르가 내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오두막에는 폭포 쪽을 바라보는 원형 창문이 하나 있었다. 다른 창문과 달리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져 있어서 눈에 띄었다.

댕- 댕- 댕-.

정오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렸다.

그때, 밖에서 비쳐 들어온 햇빛이 벽에 걸린 거울에 반사되었다. 그리고 햇빛이 절묘하게 원형 창문을 통과한 순간.

“저거, 저기 봐!”

내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세이르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원형 창문을 통과한 빛이 폭포수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동그라미 안에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무늬가 비쳐 보였는데, 마치 여러 개의 기둥처럼…….

“……!”

그 순간, 우리는 동시에 같은 말을 떠올렸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폭포수 위 달의 세 번째 기둥!”

“폭포수 위 달의 세 번째 기둥!”

* * *

조금 더 살펴보니 어렵지 않게 장치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핵심은 비스듬히 설치된 거울과 폭포수 쪽으로 난 원형 창문.

태양이 정남쪽을 지날 때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게끔 놓여 있었다.

즉, 햇볕이 쨍쨍한 맑은 날 정오에만 암호 속 ‘폭포수 위 달의 세 번째 기둥’을 볼 수 있는 셈이었다.

‘운이 좋았네. 조금만 늦었더라도 발견하지 못했겠어.’

아차,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세이르와 나는 당장 오두막을 나와 폭포수를 향해 달려갔다.

“으음, 세 번째 기둥이면 여기쯤인데…….”

“안젤리카, 그러다 젖겠다. 내가 할게.”

“괜찮아, 괜찮아. 아, 찾았다.”

나는 세 번째 기둥, 즉, 스테인드글라스가 만들어 낸 기둥 모양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폭포수 너머를 잠시 더듬거리자 곧 매끈한 돌이 만져졌다. 형태가 네모난 것이, 인공적인 물건이었다.

달칵.

힘을 주어 누르자 돌은 매끄럽게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쿠쿠쿠쿵!

바로 근처에서 바닥이 열리더니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정말 신기하고 수상해 보이는 계단이었다.

‘……드디어!’

내게 패배감을 안겨 줬던 암호를 풀었다. 역시 이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가 풀지 못할 암호는 없는 법! 신난 마음에 나는 곧장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안젤리카, 잠깐만.”

세이르가 내 손을 붙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무서우면 세이르는 같이 안 와도 돼. 여기서 기다려.”

이렇게 친절하게 말해 주었는데, 왜인지 세이르는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내가 무섭다는 게 아니라…….”

“정말? 방금 움찔거리는 거 다 봤는데? 세이르는 착한 어린이니까 그럴 수 있지. 이해해.”

“하아……. 됐어. 가자, 가.”

“진짜? 안 무섭겠어? 무서우면 손잡아 줄까?”

“안 오면 놓고 간다.”

“어, 세이르, 같이 가!”

나는 후다닥 세이르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로는 던전보다는 땅굴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듯한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전등이나 횃불은 없었지만, 벽에 야광 이끼가 있어서 발밑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나는 세이르의 등에 바짝 붙어 걸으면서 입을 열었다.

“대체 누가 이곳을 만든 걸까?”

“글쎄, 꽤 오래된 곳 같아 보여.”

나는 손가방 안의 마법 폭탄을 꽉 움켜쥐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미지의 통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던지기 위해서였다.

몇 분쯤 통로를 걸으니 곧 막다른 곳이 나왔다.

통로의 끝은 돔 형태의 방이었다. 어두운 탓에 안이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 끝에서 끝까지 다섯 걸음 정도면 될 정도로 작았다.

심호흡을 하고 한 걸음 내딛으려는데.

덜컥.

“……덜컥?”

발아래에서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가장 기초적인 던전용 함정으로, 사람이 밟으면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젠장, 이런 초보자용 함정에 걸리다니. 방심했어!’

쿠웅, 쿠우웅-.

방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 진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손에 쥔 소형 마법 폭탄을 던지려는 순간.

띠링!

아니, 지금 상태창 확인하고 있을 시간 없다니까.

[<히든 퀘스트> 마법 폭탄을 던져라!

위기에 빠진 당신!

어떤 폭탄을 던지시겠습니까?

루트 1. 소형 마법 폭탄 (강도 : ●●○○○)

탁월한 효과!

하지만 여기가 지하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닌가요?

당신은 생매장당했습니다.

루트 2. 소형 마법 섬광탄 (범위 : ●●○○○)

엄청난 빛이 터져 나옵니다.

시력 조심하세요!

루트 3. 소형 향신료 주머니 (맵기 : ●●○○○)

눈물을 흘리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매운맛.

하지만 상대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허, 헉……!’

하마터면 여기서 그대로 생매장당할 뻔했다.

상태창 띄워 줘서 고마워, 믿고 있었어, 정말이야. 나한테 너밖에 없는 거 알지?

대놓고 정답을 알려 주는데 써먹어야지!

“세이르, 눈 감아!”

“……뭐?”

나는 당장 손가방에서 섬광탄을 꺼내 집어 던졌다.

펑!

굉음과 함께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잠시 뒤, 조심조심 눈을 떴다. 재빨리 눈을 감은 덕에 시력은 멀쩡했지만, 적응에 시간이 걸렸다. 세이르 역시 마찬가지인지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괜찮은…… 거 같지?”

세이르는 잠시 숨을 죽이고 안쪽을 살핀 뒤 대답했다.

“응, 지금은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네. 안으로 들어가자.”

세이르가 먼저 안으로 발을 들였고, 나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천장의 미세한 틈으로 빛이 비쳐 들어와 아까보다는 주위가 잘 보였다. 공기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흙으로 만든 인형 여러 개가 쓰러져 있었다. 얼추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 끝까지 오는 길이였는데, 쿡 찔러 봐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형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세이르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이건 뭐지?”

“인공지능 탑재 자율 도보 미니 골렘(30cm 타입)이야. 적이 나타나면 자동으로 맞서 싸우게 되어 있어.”

작다고 해서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어지간한 인간은 한 방에 보내 버리는 놈들이니까.

나는 아직 레벨이 딸려서 못 만드는 건데. 부럽다. 나도 공방 레벨 업 하면 골렘 스무 마리 만들어야지.

“지금은 안 움직이는데?”

“얘네들 빛에 반응해서 움직이거든. 섬광탄 때문에 센서가 고장 났어. 한동안은 못 움직일 거야.”

“아하…….”

세이르가 가볍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건…… 마법진?’

바닥에 붉은 잉크로 그림을 그리고 지운 흔적이 있었다. 마법진이다. 나는 마법진의 훼손되지 않은 부분을 읽으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문을 전부 뒤집어서 썼어. 이래서는 마법진이 훼손되지 않았더라도 작동이 안 될 텐데. 주문도 처음 보는 거고.’

단순히 초보자가 마법진을 잘못 그린 걸까,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으음……. 그만두자.’

당장 답을 알 수 없는 일 따위에 골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정화의 샘물 재료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호기심이 일기는 했지만, 우선순위를 착각하면 안 되지.

거기다…….

“세이르, 여기 좀 기분 나쁘지 않아?”

“……확실히. 기분 나빠.”

세이르도 나와 같은 것을 느꼈는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퀴퀴한 공기 때문일까.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꼭 공포 영화에서 영감 있는 캐릭터가 이런 소리 하던데!

으, 찜찜하다. 빨리 목적을 해치우고 나가야겠다.

방의 정면에는 벽돌로 만든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흐릿한 어둠 속에서 작은 돌이 빛을 발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돌은 무척 아름다웠다.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리는 돌의 모습을 보니 감이 왔다. 이거다. 절대 흔한 물건이 아니다. 모험 일지에서 언급하는 무지갯빛 돌이 분명했다.

“찾았다……!”

나는 황급히 제단 앞으로 달려가 무지갯빛 돌을 집어 들었다.

띠링!

그 순간, 상태창이 나타났다.

[<무지갯빛 돌>

사특한 것을 정화하는 힘을 가진 돌.

잘게 부숴서 물에 녹이면 ‘정화의 샘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확실해, 이거야!”

상태창에도 ‘정화의 샘물’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니 확실하다. 이것만 있으면 된다.

나는 기쁨에 환호하며 무지갯빛 돌을 잘 챙겨 넣었다. 그리고 세이르에게 곧장 돌아가자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어라?”

“안젤리카,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으응, 아니야. 잠깐만.”

무지갯빛 돌이 있던 자리 옆에는 은으로 된 로켓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안에 작은 초상화나 부적, 향낭 따위를 넣을 수 있는 형태였다.

살짝 호기심이 들었다. 이런 수상쩍은 장소에 느닷없이 로켓이라니.

어쩌면 이 땅굴을 만든 사람이 놓고 간 것은 아닐까. 안에 무슨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로켓을 열어 본 나는 곧 실망했다. 로켓의 안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 그럼 그렇지. 그냥 두고 가자. ……응?’

나는 로켓을 제자리에 돌려 놓으려다가 깜짝 놀랐다.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독특한 무늬로 장식된 낡은 로켓. 그 안에 새겨진 짧은 문구.

[크로셀 데네브]

‘이 로켓, 왜 아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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