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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97)화 (98/133)

97화

* * *

세이르에게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아빠의 집무실을 향해 걸으면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떡하지? 아무래도 아빠가 흑막인 것 같다.

나는 이제까지 아빠가 착하다고 믿으며 흑막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아빠는 이미 흑막이다.

자동으로 목표가 달성되었으니 개꿀인데 뭐가 문제냐고?

아니, 지금까지 내가 알던 사실들이 완전히 뒤집혔다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빠가 이므시 백작과 나눈 묘한 말들도 신경 쓰였다. ‘그 일’이니, ‘그 여자’니…….

‘내가 모르는 뒷사정이 엄청나게 많은 느낌이지.’

아빠에게 비밀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냥 단순한 비밀 수준이 아닌 거 같다. 이쯤 되면 내가 아빠에 대해 맞게 알고 있는 것이 있기나 한가 싶은 느낌이다.

루카를 죽이려 한 아빠의 냉정하고 자비 없던 모습도 떠올랐다.

만약 아빠가 정말로 흑막이라면…….

우뚝.

복도의 한가운데.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튈까?’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다른 왕국으로 도망친 후, 그 왕국에서 능력을 발휘해 요직을 차지하고 정보를 빼돌린 다음, 그 정보를 이용해 데네브 왕국을 다시 세울까?

‘……아니야.’

그러기에는 이미 이곳에서 너무 많은 기반을 쌓았다.

나는 데네브 왕국을 좋아한다.

그리고 아빠가 루카에게 유독 잔인했다고 한들, 나를 아끼는 것만은 사실이다.

“…….”

자석을 나침반에 갖다 대어 바늘이 빙빙 도는 것처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침착하자, 안젤리카. 아직 속단하긴 일러.

이제까지 아빠를 옆에서 지켜봐 왔잖아. 그 모습은 흑막 크로셀 데네브와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다.

루카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끝에 가서는 내 말을 들어줬잖아. 루카가 무사하니까, 무작정 아빠가 흑막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아직 이를지도 모른다.

‘일단 아빠랑 대화를 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

어느덧 나는 아빠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가볍게 노크하자, 이미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곧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상냥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안젤리카, 이제 몸은 괜찮니?”

“……네.”

“이리 오렴. 마침 안젤리카 주려고 간식을 준비해 두었단다.”

평온한 아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일단 안심했다. 다행이다. 평소의 아빠랑 똑같네.

하하, 역시 아빠는 착하다니까. 나도 참,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나친 생각을 해 버렸네.

그래,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혼란스럽긴 하지만 아빠가 상냥하고 나를 아낀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 루카, 그 소년에 대해서라면.”

“……네.”

다음 말은 곧바로 이어졌다. 마치 내가 깨어나면 말해 주려고 준비해 둔 것 같았다.

“듀란에게도 그렇게 말했다시피, 안젤리카 마음 가는 대로 하렴.”

“네?”

“그 소년은 이제 네 노예다.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다.”

“…….”

……아니, 흑막 맞잖아. 엄청나게 흑막 같잖아!

이게 맞는 거야? 열 살짜리 딸한테 (추정) 아홉 살짜리 노예를 안겨 주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루카를 살려 달라고 했지, 루카를 내 노예로 달라고는 안 했다고.

나는 크게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럼?”

아빠의 다정한 눈빛이 내게 와 닿았다. 아빠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평소처럼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빠, 루카를……. 루카의 몸에서 나타난 그 마족, 마족 안드라스 말이에요.”

“아, 그 마족. 그래.”

“혹시 전에 만난 적 있어요? 그래서 루카를 싫어한 거예요?”

아빠는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니, 처음 본단다. 천 년 전에 봉인된 마족을 아빠가 어찌 알겠니.”

“…….”

“다만 그 아이의 기운이 위험해서……. 아니, 이제 와서는 상관없는 일이지. 어쨌건, 이미 네 소유이니 마음대로 하렴.”

어째서일까. 근거는 없는데, 방금 아빠의 말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이므시 백작한테 아빠가 말한 그 일이라는 건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생긋. 아빠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오래된 일이란다. 이제 그자가 우리 천사를 괴롭힐 수도 없게 되었으니, 다 지난 일 아니겠니.”

“…….”

눈앞의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이쯤 되니 모른 척할 수도 없다.

‘어떡해. 진짜 흑막이잖아!’

흑막은 맞는데, 원작의 대놓고 사악한 크로셀 데네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데네브 왕국이 예전에 잔고 3 골드로 가난했던 것은 사실이고, 아빠는 여전히 내게 다정하니 말이다.

그러나 아빠는 내게 무엇 하나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속상하다. 이건 과보호도 다정함도 아니고, 그냥 나를 밀어내는 것뿐이잖아.

태도로 보아 지금 다 말해 달라고 징징대도 말해 주지 않을 것 같다.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나는 방금 듀란 할아버지에게 들은 말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가 오래 잠들어 있었다고 들었어요.”

“……듀란에게 들었구나.”

“화내지 마세요. 내가 말해 달라고 했어요. 애초에, 내 일이잖아요.”

“…….”

“왜 말해 주지 않았어요?”

“안젤리카가 이렇게 건강하게 일어났으니 되었지 않니. 아빠는 다만……. 네가 지난 일로 마음 아파하지 않길 바랐단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

무얼 물어도 이런 식이었다. 아빠는 내가 알아도 된다고 판단한 범위 밖의 것은 무엇 하나 말해 주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나는 잔뜩 속이 상한 채 몸을 홱 돌렸다.

“알겠어요. 아빠 말대로…… 루카는 제 마음대로 할게요.”

달칵.

그대로 집무실 문을 닫고 나와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충격이네.’

아빠가 아무래도 흑막 같다는 사실보다 충격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아빠가 흑막이든 상냥한 사람이든 내가 물어보면 사실을 말해 줄 줄 알았는데, 대답을 피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띠링!

그때,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히든 퀘스트> 흑막 아빠에게서 도망치기?

도망치겠습니까?

루트 1. 데네브 왕국에서 도망치기

루트 2. 데네브 왕국에 계속 머무르기]

‘아니, 안 튄다니까. 도망 안 친다고.’

지금 안 그래도 심란한데 이런 쓸데없는 선택지 띄우지 말아 줄래?

[……]

[……(로딩 중)]

내 투덜거림이 먹힌 건지 아닌 건지, 퀘스트가 도로 사라지더니 화면에 ‘로딩 중’이 뜨고 멈췄다.

어쨌거나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고 데네브 왕국을 SSS급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잠시 정지해야겠네.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정보를 얻어야 하는 법.

띠링띠링!

그때, 로딩이 끝나고 새로운 퀘스트가 떴다.

[<히든 퀘스트> 마족님에게 물어봐!

길을 헤매고 있나요?

초월적 존재와의 대화를 통해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진행도 게이지를 채워 마족 안드라스와 대화해 봅시다.

남은 시간 : 14일

달성 조건 : 마족 안드라스와 대화하기 (0/1)

보상 : 없음

실패 시 : 없음

진행도 : □□□□]

[※ 원 포인트 레슨 : 진행도를 채우기 위해서는 루카 안드라스의 호감도를 올려야 합니다. 루카와 친해져 봅시다.]

음, 이 퀘스트가 훨씬 낫네.

그나저나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고?

게임 장르 바꾸지 말아 줄래? 왕국 경영 시뮬레이션에서 웬 호감도 관리람?

속으로 잔뜩 투덜거렸지만 머리는 아까보다 맑아졌다.

루카의 안에 잠들어 있는 그 마족 안드라스. 분명히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느낌이었지.

먼저 그를 다시 불러내서 정보를 얻어 보자. 그러고 나면 다시 길이 보이겠지.

‘루카는 내 노예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면 뭐, 정말 마음대로 할 수밖에.

* * *

나는 다시 세이르와 합류한 뒤 루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루카는 왕성의 빈 침실 중 하나에 있었다.

이제 저주 ‘암흑화’의 발작은 사라졌으니 구속구는 차지 않은 상태였다. 그동안 치료도 잘 받았는지 걱정했던 것보다는 안색이 괜찮았다.

달칵.

내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루카는 화들짝 놀라 입만 뻐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루카.”

움찔.

루카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젤리카 님, 세이르 님.”

“으…… 응?”

전과 다른 말투에 닭살이 쫙 돋았다.

“갑자기 왜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퉁명스러운 말투로 잘 툴툴거리더니,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옆에 선 세이르에게 눈짓했지만 세이르도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저는 이제 안젤리카 님의 소유이니 전처럼 편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처음부터 정중한 말투를 쓴 것도 아니고, 갑자기 말투를 바꾸니 닭살 돋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일단, 말투부터 원래대로 해 줄래?”

“그래도…….”

루카의 눈이 망설임을 담고 크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전에 나를 편하게 대한 것은 그저 내가 루카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인가 보다. 이제 내가 루카의 ‘소유권’을 지녔으니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거고.

그간 루카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짐작가는 부분이라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긴 시간 동안 이므시 백작 아래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인가. 차차 나아지겠지.

나는 다시 말했다.

“제발. 뭣하면 명령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아…… 알았습…… 알았어.”

루카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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