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나는 친절하게 루카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자기가 사용할 공간을 꾸미는 것은 암흑 기사단의 기본 소양이란다.”
“어어……?”
“이런, 아홉 살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니?”
“아, 아홉 살 아니거든!”
루카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방갈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루카가 방갈로를 꾸미는 동안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서성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했다. 옆에서 세이르가 내 모습을 보고 말을 걸었다.
“안젤리카, 왜 그래?”
“지금 말 걸지 마. 나 자신의 욕망과 싸우는 중이거든.”
“무슨 욕망인데?”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욕망.”
“……?”
아아, 참견하고 싶다! 루카의 인테리어에 참견하고 싶다.
어떤 순서로 배치하면 보너스 점수를 많이 얻을 수 있는지 일일이 말해 주고 싶다.
‘안 돼, 안젤리카, 참자.’
아무리 내가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라고 해도 훈수는 안 돼. 남이 게임하는데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얼마나 짜증 나는데.
그렇지만 참견하고 싶다!
같은 분위기 아이템을 세 개 배치했을 때나, 각각 다른 분위기 아이템을 섞어서 매치했을 때 추가 점수가 있다고 알려 주고 싶다.
크기가 다른 아이템을 섞어서 배치했을 때 콤보 보너스가 뜬다는 사실도 알려 주고 싶다.
“……으으.”
내가 간신히 참견 욕구를 이겨 냈을 때, 루카가 나를 불렀다.
“다 됐어.”
“그래, 수고했…… 응?”
[현재 암흑 기사단의 인테리어 점수 : 15점]
방갈로 안의 모습은 아까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의자조차도 놓여 있지 않았고, 흙바닥에 짐을 보관하는 작은 선반과, 쇠사슬을 걸 수 있는 고리를 설치한 것이 전부였다.
나는 처참한 점수를 보며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이거 왜 이래……? 왜 테이블이랑 의자도 안 놓은 거야?”
내 반응이 심상치 않자 루카가 슬쩍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다 너무 좋은 물건이고……. 어차피 전에 지내던 곳보다 넓어서, 이 정도면 괜찮습…… 괜찮아.”
“그 와중에 저 쇠사슬 고리는 왜 단 건데?”
“아, 그건. 쇠사슬에 사람을 묶으면 걸 데가 필요하니까.”
“…….”
세이르가 눈치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 쇠사슬 고리를 떼어 냈다.
즉, 루카의 말은, 자기 처지에는 텅텅 빈 방갈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이거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세이르, 루카 감시하고 있어.”
“네, 네…….”
나는 사라에게 부탁해서 왕성 안에 남는 인테리어 용품을 싹 긁어 왔다. 방갈로 앞에 쌓아 두니 산더미 같은 양이었다.
그러곤 팔짱을 끼고 서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루카, 너!”
“어, 어?”
“이제부터 나랑 지옥의 특훈을 해 줘야겠어.”
“……알겠어.”
무슨 훈련인지도 모르면서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르도 도와. 무거운 물건도 옮겨야 한다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자, 루카, 먼저 카펫이랑 쿠션, 커튼을 고를 거야. 이 세 개는 분위기를 맞춰 주는 게 중요해.”
“그럼…… 이거?”
루카가 앞에 놓인 물건 중 제일 낡고 수수해 보이는 것들만 집어 들었다.
“안 돼. 그건 기본 점수가 낮……. 크흠, 아무튼 옆에 있는 새 걸로 해.”
그리고…….
“헉, 헉…….”
나는 결국, 참견하고 싶은 게이머의 본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한참이나 이리저리 배치를 바꿔 본 뒤에야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왔다.
[<자연 친화적인 암흑 기사단(E)>
왕국의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어둠의 암흑 기사단. 당신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호화도 : 200
배치 : ‘부하 2호’ 루카
현재 분위기 : 자연 친화적
※ 자연 친화적 : 인테리어 점수 200. 정원 꾸미기 시 약간 보너스 점수를 얻습니다.]
[<일일 퀘스트>
암흑 기사단을 꾸며 인테리어 점수 200 획득하기 (200/200) (달성)
보상으로 2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히든 퀘스트> 마족님에게 물어봐! 진행도 : ■■□□]
휴우, 만족스럽군. 역시 자연 친화적인 콘셉트가 제일이지.
“그럼 다음!”
[(2) 꽃밭을 조성하여 인테리어 점수 100 획득하기 (0/100) (미달성)
장소 : 왕성 정원 / 보상 : 300 왕국 포인트]
다음 단계는 왕성 정원에 꽃밭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침 암흑 기사단 앞에 딱 좋은 공간이 있었다.
“자, 얘들아, 이번에는 여기 꽃밭을 만들 거야.”
전에 한 번 해 봤다고, 세이르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얌전히 모종삽을 쥐었다. 어째 어이없어하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루카는 떨떠름하게 모종삽과 꽃씨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걸 뿌리는 거야?”
“응. 암흑 기사단의 현재 콘셉트는 자연 친화적이니까. 그러니까 자연 친화적인 활동을 해야지.”
“어어…….”
“유감스럽지만 루카, 당분간 암흑 기사단이 칼부림을 할 일은 없단다.”
“아, 알았어!”
내 말에 갑자기 루카가 의욕을 불태우더니 모종삽을 쥐었다.
[<일일 퀘스트>
꽃밭을 조성하여 인테리어 점수 100 획득하기 (100/100) (달성)
보상으로 3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히든 퀘스트> 마족님에게 물어봐! 진행도 : ■■■□]
세 명이서 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일찍 퀘스트를 끝낼 수 있었다.
이제 딱 한 단계만 더 올리면 끝이다. 생각보다 진행이 빠르다. 이대로라면 오늘 안에 마족 안드라스와 대화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럼 마지막 일일 퀘스트는…….
[(3) 마을의 새로운 장소 한 군데 탐방하기 (0/1) (미달성)
장소 : 마을 광장 남쪽 / 보상 : 500 왕국 포인트]
다음 단계는 왕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퀘스트 창에 딸린 지도가 광장 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쪽에 새로 생긴 장소가 있던가?’
일단 가 보면 알겠지.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왕성 바깥으로 향했다.
* * *
왕성 앞 마을의 중앙을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는 광장.
데네브 왕국에 방문하는 모험가들이 동료를 구하거나 정보를 교환하는 만남의 장소다.
그 광장의 남쪽에, 낯선 건물이 하나 있었다.
‘전에는 이 자리, 그냥 안 쓰던 건물이었지…….’
“안젤리카, 이곳에 볼일이 있는 거야?”
“어어, 뭐 그런 셈이지?”
나는 다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이 가리키는 장소는 이곳이 확실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앞마당에는 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커다란 문은 열린 채였다. 가정집은 아닌 듯한데 겉으로 보아 무슨 가게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방랑자들이 여신의 인도를 따라오셨군요.”
“……어?”
나는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젊은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짙은 피부에 밀짚색 머리카락, 그리고 잿빛 눈동자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디드리크 신관님?”
“……왕녀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디드리크였다.
휴양 도시 엘나스에 갔을 때 만났던 묘한 분위기의 여명교 신관.
디드리크는 여전했다. 나긋나긋한 말씨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눈웃음을 짓는데, 그게 또 분위기가 묘했다. 모르긴 몰라도 신전에서 꽤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신관님이 어떻게 여기 계세요? 휴양 도시 엘나스의 신관님이지 않으셨어요?”
“실은…… 엘나스에서 잘렸답니다.”
“네에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드리크는 흐리게 웃으면서 말했다.
“후후……. 농담입니다. 실은 순회 근무로 그저께부터 데네브 왕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아직 어수선하지요.”
뭐야, 농담이었구나.
그래도 의문은 남아 있었다.
지난번, 휴양 도시 엘나스에 다녀온 이후로 나는 여명교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마.왕.꾸>의 제작사가 여명 교단을 업데이트한다고 공수표만 날리다 쫄딱 망한 통에 아는 것이 적었기 때문이다.
여명교의 신앙 자체는 고대 왕국 시절부터 전 대륙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신전의 세력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신관들이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개인적인 수행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재, 여명교의 신전은 한정된 지역에만 있다. 나는 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원래 신전은 자유 도시 다섯 군데에만 있지 않나요?”
“꼭 그런 건 아니랍니다. 여력이 되는 한 많은 곳에 여신의 축복을 전하기 위해 작은 신전을 세웁니다.”
“아항…….”
책과 실제는 약간 다르구나.
“이 건물도 예전에는 신전이었답니다. 상주하는 신관이 없어서 오랫동안 비어 있었지만요.”
“그, 그래요?”
이제까지 폐가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분위기의 건물. 정면에는 여신의 조각상과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있었다. 작지만 제법 신전다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천사의 숲 보육원에서 공부를 가르칠 예정이랍니다.”
마거릿네 세 자매가 있는 보육원이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손뼉을 짝짝 쳤다.
“와, 잘됐어요. 애들을 잘 부탁드려요.”
적당히 근황 이야기도 나누었겠다, 그럼 이제 슬슬 인사하고 돌아갈까 했다. 그런데 디드리크가 불쑥 말했다.
“어떠신가요. 이렇게 오랜만에 뵈었는데, 새로 점을 보고 가시는 건.”
“그 유사 타로 카드, 여기서도 해요?”
“타로 카드가 아니라니까요…….”
디드리크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과 별개로, 역시 타로 카드에는 흥미가 일지 않았다. 마음만 고맙게 받고 거절할까.
그런데 뒤에 서 있던 세이르와 루카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특히 루카. 디드리크를 쳐다보는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세이르, 루카, 점 보고 싶으면 보던가?”
“누가 저런 거 보고 싶습…… 싶겠어. 별로 관심 없어.”
“나는 괜찮아. 운명 따위 별로 믿지도 않고.”
그런 것치고는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얘들아, 그렇게 흥미진진한 얼굴로 말해도 설득력이 없는데?
내 참, 부하 1호와 2호가 모두 솔직하지가 않구나.
나는 지갑에서 용돈을 꺼낸 뒤 여신의 조각상 옆에 놓인 기부함에 넣었다.
에휴, 나는 타로 카드 따위에 흥미 없지만, 정말 흥미 없지만 어쩔 수 없네. 내가 어른스럽게 함께 어울려 줘야겠다.
“그럼 디드리크 신관님, 얘네들하고 저한테 점을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