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의아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빠를 따라 밖으로 나가 보았다.
“어?”
앞뜰에는 처음 보는 하얀 말이 묶여 있었다. 몸집이 작은 조랑말로, 이제껏 내가 본 어떤 말보다도 예쁘게 생겼다. 하얀 털과 하얀 갈기가 윤이 나서 반짝반짝했다.
“로디, 웬 조랑말이야?”
로디는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말은 평범한 말이 아니랍니다……. 이 말의 할아버지가 바로 유니콘이거든요…….”
“유니콘?! 진짜?”
희귀 몬스터로 분류되는 유니콘은 개체 수가 적은 데다, 극소수의 후손만 남긴다. 고작 2세대 위의 조상이 유니콘이라니, 가격도 가격이지만 무척 구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런 말이 왜 여기 있어?”
“크로셀 님이 주문하셔서 데려왔습니다……. 진짜 구하기 힘들었어요. 크로셀 님이 알려 주신 목장에 있어서 망정이지…….”
“틀림없군. 고생 많았네.”
“휴……. 정말, 날짜를 맞춰서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선물은 당일에 받는 게 가장 좋죠…….”
아빠가 이 말을 주문했다고?
나는 아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빠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안젤리카, 네 생일 선물이란다.”
“네에에?!”
“우리 천사가 승마를 배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치만…….”
이미 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걸로 생일 선물을 대신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아빠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안젤리카의 생일인데 당연히 아빠가 선물을 줘야지. 유니콘의 피를 이어 영리한 말이니, 조금만 연습하면 금방 탈 수 있을 거란다.”
“그럴까요?”
“그럼.”
아빠의 말대로 승마에는 관심이 있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승마를 배워 두면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유니콘의 피를 이은 이 말도 무척 예뻐서 흥미가 생겼다.
그때, 새하얀 말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손바닥을 날름 핥았다.
“으햐악!”
간지러운 느낌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더니, 이번에는 말이 고개를 홱 돌린다.
“얘, 안녕?”
“……히힝.”
내가 고개를 들이밀자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느낌이 왔다. 얘 방금, 고귀한 혈통을 지닌 내가 너 따위를 태울 줄 아느냐고 말했다.
눈처럼 고운 털 결과 귀여운 생김새에 비해 성격은 까탈스럽고 콧대 높은 모양이다.
그 점이 진짜 마음에 들었다.
그래, 흑막의 외동딸인 내가 탈 말인데 그 정도 성격은 있어야지.
“우후후…….”
빨리 연습해서 이 말을 타고 싶어졌다.
먼저 이름을 지어 줘야겠다. 이 멋진 외양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골라야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선언했다.
“네 이름은 오늘부터 복슬이야.”
“……히힝!”
복슬이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더니 앞발로 바닥을 찼다.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아니, 왜? 털이 길고 복슬복슬하니까 복슬이. 딱 어울리잖아.”
“히히힝!”
로디가 옆에서 슬쩍 한 마디를 보탰다.
“왕녀님……. 참고로 이 말이 태어난 목장에서 붙인 아명은 ‘네프테리안 소니아’입니다…….”
“네프테리안? 길어. 복슬이가 더 어울려.”
“히히히힝!”
이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복슬이가 마구 발을 굴렀지만.
“정말 예쁜 이름이구나, 안젤리카. 복슬이도 아직 어색해서 그러는 걸 테다. 곧 적응하겠지.”
“히힝!”
“우리 천사가 지어 준 이름을 거부할 정도로 어리석은 말은 아니겠지. 그렇지?”
“히, 히힝…….”
아빠가 이렇게 말하자 곧 수긍했다.
심지어 쑥스러워하는 건지 뭔지 뒷걸음질로 아빠 앞에서 도망치더니 내 등 뒤에 숨어 고개를 감추기까지 했다.
내 참, 우리 아빠가 잘생긴 건 알아 가지고. 잘생긴 사람이 말하니까 듣는 거야? 성격은 까탈스럽지만 심미안은 제대로 되었구나. 더더욱 마음에 든다.
“정말 기뻐요! 감사해요, 아빠.”
띠링!
그때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서브 퀘스트> 복슬이는 사랑을 싣고
생일 축하합니다!
유니콘의 피를 이은 고귀한 말, 복슬이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복슬이는 섬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입니다.
복슬이를 자유자재로 탈 수 있도록 열심히 연습합시다.
남은 시간 : 60일
달성 조건 : 5회 이상 복슬이를 타고 1000m 이상 달리기 (0/5)
보상 : 경험치 300exp, 특성낙마 방지(C), 아이템고급 맞춤 안장
실패 시 : 복슬이의 호감도 하락]
마침 퀘스트가 떴다. 승마 연습 퀘스트라니 지금 딱 필요한 것이었다.
퀘스트도 떴겠다, 내일부터 승마 연습을 해야지!
말을 잘 탈 수 있게 되면 혼자서도 멀리 돌아다닐 수 있다. 엄마를 찾으러 멀리 떠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도움이 될 테다.
* * *
본격적인 승마 연습은 내일부터 하기로 했다. 나는 우선 복슬이를 마구간에 데려다 놓은 뒤 방으로 향했다.
“……안젤리카.”
그런데 내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 앞, 세이르가 서 있었다. 세이르는 나를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세이르, 여기서 뭐 해?”
“안젤리카를 기다리고 있었어.”
“나? 왜? 아, 그보다 세이르, 내일부터 같이 승마 연습 하자.”
“……좋아.”
“내가 초보자라고 같이하기 싫다고 하면 안 된다? 어, 뭐, 좋다고?”
혼자서 연습하면 금방 싫증 나는 법. 그래서 세이르와 루카더러 같이 승마 연습을 하자고 권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승낙할 줄은 몰랐다.
세이르는 조금 웃고는 말했다.
“하하. 싫다고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긴 틈으로 부드러운 침묵이 밀려 들어왔다. 거북하지 않은 정적 속에서 세이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 아이보다는 소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나이.
지금은 내 공방에서 나랑 같이 찰흙이나 주무르고 있지만, 조금만 더 자라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지 않을까. 크고 나면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 될 거 같거든.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살짝 그에게서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어, 아, 맞아. 할 말 있다고 했었지. 뭔데?”
“열한 살 생일 축하해, 안젤리카.”
“축하라면 아까도 했잖아. ……어?”
세이르가 등 뒤에 감췄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에는 작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예쁜 종이로 감싼 것이 아무리 봐도 선물이었다.
“선물, 안 줘도 되는데.”
이미 넘치도록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렇기에 굳이 선물까지 챙겨 주지 않아도 충분히 고마웠다.
“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
“사실은 아까 주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 버려서. 받아 줄래?”
세이르가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선물을 건네서, 나는 차마 더 사양하지 못했다. 대신 조심스럽게 꾸러미를 받아 들고 물었다.
“풀어 봐도 돼?”
“응, 물론.”
“어, 이건…….”
꾸러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에메랄드빛의 예쁜 리본이었다. 좋은 비단을 썼는지 손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고, 길이도 딱 좋았다.
그런데 이 리본, 본 적이 있었다.
마을 축제 날 잡화점을 구경했을 때 내가 눈독 들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잡화점에 가서 이 리본을 사려고 했는데 팔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거…… 세이르가 산 거였어?”
어쩐지 누가 리본을 사 갔는지 디드리크가 기억하는 기색이더라니, 세이르였구나.
“전에 안젤리카가 이 리본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길래.”
마을 축제 날 내가 리본을 구경한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주위에 사람도 많은 와중에 스쳐 지나가는 한순간.
그런데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선물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세이르가 그 짧은 순간을 기억하고 선물을 골랐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에 안 들어?”
조금 불안한 듯, 세이르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이거 진짜 갖고 싶었어. 정말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나는 포장을 푼 뒤 리본을 머리카락에 감아 보았다.
“어때? 어울려?”
“응, 어울려.”
세이르는 손을 뻗어 리본에 감긴 머리카락을 만지려다가 멈칫하고는 도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갈게, 내일 봐.”
그리고 이 말만 남기고는 복도 저편으로 달려갔다.
* * *
“으으으…….”
“안젤리카, 천천히. 허리 펴고 바닥 보지 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세이르가 해 봐!”
“그러고 싶어도, 저 말은 나 안 태워 줄 텐데.”
“안젤리카, 나 먼저 간다.”
“……어, 루카!”
다음 날. 나는 승마 연습을 시작했다.
아빠는 괜찮은 선생님을 구해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그냥 말을 탈 줄 아는 세이르가 나를 가르치기로 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승마가 처음인 루카도 같이 연습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승마복도 준비한 다음 시작한 연습이라 나는 신이 났다.
……시작할 때까지는 말이다.
이상하다. 전에 세이르랑 같이 말을 탔을 때는 훨씬 더 큰 말인데도 괜찮았는데.
몸이 내 생각처럼 따라 주지 않아, 복슬이 위에 올라탄 뒤로는 모든 게 난관이었다.
심지어 루카는 몇 번 해 보더니 금방 익숙해져서는, 나만 놔두고 승마장을 신나게 달렸다. 뭔데, 같은 초보자인데 이 차이 뭔데!
“으으…….”
“안젤리카, 심호흡하고 자세 바로 해. 그렇게 앉아 있으면 위험해.”
“지금 최선을 다하는 중이야.”
“아, 정말?”
세이르는 성심성의껏 나를 가르쳤다. 다만 내 몸이 따라 주지 않았을 따름이다.
으으, 분하다. 끝나고 공방으로 돌아가면 찰흙 덩어리 서른 개 빚게 시킬 테다.
나는 상태창의 퀘스트 화면을 노려보았다.
1000m씩 다섯 번, 총 5000m를 달리면 끝나는 간단한 퀘스트다. 속도 기준도 없고, 달성 조건도 어렵지 않다. 기초적인 수준만 떼라는 퀘스트 같달까.
그런데 5000m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유니콘의 피를 이었다며 콧대 높은 말 복슬이는, 뜻밖에 쉽게 내가 등에 타게 해 주었다. 그러나 딱 그뿐이었다. 내가 제대로 자세를 잡고 고삐를 쥐지 않으면 한 걸음도 걷지 않겠다는 듯 도도하게 서 있을 따름이었다.
“히히힝…….”
느긋한 복슬이의 울음소리가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타고 달릴 수 있으면 달려 보시던가. 못하겠지만!’
이이익, 분하다. 누가 질 줄 알고!
안 되겠다. 정정당당한 승부로는 해가 질 때까지 이 말을 타기 힘들겠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의 방식으로 승부를 할 수밖에.
‘우후후, 복슬아. 비겁한 플레이어에게는 플레이어만의 방식이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