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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91)화 (92/133)

91화

방금 루카에게 정화의 샘물을 먹이고 왔으니 이제 더 이상 급한 일은 없다.

루카 일로 어제오늘 아빠에게 꽁해 있기는 했지만, 일부러 아빠를 피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집무실로 갔다. 그리고 나를 소파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고, 시종에게 차와 간식을 가져오게 했다.

내 몫의 간식은 레몬케이크였다.

“자, 많이 먹으렴.”

“와아아, 잘 먹겠습니다!”

나는 포크로 케이크를 떠서 한 입 먹었다. 짜릿한 신맛이 입 안을 자극한다.

음, 레몬케이크는 역시 이래야지.

설탕과 크림 덩어리에 레몬즙을 살짝 뿌려 놓고 레몬케이크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기만이다. 진정한 레몬케이크라면 이렇게 레몬의 존재감이 강해야지.

아빠는 내 맞은편에 앉아 내가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안젤리카는 레몬케이크를 참 좋아하는구나.”

“맛있어요. 아, 아빠도 드세요.”

“하하……. 아니야, 안젤리카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구나.”

아빠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예전부터 안젤리카는 레몬케이크를 좋아했지.”

“아하하, 네.”

“많은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구나.”

아련한 목소리였다.

내가 간식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을 무렵.

아빠가 장식장에서 체스보드와 말을 꺼내 왔다. 그리고 체스 룰을 모르는 나를 위해 룰을 설명해 주었다.

“좋아요. 그럼 해 봐요!”

나는 신이 났다. 왜냐하면 체스만큼 흑막에게 잘 어울리는 게임은 없기 때문이다.

체스 말을 놓으면서 차갑게 웃는 흑막. 그야말로 흑막의 정석이 아닌가.

내 앞에 체스 말을 놓아 주던 아빠의 미소는 조금도 차가워 보이지 않았지만, 뭐! 뭐든 첫걸음이 중요한 법이지.

체스는 처음이라 아직 룰이 헷갈렸다. 그래도 아빠도 체스는 잘하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승산은 있겠지. 있을 텐데…….

“자, 이렇게 하면 어떨까. 체크메이트.”

“어? 말도 안 돼요! 다시 해요, 다시!”

“그래, 그럼 다시 두자꾸나. 자.”

“으으……. 한 번만 더 해요.”

아빠도 체스 잘 못한다며!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앗 하는 사이에 내 킹을 잡을 수 있는 거지? 사실 고수 아냐?!

물론 멋진 흑막이라면 체스 같은 게임도 잘하는 것이 국룰이지만…….

내가 그 상대가 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체스를 계속하자고 했고, 내리 몇 판을 졌다. 그리고 다시 아빠에게 도전했을 때였다.

“……!”

갑자기 아빠에게 틈이 보였다.

나는 신중하게 체스 말을 움직이면서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회가 온 순간, 적진 깊숙이 들어가 있던 폰을 움직였다.

“어, 됐다!”

“하하…….”

“체크메이트! 아빠, 내가 잡았어요!”

“이런. 축하한다, 안젤리카가 이겼구나.”

아빠가 아쉽다는 듯 웃으면서 체스 말을 정리했다.

아차, 아빠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그만 체스에 열중해 버렸네.

“아빠, 저 실은 파와리스 폭포에서…….”

뚝.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아빠의 손이 멈추었다. 아빠는 무척 낯선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응? 안젤리카, 뭐라고?”

“저, 실은 얼마 전에 파와리스 폭포에 다녀왔어요. 거기서…….”

“안젤리카도 참. 폭포를 보고 싶었으면 아빠한테 말하지 그랬니. 아빠가 데려다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다. 아빠는 꼭 그 폭포에 대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파와리스 폭포 아래의 땅굴에 아빠가 간 적이 있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거.”

일단 나는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로켓을 꺼내려 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크로셀 님, 사라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미안하구나, 안젤리카. 아빠가 이만 일을 하러 가 봐야겠구나.”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장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본다.

“안젤리카, 잊지 마렴.”

“네?”

“아빠는 언제나 안젤리카 편이란다.”

“…….”

“언제나 네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렴. 이 세상에서 우리 천사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으니까.”

“……네.”

아빠의 푸른 눈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 식사를 하고 채비를 마치자마자 세이르와 함께 루카를 찾아갔다.

드디어 오늘이 치료 마지막 날이다.

“안녕, 루카.”

“……왜 이렇게 늦게 와?”

어제랑 똑같은 시간인데도 루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닌 척해도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손가방에서 정화의 샘물을 꺼내며 말했다.

“오늘이 약을 먹는 마지막 날이야. 네가 사탕을 먹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기도 해.”

“사탕은 필요 없어.”

“어머, 그래? 아쉽네.”

어제 잠들기 전,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두었다. 말하자면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계획서~루카 편>이라고 할까.

내 계획은 대강 이렇다.

먼저, 치료를 마친 다음 적당한 핑계를 대서 루카가 여기 더 머무르도록 한다.

“안젤리카, 아무리 그래도 ‘간식을 다 먹지 않아서’는 너무 억지가 아닐까?”

오늘 아침, 내 계획을 들은 세이르가 옆에서 이렇게 태클을 걸기도 했다.

“그럼 세이르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 봐.”

“글쎄……. 그냥 납치하든가?”

“좋은 마음가짐이야, 세이르. 제법 흑막다운 사고를 하게 되었구나.”

“하아…….”

그사이에 이므시 백작을 처리한다.

아빠에게 돈을 뜯어 간 일이며, 루카를 괴롭힌 일 등등 처리할 명분은 충분했다. 구체적으로 처리할 방법도 몇 가지 후보를 골라 두었다.

그다음에는 루카를 풀어 줄까 한다.

어디를 가든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해야지. 뭐, 정 갈 데가 없으면 내가 소개를 해 줄 수도 있고. 이쪽도 몇 가지 후보를 골라 두었다.

그 전에 우선 루카를 치료하고 퀘스트를 클리어해야겠지.

루카가 정화의 샘물 병을 손에 들었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앞에 퀘스트 완료 상태창이 뜨는 것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파아앗- 팟!

루카가 걸터앉아 있던 침대 아래에 갑자기 마법진이 생겨났다. 붉은빛을 내뿜는 마법진은 척 보기에도 불길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콰앙! 챙그랑!

큰 진동이 느껴지더니, 창문의 유리가 전부 깨졌다.

“윽……!”

“안젤리카!”

세이르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몸으로 유리 조각을 막았다. 유리조각이 세이르의 등 위로 쏟아졌다.

“안 돼, 세이르, 유리…… 유리 조각이!”

“이 정도쯤 괜찮아.”

“그럴 리가 없잖아!”

세이르는 아프지 않은 척 웃었다. 바깥에서 불어온 싸늘한 바람이 세이르의 금빛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안젤리카 님!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세요? 안젤리카 님!”

콰앙! 쾅!

소리를 듣고 왔는지 사라가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이상하다. 이 방은 잠겨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거지?

“으윽, 읍……! 커, 커억!”

루카가 거세게 숨을 헐떡였다. 낯은 창백했고, 괴로운 듯 가슴을 쥐어뜯는다.

‘……암흑화의 발작!’

“으으윽, 으, 으흑……!”

심장에서부터 흘러나온 마기가 루카의 온몸을 뒤덮었다. 루카가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마기는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루카의 저주는 거의 다 치료했다. 이제 한 번만 더 약을 먹으면 끝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증상이 거세진 거지?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 마법진……!’

갑자기 바닥에 나타난 마법진이 무슨 영향을 끼치는 것이 틀림없었다.

루카의 눈이 흰자를 드러냈다. 작고 마른 몸이 뒤로 쓰러진다.

정신 차리라며 루카의 몸을 마구 흔드는데.

차르르륵!

창문 너머에서 쇠사슬이 날아오더니 루카의 몸을 휘감았다.

“크윽, 으……! 피, 피해……!”

쇠사슬이 루카의 몸을 옥죄고 끌어당겼다.

탁!

구속구가 끊어진다. 루카는 속절없이 쇠사슬에 붙잡혀 창밖으로 끌려갔다. 공중에 루카의 몸이 떠올랐다.

“안 돼, 멈춰……! 루카!”

“……안젤리카, 조심해!”

루카를 쫓아 창가로 다가서는 나를 세이르가 붙잡았다. 기우뚱, 몸이 휘청인다. 엉망진창이 된 창문 너머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그때.

파아아앗!

눈앞에 검은 장막이 나타났다. 장막은 공중에 검은 잉크를 흩뿌린 듯 넓게 퍼지더니 순식간에 세이르와 나를 감쌌다.

다음 순간, 나와 세이르는 낯선 공간에 있었다. 온통 검은 공간이었다. 그저 막막할 뿐, 방향도 거리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앞에는 쇠사슬에 휘감겨 쓰러진 루카.

설마, 이건.

“차단 마법이야.”

“차단 마법이라고? 그건…….”

세이르가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 그거.”

휴양 도시 엘나스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세이르를 노린 암살자가 쓴 그 마법이다.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 장막을 펼쳐, 영역 안의 공간을 바깥과 단절시키는 마법.

‘그런데 어떻게 왕성에서 차단 마법이 시전된 거지?’

왕성은 크로셀 데네브의 영향 아래 있다. 외부인이 쉽사리 마법으로 공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때, 쓰러진 루카의 뒤편에서 그가 나타났다.

“크하하하! 계획대로군.”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어떠냐, 건방진 꼬맹이. 이제 웃어른을 공경할 마음이 좀 들었느냐.”

이므시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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