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아빠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루카의 몸 안에서 마족이 깨어났다.
지금은 다시 비활성화된 것 같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몸 안에 마족이 봉인되어 있다면 루카는 위험한 존재다. 마족은 크로셀 데네브쯤 되는 강자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으니까.
수백 번의 <마.왕.꾸> 플레이에서도 한 번도 겪지 못한 초유의 사태. 미지수의 위험.
그러나 어느 것도 여기서 루카를 죽일 이유는 되지 못했다.
“나는 괜찮아요. 이미…… 이므시 백작은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안젤리카.”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빠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니? 고작 며칠 사이에 이 소년이 마음에 들었니?”
“…….”
“하긴. 우리 천사는 너무 다정해서, 가여운 아이를 보면 금방 마음을 빼앗겨 버리지. 역시 안젤리카와 만나기 전에 제거해 버려야 했을까.”
“…….”
“안젤리카, 네가 원한다면 비슷한 노예를 구해 주마.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하고 고분고분한 애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빠의 모습은, 그동안 내가 보고 싶어 했던 흑막 크로셀 데네브의 모습 그대로였다.
냉정하고, 잔인하며, 용서가 없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왜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고 싶어 했더라?
원작의 크로셀 데네브를 좋아해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어서.
강하고 멋진 아빠가 멍청한 놈들에게 어이없이 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이런 상황을, 아빠가 루카 같은 애를 자비 없이 해치우기를 바라서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안젤리카, 아빠는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단다.”
“하지만 루카를 죽이는 건 나를 위한 게 아니에요.”
“착한 우리 딸,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단하는 것뿐이다. 안젤리카가 마음 아파할 이유는 없어.”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듯 말했다.
“잘못은 되돌릴 수 있어요.”
“…….”
“루카는……. 루카의 의지로 나를 죽이려 한 게 아니잖아요. 단지 이므시 백작에게 조종당했다는 이유로 죽이는 건 가혹해요!”
그래, 루카는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공방 안에서 발작을 일으켰을 때도 루카는 내게 도망치라고 했다.
오늘 일도 마찬가지다. 루카는 이므시 백작에게 조종당하는 때에도 나를 해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설령 루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들 죽이는 것은 너무하다.
실리적인 면으로 생각해도 답은 마찬가지다.
나는 이 세계에서 그저 안전하고 무탈하게 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좋아하는 세계다.
그러니 SSS급 흑막 왕국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이 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이 세계에 오게 되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마족 안드라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안젤리카의 꿈. 그 꿈이 정말로 1회차의 기억이라면…….
원작의, 그리고 과거의 안젤리카와도 관련이 있는 마족을 그냥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냥, 저 작고 약한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잘못은 되돌릴 수 있다…… 라.”
계속 루카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빠가 그제야 나를 보았다. 너무나도 먹먹한 표정으로.
떨리는 입술로 뭐라 말을 하려다 삼키고,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아득히 먼 시선은 마치 지금이 아닌 어느 때를 응시하는 듯했다.
왜일까. 지금 이 순간, 바로 앞에 있는데도 아빠가 멀게 느껴졌다.
“아빠도 잘못은 되돌릴 수 있다고 믿고 싶단다. 그래, 되돌려야지.”
“아빠, 그러면…….”
“안젤리카가 아빠한테 화가 많이 나겠구나.”
“……!”
“미안하다.”
결심을 한 듯, 아빠가 나를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심연의 주인을 높이 들었다.
충격이 나를 뒤덮었다. 아빠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건 처음이다.
주위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차가운 빛이 빛났다.
안 돼.
그만둬.
이런 건 조금도 나를 위한 일이 아니야.
왜…….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거야? 약속했잖아. 나하고 약속했잖아.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못하고, 울음과 함께 외쳤다.
“소원 들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빠는 내게 늘 다정하고 상냥했지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은 없었는데.
왠지 지금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말을 해야만 아빠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다음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원이에요, 아빠. 루카를 놓아주세요.”
“…….”
“…….”
그리고.
우뚝.
아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고작 소원이라는 말에 무슨 억제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빠는 못 박힌 듯 서서 묵묵히 나를 보았다. 심연의 주인이 빛을 잃고, 마구 날뛰던 바람이 멎었다. 흩날리던 옷자락도 가라앉고, 남은 것은 그저 짙은 시선뿐이다.
아빠가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 ……그게 네 소원이구나.”
“…….”
“알겠다.”
아빠는 마치 패배를 선언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허탈한 듯도 한 목소리였다.
시선은 지금이 아닌 어딘가를 보는 듯 멀다.
아빠는 몹시 지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안젤리카,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 * *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안젤리카는 정신을 잃었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불면 날아갈까 소중히 여기던 왕녀가 쓰러지니 왕성은 난리가 났다. 다른 부상자도 있어 급히 의사를 불러 치료했고, 안젤리카는 방으로 옮겨졌다.
그 소란도 잦아들었을 무렵, 왕성의 정원.
마력풍에 엉망진창이 된 그곳에 크로셀이 있었다. 감히 아무도 다가오지 못해, 사위는 고요했다.
크로셀은 상판이 부서져 쓰러지기 직전인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안젤리카가 아끼던 테이블인데, 아쉬워하겠군.
아닌 척하지만 세상 만물에 정을 줄 만큼 다정한 딸이니까. 금방 소중한 것을 만들고, 그로 인해 상처받겠지.
‘소원이라…….’
크로셀은 까마득히 먼 과거를 떠올렸다. 이제는 오직 자신만이 간직하는 기억이다.
“괜찮아요, 아빠. 나, 아프지 않아요.”
“미안하다. 안젤리카, 내가 더 일찍 왔어야…….”
“그럼 소원 들어주세요.”
“……소원?”
“지금은 헤어져도…….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렇지. 다시…….”
“그러니까 그때는, 내 소원 들어주는 거예요. 뭐든지요.”
안젤리카가 기억을 찾은 걸까?
그럴 리가 없겠지. 기억을 찾았다면 안젤리카는 결코 자신에게 웃어 주지 않을 테니까.
‘잘못은 되돌릴 수 있다…… 라.’
그래서 이번에는 너를 상처 입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었는데.
하얗게 질린 낯빛, 눈물 젖은 눈, 상처 입은 표정이 마음에 남았다.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너를 상처 입힐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없애고 싶었는데.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는데, 결국 다시 나로 인해 우는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을까?”
혼잣말처럼 내던진 목소리. 대답은 크로셀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아니요, 크로셀 님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으셨어요.”
사라였다.
왕녀의 시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크로셀에게 단언했다. 당신은 최선을 다했노라고.
“하지만 결국 내가 그 아이를 울렸군.”
“……크로셀 님.”
피식. 크로셀이 헛웃음을 흘리고는 부서진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방금까지의 감상은 온데간데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묻는다.
“보고는? 어떻게 됐지?”
“듀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므시 백작의 저택에 침입했으며, 일주일 안에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크로셀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늦군.”
“네, 사흘 안에 돌아오도록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무표정으로 크로셀이 바닥의 시체를 보았다. 기이한 방향으로 목이 꺾여 죽은, 증오스러운 인간의 시체다.
“이 시체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
“……크로셀 님?”
천륜? 이 자에게 그런 것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더 잔인하게 죽이지 못한 것만이 후회다.
저 몸의 피를 남김없이 뽑는다 해도 저지른 죄의 값을 치르기에는 부족할 텐데.
“마기에 물든 이곳의 땅은 피를 좋아하지. 잘라서 들판에 내다 버려라.”
“네.”
크로셀이 손을 휘저었다. 용건이 끝났으면 안젤리카에게 가 보라는 뜻이었다.
시녀가 떠난 다음 다시금 고요해진 정원, 크로셀은 안젤리카의 말을 중얼거렸다.
“잘못은 되돌릴 수 있다…… 라.”
그래,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