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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89)화 (90/133)

89화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받지 않아, 결국 루카의 손을 잡아 펴고 억지로 쥐여 줘야 했다.

나는 곧장 덧붙였다.

“그거 깨 먹으면 안 돼. 깨트리면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될걸.”

‘한 병 정도 여분이 있긴 하지만.’

요즘 니키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보거든.

“안젤리카 님, 그 어쩌고 샘물이라는 거 그렇게 비싸? 한 200 골드쯤 해?”

“니키, 알고 싶어?”

“아…… 아니야. 말하지 마. 모르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렇지?”

“그럼 한 300 골드쯤? 서, 설마…… 400 골드를 넘는 건 아니겠지?”

“니키…….”

“으아아, 안젤리카 님, 그렇게 쳐다보지 마. 불안해!”

나는 따뜻한 표정으로 니키를 지켜봐 줄 수밖에 없었다. 들어 보니 악몽도 꾼 모양이다.

이렇게 나중에 정화의 샘물 가격 때문에 충격받지 말란 이야기다.

참고로 정화의 샘물은 하루에 한 번씩 다섯 번, 총 닷새 동안 나누어 먹어야 했다. 오늘이 첫 번째 복용일인 셈이다.

내 서슬 퍼런 기색에 루카는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병을 쥐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다만 약병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거……. 무슨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효과가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가만히 루카의 손을 보았다. 구속구에 긁힌 상처가 선명했다.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루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방증하는 상처였다.

그런데도 선뜻 약을 마시지 않고 망설인다.

그렇다고 약을 버리지도 못한다.

‘부당한 환경에 오래 노출된 애들이 대체로 이렇지.’

이므시 백작의 노예라고 했다.

아직 사정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므시 백작의 인간성으로 보아 루카에게 잘 대해 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부당한 환경하에서 몇 번 희망이 꺾이면 좋든 싫든 마음이 닫힐 수밖에 없다. 도움의 손길이 있어도 쉽게 믿지 못한다. 체념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학습한다.

‘세이르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랬지. 요즘은 나아진 것 같지만.’

아니, 나아지다 못해 요즘은 부하 1호 주제에 주인님을 위로하려고 든단 말이지.

왜일까.

전생에서는 게임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게 살았다.

현재도 여러 가지 일을 겪었지만 크게 힘든 적은 없었다. 아빠는 조금도 흑막이 되지는 못했을지언정 나를 아껴 주었고 다정했기 때문이다.

희망을 두려워하거나, 체념하거나…….

내게는 그런 경험이 없는데, 없을 텐데.

루카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나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었던 것처럼.

“…….”

루카를 볼 때마다 느껴지던 묘한 기분이 이것일지도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동질감. 존재할 리 없는 기억을 건드리는 기시감.

‘뭐, 그렇다고 해도.’

지금 루카의 불안 따위를 신경 쓸 계제는 아니었다.

내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면서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고, 흑막 엔딩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루카를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언제 차근차근 대화로 설득하겠는가.

‘역시 대화는 소용이 없어. 힘을 써야 해……!’

나는 비장의 수단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루카, 그 약을 마시면 이걸 줄게.”

나는 주머니 속에서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루카가 내 손바닥 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데?”

“레몬사탕이야. 이거 엄청 상큼해. 맛있겠지?”

“누…… 누가 그런 거 좋아할 나이인 줄 알아?”

“어라, 그래? 아직 아기라서 쓴 약을 먹는 게 무서운 줄 알았지 뭐야.”

루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한 마디만 더 했다간 그대로 뒤로 쓰러질 것 같다.

“누구 멋대로 아기야?!”

“사탕 없이 약 못 먹으면 아기지.”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세이르에게 재빨리 눈짓했다. 얼른 빨리 내 말에 맞장구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세이르는 웃음을 삼키며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만 할 뿐이었다.

“얘 끈질기니까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좋을걸.”

도와주는 건지, 재밌어하는 건지…….

나는 다시 루카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누나가 옆에서 손잡아 줄게.”

“그 누나 소리 좀……! 아, 알았어. 먹으면 될 거 아냐!”

내 ‘비장의 수단’ 공격에 당한 루카가 드디어 정화의 샘물을 먹겠다고 했다.

에휴, 약 만들어 주고, 먹으라고 달래 주고, 레몬사탕도 주고……. 안젤리카 데네브 많이 착해졌다.

‘이 빚은 꼭 비싸게 받아 낼 테니까 각오하라고, 후후…….’

그때였다.

챙그랑!

루카가 갑자기 정화의 샘물이 든 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다행히 병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저만치 굴러가 버렸다. 나는 병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려다가 흠칫 놀랐다.

“크으, 윽……!”

루카의 왼쪽 가슴 부근에서 마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주 ‘암흑화’의 발작이다.

‘하필이면 왜 지금……!’

루카는 괴로워하며 가슴께를 쥐어뜯었다. 거친 숨을 헐떡이면서도 나와 세이르를 향해 외쳤다.

“물러, 윽……. 뒤로 물러나! 으, 으윽, 헉!”

“……세이르!”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세이르가 먼저 움직였다. 세이르는 검집에 든 성검으로 루카의 어깨를 눌러 제압했다.

키기기긱!

구속구의 사슬이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상처가 겨우 아문 자리에 다시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 마기는 점점 더 짙어져 순식간에 루카의 몸을 절반 이상 덮었다.

“빨리! 안젤리카, 오래는 못 버텨.”

“으, 응!”

나는 바닥에 떨어진 약병을 주워 루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루카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버둥거렸다. 루카를 붙잡고 있는 세이르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괜찮, 으니까 가만히……. 가만히 있어.”

나는 긴장으로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루카의 입 안에 정화의 샘물을 흘려 넣었다. 어려웠지만 다행히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먹일 수 있었다.

그 순간.

파아앗- 팟!

루카의 몸을 뒤덮은 마기가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마기는 하얀빛으로 변해 공기 중에 녹아 사라졌다.

괴로워하며 버둥거리던 팔다리가 멈추었다. 거친 호흡도 잦아들었다.

루카는 거짓말처럼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루카 안드라스의 저주 ‘암흑화’가 치유됩니다.

치유 진행률 : 1/5]

루카가 완전히 진정된 다음, 세이르는 성검을 치우고 루카를 침대 위에 앉혔다. 움직임이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 보았다.

“……루카?”

“아…….”

루카는 자신의 감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해……. 숨 쉬기가 편해. 숨 쉬는데 목이 안 아파.”

“…….”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도 없어졌어. 원래 조금만 움직여도 칼로 찌르는 것 같았는데.”

루카가 고개를 들고 나와 세이르를 보았다. 붉은 눈 안에서 환희가 생생하게 반짝거렸다.

“몸 안에 있던 기분 나쁜 게 없어진 것 같아. 어떻게 이런…….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

원래는…….

‘특별히 만든 약이니까 앞으로 내 말 잘 들어!’

‘이 은혜는 비싸게 받아 낼 테니까 각오하렴.’

‘아직 안심하긴 일러. 약을 다섯 번 먹어야 하거든.’

이런 말로 잔뜩 생색을 내 줄 생각이었다. 일을 했으면 티를 내야 하는 법.

그런데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카가 너무도 기뻐했기 때문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 감각을 확인하며 감격했다.

온갖 정보를 뒤지고, 파와리스 폭포까지 찾아가서, 수상한 땅굴에 들어가고, 정화의 샘물을 만들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루카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앞에서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뭐랄까, 기분이. 기분이, 진짜 뭐라 말하기 힘든데.

묘하게 감격스러워서.

세이르가 슬쩍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잘했네.”

그러게. 뭐야, 나, 잘했잖아?

하하, 잘했네.

* * *

‘……이상한 애야.’

루카는 방금까지 안젤리카가 서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방문이 닫혔다. 창문 너머로 분홍빛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멀어져 간다.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레몬사탕을 한 움큼 건네준 소녀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소녀의 활기찬 말투나 짓궂은 웃음 같은 것이 주위에 남아 있는 것만 같다.

처음 안젤리카를 어디서 만났는지 루카는 금방 기억해 냈다.

그 인간이 잔뜩 거드름을 피우면서 자신을 데리고 간 오찬 자리였다.

그 인간은 평소에 자신을 버러지 보듯 하면서도, 이따금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루카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버러지에 의지 따위가 있을 리 없으니. 다만 목줄 찬 개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닐 뿐.

익숙한 일이다. 분명 익숙할 텐데도.

그날은 분홍빛 머리카락을 한 귀여운 아이를 보니까 어쩐지 참을 수 없어졌다. 나와 달리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무작정 정원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신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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