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으윽, 얘보다 먼저…… 나를 상대해야 할걸.”
세이르가 성검에 몸을 기대며 일어섰다.
세이르는 강하다. 원작의 신 포도 캐릭터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마족 안드라스에게서는 그를 넘어서는 압도적인 강함이 느껴졌다.
세이르가 검을 들고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신중하게 틈을 노려 마족 안드라스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압!”
마족 안드라스가 팔을 들어 세이르의 검을 쳐 내려 했다. 그 순간 세이르는 검의 방향을 바꿔 마족의 어깨를 크게 베어 냈다.
됐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한순간.
휘이익! 쾅!
마족 안드라스는 마치 고통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동작으로 세이르의 검을 쳐 내더니, 이윽고 세이르를 쓰러뜨렸다.
“윽……. 쿨럭!”
마족 안드라스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검 끝이 나를 향했다.
“읏……!”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를 똑바로 노려보는 순간.
움찔.
……멈췄다.
검은 내 코앞에서 멈춰 있었다. 살짝만 손을 움직여도 나를 해치울 수 있는 거리. 마족 안드라스는 가만히 나를 보았다.
“……루카?”
“윽…….”
대답은 없다. 다만 괴로운 듯 붉은 눈이 일그러진다.
“에에잇! 무얼 하는 게냐! 마족 안드라스, 해치우라니까!”
이므시 백작의 명령에 마족 안드라스, 아니, 루카가 다시 나를 공격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직! 파아앗!
주위를 에워싼 검은 장막을 가르며 하얀빛이 비쳐 들어왔다. 차가우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빛이었다.
이어 들려온 목소리.
“감히 내 딸을.”
“……!”
아빠다.
아빠가 왔어.
“흑, 아빠, 아빠…….”
그제야 왈칵 울음이 터졌다.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랄 만큼 안심되어서.
아빠는 하얀빛을 등지고 공중에서 나타났다.
은빛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서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오시하다가 나를 보고는 곧장 애달픈 표정을 짓는다. 짙은 그림자가 아빠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정말로 아빠다.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크, 크로셀?! 어떻게 차단 마법을 뚫은 거지?”
“감히 내 딸을 건드리다니.”
차가운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던 이므시 백작이 다시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크하하! 크로셀,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진짜 마족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아빠는 마족 안드라스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이므시 백작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파아앗-.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 내 키보다 큰 스태프가 소환되었다.
차르르 흔들리는 검은 마석이 아름다운 아빠의 무기다.
‘심연의 주인……!’
탁!
아빠는 가벼운 손짓으로 심연의 주인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분노가 느껴지는 표정에 비해 놀랍도록 고요한 동작으로 이므시 백작을 향해 휘둘렀다.
“누, 누가 그런 것에 당할 줄 알고……!”
뒤늦게 이므시 백작이 자신의 스태프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파지직!
아빠의 일격에 이므시 백작의 손에 들려 있던 쇠사슬이 부서졌다.
“마, 말도 안 돼! 속박의 쇠사슬을 이렇게 쉽게 부수다니…….”
이므시 백작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에에잇! 움직여라, 마족! 당장 크로셀을 해치워!”
그러나 쇠사슬의 속박에서 벗어난 마족 안드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족의 몸에 응집된 마기가 형체를 잃고 공중으로 흩어지더니…….
사라지기 직전, 마족 안드라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
다음 순간. 루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 원 포인트 레슨 : 마족 안드라스가 비활성화되었습니다.]
“크으윽, 쿨럭, 쿨럭!”
뿔도 날개도 커다란 몸집도 사라졌다. 바닥을 구르는 소년은 분명 내가 아는 루카였다.
“루카, 괜찮아? 정신이 들어?!”
당장 루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 순간, 차단 마법의 장막이 완전히 해제되었다. 검은 입자가 빛에 녹아내리더니, 순식간에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휘이이, 바람이 휘몰아친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불러낸 바람 때문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바람이 정원을 마구 할퀴었다.
뒤로 쓰러질 뻔한 나를 세이르가 붙잡았다.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서서 앞을 보았다.
내 앞에 아빠가 서 있었다. 거센 바람의 한가운데에.
바람에 아빠의 은빛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역광이 아빠의 흰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안젤리카…….”
나는 아빠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손이 잘게 떨렸다.
‘……아.’
아빠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아빠가 나를 구해 주지 못할까 봐.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이 났다.
죽을 뻔했다.
내가 죽으면 아빠가 슬퍼할 텐데,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안일했다. 아빠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 아빠가 늦었구나.”
나는 안도감에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 으흑……. 아니요, 괜찮아. 괜찮아요……. 안 늦었어. 내가 더, 흑, 조심했어야…….”
“안젤리카, 우리 착한 딸. 안젤리카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단다. 아무것도.”
아빠는 내가 안심하도록 부드럽게 머리를 토닥여 주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므시 백작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재미있는 착각을 하셨더군요, 형님. 형님을 이제까지 살려 두고 있었던 것은 아델리아의 행방 때문이었습니다.”
‘……아델리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아빠는 그 이름이 무척 중요하다는 듯 힘을 주어 발음했다.
“그, 그 여자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요, 그러시겠지요.”
“그래, 그러니 나는…….”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표정이십니까? 꼭 ‘그 일’에 무슨 관련이라도 있으신 것처럼. 하하하.”
아빠는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웃음소리뿐.
일말의 긍정적인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마치 스스로를 상처 입히려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
이므시 백작이 아빠를 보고 덜덜 떨더니,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내, 내 전부 말하마! 아델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부.”
“그런 말은 죄를 짓기 전에 하셨어야지요. 내 딸을 건드리고도 살아날 생각을 하다니, 과연 염치가 없으십니다.”
“그, 그 여자가 낳은 딸이 천륜보다 중요하단 말이냐!”
“……아.”
아빠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꼭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키는 듯했다. 아주 미세한 동작이었지만, 내게는 또렷하게 보였다.
이어 들려온 것은, 언젠가 들어 본 대사와 비슷한 말.
“오래된 핏값을 받아 가겠습니다.”
엉망진창이 된 정원. 마력풍에 흩날린 먼지가 눈에 들어가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눈을 비비고 계속 앞을 보았다.
눈물에 뿌옇게 번진 시야 속, 아빠가 잠시 나를 바라본 듯도 했다.
‘심연의 주인’에 달린 커다란 마석이 빛을 뿜어냈다. 아빠의 눈동자처럼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푹!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아주 섬뜩한 소리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므시 백작이 절명했다.
* * *
바람조차 멎은 공간에 잠시 소름 끼치는 정적이 흘렀다.
툭. 이므시 백작의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는 나를 일으켜 세워 주지도, 안아 주지도 않고 가만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긴다.
어째서일까. 지금 아빠는 나를 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단순히 화가 났다거나 속상하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지금의 자신을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느낌.
아빠가 향하는 곳은 루카가 쓰러진 곳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무기, 심연의 주인을 다시금 세게 쥐었다.
파앗-.
심연의 주인에 박힌 마석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으으윽……. 으, 쿨럭! 으윽.”
그 순간.
아직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던 루카가 숨을 캑캑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괴로워하며 바닥을 긁는 루카의 손짓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늘 아빠의 말간 얼굴을 덮고 있던 엷은 웃음이 걷히자, 그 아래에 있는 표정은…….
실로 무감정해 보여서.
푸른 눈은 시간의 더께가 앉은 듯 깊고 어두웠다.
“으, 크헉! 허억, 헉…….”
루카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시퍼레졌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안 돼, 저러다 죽겠어!’
나는 몸을 일으키고, 아빠를 향해 달려갔다. 아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아빠, 그만둬요! 루카는…….”
“안젤리카, 물러나렴. 위험하단다.”
휘익!
날카로운 바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매서운 거절이었다.
“아빠, 루카를 놔주세요.”
“…….”
아빠는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재차 말하자 마지못한 듯 심연의 주인을 멈추었다.
“으, 쿨럭! 쿨럭!”
겨우 호흡을 되찾은 루카가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아빠는 심연의 주인을 완전히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안젤리카, 이 아이는 위험해.”
“…….”
“더 이상 네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보고 싶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