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네, 맡겨 주세요.”
디드리크는 선반에서 카드 한 벌을 꺼낸 다음, 테이블 위에서 잘 섞었다. 지난번에 점을 볼 때 쓴 유사 타로 카드와 같은 카드였다. 뒷면에는 여명교의 문장, 앞면에는 타로 카드와 비슷한 그림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카드를 늘어놓으면서 디드리크가 설명했다.
“여명교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여신의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독창적’인 카드입니다.”
디드리크는 ‘독자적’과 ‘독창적’을 힘을 주어 발음했다. 역시 타로 카드와 비슷하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자, 이번 점은 여러분 마음속 고민에 대한 답을 알려 드립니다. 카드를 한 장씩 고르세요.”
가장 먼저 세이르가, 그다음으로 루카가 카드를 골랐다. 다들 무슨 질문을 떠올렸는지 진지한 표정이었다.
“왕녀님께서는요?”
나는 딱히 하고 싶은 질문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손이 가는 카드를 한 장 골랐다.
그리고 카드의 앞면을 확인하는 순간.
띠링!
[<히든 퀘스트> 마족님에게 물어 봐! 진행도 : ■■■■]
[<히든 퀘스트> ‘마족님에게 물어봐!’를 완료했습니다.]
“……?”
갑자기 아직 끝내지 않은 퀘스트가 멋대로 클리어되었다.
“이거, 어떻게 된 일…….”
무심코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안녕. 나를 찾았다지.”
바닥까지 닿는 검고 긴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린다.
방금까지 루카가 있던 자리에 마족 안드라스가 앉아 있었다.
“……!”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디드리크와 세이르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둘 모두 돌처럼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놀라지 마. 잠시 시간을 멈췄어. 나는 현재에 간섭할 수 없거든.”
“간섭할 수 없다고?”
“그래.”
무슨 뜻일까. 얼마 전만 해도 멋대로 루카의 몸에서 튀어나와 검을 휘둘러 댔잖아?
마족 안드라스는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대마왕께서 나를 가만히 두고 못 보시겠다니 힘없는 내가 어쩔 수 있나. 지금 이렇게 잠시나마 시간을 멈추고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여신의 힘이 깃든 그 카드 덕분이야.”
“이 카드……?”
나는 손에 쥔 카드를 다시 보았다. 달 그림이 그려진 카드였다.
‘유사 타로 카드가 아니라 진짜 신비한 힘이 있는 거였구나…….’
마족 안드라스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
“이 세계는 2회차다.”
“어? 그건 나도 알아.”
대수롭지 않아 하는 내 반응에 마족 안드라스가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내 참, 잔뜩 분위기를 잡아 놓고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만.
내가 플레이했던 <마.왕.꾸>와는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는 이 세계나, 지난번에 꾼 마족 안드라스가 나오는 꿈, 이므시 백작의 상태창 등…….
이제까지 겪은 일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결론은 이 세계가 2회차라는 것뿐이다.
‘그야 처음에는 놀랐지만…….’
애초에 게임은 기본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플레이하는 것.
한번 깨닫고 나니, 여태껏 이 세계가 2회차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족 안드라스가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얼마 전에……. 당신이 열네 살의 나를 죽이려다가 봐주는 꿈을 꾸었어.”
“하하하하! 그건 내가 아니라 루카다. 루카의 남은 자아가 나를 억눌렀지. 나였다면 바로 죽였어.”
“……역시. 그 일은 1회차 때 있었던 일이 맞구나.”
그저 직감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 확신이 되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되나.’
1회차 때도 이므시 백작은 마족 안드라스를 소환해 안젤리카를 죽이려 했다.
루카가 저항한 덕분에 안젤리카는 마족에게 죽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므시 백작에 의해 약혼식 날 죽었다.
<마.왕.꾸>에서 크로셀 데네브가 이므시 백작을 잔인하게 처리한 일 또한 딸의 복수였다고 생각하면 아귀가 맞는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어떻게, 왜 시간이 되감겨서 2회차가 된 거지?”
“…….”
마족 안드라스는 턱을 괴고 앉아 말없이 나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하지 못한다는 제스처인 듯했다.
“말 못 한다는 거네. 다른 정보는? 쓸모 있는 이야기 없어?”
“너는 진짜 안젤리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붉은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1회차와 2회차 사이에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네가 여전히 진짜 안젤리카라는 사실뿐이야.”
내게는 빙의 전의 기억이 있다. 비록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게임하다가 엔딩을 앞두고 쓰러지는 어이없는 끝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1회차의 기억이라곤 꿈으로 꾼 그 짧은 순간밖에 없다. 그런데도 내가 진짜 안젤리카일 수 있는 걸까.
곰곰이 말뜻을 생각하는 나를 보며 마족 안드라스가 다시 말했다.
“세계 전체의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많은 부작용을 낳아. 그중 하나가 네가 잠들어 있던 일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띠링띠링! 띠링띠링!
[시스템 에러! 시스템 에러!
플레이어 ‘안젤리카 데네브’에 대한 비정상적인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파지직!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마족 안드라스가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찡그리더니 혀를 찼다.
“칫,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는군. 이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무튼.”
“…….”
“이 세계는 위기에 처해 있다.”
“……응?”
갑자기요?
비록 내가 흑막 엔딩에 도달해 압도적인 힘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겠다는 큰 목표를 품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야기의 스케일이 너무 커지지 않는지?
“올바른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머지않아 멸망한다.”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마족 안드라스는 다시 또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마.왕.꾸>의 세계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뜬구름 잡는 주제는 선호하지 않는다.
침착하자. 이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올바른 결말이란 뭔데?”
“네가 생각하는 결말.”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는 뭐야?”
“천 년쯤 잠들어 있으면 지루하거든. 그리고…….”
파지직!
다시 스파크가 터졌다. 조금 전보다 강하고 길었다.
이 시간이 곧 끝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마족 안드라스는 스파크에 저항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를 찾아라.”
마족 안드라스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안드라스! 조금만 더! 치사하게 말 아끼지 말고 조금만 더 말해 줘.”
“이제 잠들 시간이야.”
검고 긴 머리카락이 끝에서부터 빛으로 변해 공중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네가 정화의 샘물로 나를 정화했으니, 나는 천천히 이 꼬마 안에 흡수될 운명이거든.”
그가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러했다.
“이 녀석을 잘 부탁한다.”
“……!”
“안젤리카. 왜 그래?”
나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정상적으로 시간이 흐르는 주변 모습이 보였다.
마족 안드라스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루카가 있었고, 디드리크는 세이르에게 카드를 해석해 주는 중이었다.
‘……사라졌어.’
마족 안드라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방금까지 본 광경이 거짓말 같았다.
“……안젤리카?”
“으, 응? 아, 미안. 잠시 카드를 보면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느새 세이르와 루카의 카드 해설이 다 끝났다. 머릿속이 복잡한 통에 거의 듣지는 못했지만, 둘의 표정을 보니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디드리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왕녀님 차례로군요. 자, 카드를 보여 주시겠어요?”
나는 곧장 카드를 주는 대신, 복잡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이 카드, 뭐예요?”
어떻게 이 카드를 쥐자마자 마족 안드라스가 나타날 수 있었던 거지?
디드리크는 여우를 닮은 눈을 접으면서 웃었다.
“전에 말씀드렸었지요. 여신의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독창적’인 카드랍니다. 자, 카드를 이리 주시겠어요?”
“……네.”
달이 그려진 카드를 한참이나 들여다본 디드리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왕녀님께서는 이미 답을 얻으셨으니,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이 없군요.”
“에엥, 정말요?”
나는 깜짝 놀라 디드리크를 쳐다보았다.
“죄송하니까 아까 내신 돈은 돌려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신관님 말씀이 맞아요. 답을 얻었으니, 기부금은 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차르륵, 탁!
디드리크가 카드를 정리하여 품에 갈무리했다.
“카드 해석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답이 마음에 드셨을까요?”
“네, 감사해요.”
“저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 예정입니다. 언제든지 편히 찾아오세요.”
디드리크는 그늘진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배웅했다.
참 신비한 사람이다.
[<일일 퀘스트>
마을의 새로운 장소 한 군데 탐방하기 (1/1) (달성)
보상으로 5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
요즘, 데네브 왕국의 왕성은 살얼음 밟듯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다.
원인은 바로 왕녀 안젤리카였다.
“안젤리카 님, 정원을 산책하러 가시겠어요?”
“응, 좋아! 아, 아니야. 지금은 됐어.”
“……안젤리카님?”
…….
…….
“안젤리카 님, 이거 봐! 거대 틸라를 키웠어!”
“우와, 멋져. 케나스한테 가져가서 구워 달라고…… 아, 나, 급한 일이 생각나서!”
“안젤리카 님, 어디 가?”
…….
…….
“루카, 자연 친화적인 암흑 기사단은 매일 꽃밭에 물을 줘야 한단다.”
“매일 주고 있어.”
“좋아, 그럼 두 번째 꽃밭을 만들…… 어야 하지만 오늘은 됐어. 난 바쁘거든!”
“뭐어어?”
안젤리카가 크로셀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안젤리카는 크로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거북한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녀 나름대로는 크로셀을 피한다는 사실을 감추려 하는 듯했다. 그러나 워낙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성격이라, 사흘 만에 온 왕성 식구들이 알게 되었다.
은근슬쩍 사라가 무슨 일인지 물어봤지만 안젤리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작 크로셀은 안젤리카의 이상 행동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안젤리카가 크로셀을 피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왕성 고용인들만 바짝바짝 속이 탔다.
급기야 안젤리카가 크로셀을 피하느라 간식을 먹지 않은 날. 케나스는 사색이 되어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았다.
“……제가요?”
그 사람이란 물론, 긴 시간 안젤리카의 옆에 있는 세이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