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응? 어디가?”
나는 세이르의 손에서 목걸이를 받아 들고 살펴보았다. 곧 세이르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앞면은 고대 왕국의 문장이 찍혀 있어 별다른 점이 없었다. 그런데 뒷면의 테두리에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거, 무슨 모양이지?”
잠시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왕.꾸>에서는 금화의 앞면 그림을 바꿔 놓은 가짜 금화 구분하기 미니 게임은 있었지만, 뒷면 테두리까지는 손대지 않았단 말야.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어. 무슨 의미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아이템을 도로 정리해 넣은 뒤 생각했다.
[<히든 퀘스트> 마족님에게 물어봐! 진행도 : ■□□□]
마족 안드라스와 대화하기 위해 남은 진행도는 세 칸. 즉, 루카의 호감도를 세 단계 더 올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껏 모아 둔 아이템으로 한번에 ‘샤샤샥!’ 하고 올리는 방법이 있나 기대했는데…….
‘역시 그렇게 쉽게 날로 먹을 수는 없구나.’
그렇다면 역시 정석적인 방법으로 갈 수밖에.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역시 그 퀘스트지.
나는 내일의 계획을 세우며 웃음을 삼켰다.
* * *
루카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안젤리카가 쓰러져 있던 동안, 왕성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듣기로는 정신적으로 기력이 소모된 탓에 몸살을 앓는다고 했다.
그동안 루카는 매우 마음이 불편했다.
비록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고 하나, 루카는 그 작은 소녀를 해칠 뻔했다. 그런데 지하 감옥에 갇히는 대신 깨끗한 방에 머무르게 되었다.
안젤리카가 걱정되는 한편으로, 자신에게 걱정할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걸까.’
그런 의문만이 마음에 남았다.
루카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작고 흰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도 자신의 안에 잠들어 있는 두려운 자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마족이 언제든 다시 깨어날 것만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
“그렇게 놀라지 말거라. 너를 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크로셀 데네브였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젊은 왕이 손수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가만히 루카를 바라본다. 얼음송곳 같은 시선이었다.
“내 딸이 소원이라고 말한 이상,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
“…….”
생긋. 아무런 호감도 담기지 않은 웃음이 잠시 입가에 머물렀다가 거품처럼 꺼져 들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니?”
“……네.”
사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이 두려운 남자가 안젤리카의 소원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두고 있고, 자신이 그로 인해 살아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알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 애 곁에 위험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지.”
찰그랑.
가벼운 금속음이 들렸다. 크로셀은 품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더니 루카의 앞으로 던졌다.
“그걸 착용해라.”
단순한 디자인의 팔찌였다.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루카는 크로셀의 말대로 팔찌에 손을 꿰어 넣었다.
“……!”
그리고 놀랐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팔찌가 잠기더니 손목에 맞게 줄어들었다. 한번 잠긴 팔찌는 아무리 당겨도 도로 풀 수가 없었다.
루카는 곧장 자신의 몸에 나타난 변화를 눈치챘다.
더 이상 손이 떨리지 않았다.
마족 안드라스. 이므시 백작이 자신의 몸에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이후부터, 줄곧 자신의 안에 있던 흉포한 것.
그것이 잠잠했다.
“네 안에 있는 마족의 힘을 억눌러 주는 안전장치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루카는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크로셀은 여전히 세상 만물에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감사 인사는 안젤리카에게나 하렴. 그 아이가 네게 약을 먹이지 않았다면 그런 팔찌 따위로 억누를 수 없었을 테니.”
“네, 그, 그러겠습니다.”
“네가 그 마족의 힘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 팔찌는 자연스럽게 풀린다. 그러나 만약 그 전에 팔찌가 부서지는 날이 온다면…….”
“…….”
크로셀이 한 걸음 루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역광이 남자의 하얀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상했다. 크로셀은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으면서도 아득히 먼 곳을 보는 듯했다.
“그때야말로 내가 직접 너를 죽일 거란다.”
“…….”
“이제 네 목숨은 그 아이의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렴.”
크로셀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안젤리카가 깨어났다.
루카는 안젤리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기대를 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므시 백작조차도 한순간 자신에게 친절했던 적이 있었지 않나. 물론 그를 구슬려 마족의 영혼석을 심기 위한 수작이었지만.
그리고 이제 루카는 안젤리카의 소유가 되었다.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어.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기억이 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굴종하면서 살아왔다.
이므시 백작의 폭력에 굴종하고, 제 심장 안에 들어온 마족에게 굴종하고, 발작의 고통에 굴종하고, 크로셀의 공포에 또다시 굴종했다.
그러니 사람이 바뀐들 무엇이 달라질까.
제 주인, 안젤리카는 자신에게 무얼 바랄까. 그녀 역시 자신에게 폭력을 구하지 않을까.
물론 시시껄렁한 소리를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그 얼빠진 성미를 생각하면, 안젤리카는 다르리라는 기대를 다 죽일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이제는 자신의 자아 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아 버린 오래된 옛것. 자신이자 자신이 아닌 자. 마족 안드라스의 영혼.
- 그 아이도 다를 바 없어.
“시끄…… 러워.”
- 그 아이가 왜 굳이 너를 살렸다고 생각하지? 볼품없는 너를. 단지 마족의 힘을 원할 뿐이야.
“시끄럽다고!”
- 나는 그냥 친절하게 조언해 주는 것뿐이야. 알고 있잖아? 이미 나는 너야. 이 목소리도 네 목소리에 불과해.
“으으윽…….”
반복되는 대화에 몇 번이나 괴로워했을 때쯤 안젤리카가 루카를 찾아왔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애써 환하게 웃음 지으며 선언했다.
“왜 그렇게 놀라? 너는 이제 암흑 기사단 소속이자 내 부하 2호야.”
안젤리카는 루카를 암흑 기사단의 기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루카는 몹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암흑 기사단이라.
정확히 어떤 장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만 들어도 폭력의 냄새가 났다. 아마 아주 어둡고 비밀스러우면서도 음습한 일을 하는 장소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어쨌거나 안젤리카는 생명의 은인이고, 루카는 갈 곳이 없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게 된다 해도…….
그렇게 각오를 다진 다음, 안젤리카가 말한 장소로 갔다.
그런데 루카의 앞에는 너무나도 의외인 광경이 펼쳐졌다.
“어, 루카, 안녕. 시간 딱 맞춰 왔네!”
머릿수건을 쓰고 장갑까지 야무지게 낀 안젤리카가 루카를 보고 활짝 웃었다. 옆에는 늘 안젤리카의 옆을 따라다니는 소년, 세이르가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자, 이거 얼른 받아.”
안젤리카가 루카에게 손에 든 물건을 건넸다.
얼떨결에 받고 보니 머릿수건과 장갑, 작은 쿠션, 무늬가 있는 천 따위였다. 어딜 봐도 암흑 기사단답지는 않다.
루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암흑 기사단, 은……?”
“응? 저기 있잖아, 저기.”
루카는 안젤리카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피 냄새가 나는 기사단은커녕, 작은 방갈로가 있을 따름이었다.
안젤리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멋지지? 요 앞에서 캠핑도 할 수 있어.”
“어어…….”
안젤리카가 눈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에, 루카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카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 퀘스트다.
[<일일 퀘스트> 오늘의 데네브 왕국 퀘스트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1) 암흑 기사단을 꾸며 인테리어 점수 200 획득하기 (0/200) (미달성)
장소 : 왕성 암흑 기사단 / 보상 : 200 왕국 포인트
(2) 꽃밭을 조성하여 인테리어 점수 100 획득하기 (0/100) (미달성)
장소 : 왕성 정원 / 보상 : 300 왕국 포인트
(3) 마을의 새로운 장소 한 군데 탐방하기 (0/1) (미달성)
장소 : 마을 광장 남쪽 / 보상 : 500 왕국 포인트
※ 일일 퀘스트를 함께 수행할 사람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 일일 퀘스트는 하루에 한 번만 진행 가능합니다.]
세이르가 우리 왕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몇 번 했던 바로 그 일일 퀘스트다.
역시 호감도를 올리는 데는 노동이 최고인 법.
기초적인 반복 퀘스트 노동을 통해서 남은 호감도 세 칸을 올려야겠다.
“우후후…….”
나는 어제 막 설치한 암흑 기사단 건물을 보면서 웃음 지었다.
[<(미설정) 암흑 기사단(E)>
왕국의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어둠의 암흑 기사단. 당신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호화도 : 200
배치 : ‘부하 2호’ 루카
현재 분위기 : 미설정
※ 현재 인테리어 미설정 중. 알맞게 인테리어 하면 보너스 점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건물을 지을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던 작은 방갈로를 옮겨 놓았다. 아직 안쪽은 텅 빈 상태였다.
“안젤리카, 여기가 암흑 기사단…… 이야?”
세이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암흑 기사단이라는 이름과 아담한 건물 모습에 괴리를 느끼는 모양이다. 나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슬슬 인테리어 점수를 올리고 싶거든.”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인테리어 점수란, 이름 그대로 왕성의 인테리어를 멋지게 꾸미면 얻을 수 있는 점수다.
왕국 포인트에 비하면 중요도는 낮다. 반드시 얻어야 하는 점수는 아닌데, 점수를 많이 얻으면 자잘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인테리어 점수 500점을 넘기면 주는 보상이 갖고 싶거든.’
사실 마족 안드라스와 대화해서 나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하는 지금 급한 일은 아니긴 한데…….
‘루카가 적응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좋지 뭐.’
앞으로 자기가 사용할 공간을 루카에게 직접 인테리어 하게 해서 힐링 효과를 얻는 작전이랄까.
시간에 딱 맞춰 루카가 암흑 기사단 앞에 도착했다. 나는 쭈뼛거리는 루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자, 루카. 이곳이 이제부터 네가 지낼 암흑 기사단이야.”
텅 빈 방갈로 바깥에는 내가 미리 준비해 둔 작은 테이블과 의자, 쿠션과 커튼 등 간단한 인테리어 용품이 놓여 있었다.
“뭘 사용해도 좋아. 마음대로 꾸며 봐. 그게 내 첫 번째 명령이야.”
그러나 루카는 떨떠름하게 방갈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여길 꾸미라고……?”
“그래. 기사라고 해서 칼부림이라도 할 줄 알았니?”
“……!”
루카가 눈을 크게 떴다. 저런. 정말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