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방금의 가짜 기사들은 해치웠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다프네 왕비는 왕의 장례식을 명분으로 또 기사들을 보낼 뿐이겠지. 그때도 귀국을 거부했다가는 공연한 의심을 살 뿐이다. 예를 들어, 세이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거나 하는.
혹 다프네 왕비의 수작을 피해 진짜 왕국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세이르가 무사히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그레고리 국왕이 죽었으니 다프네 왕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테다. 그 아들은 아직 어리니 자연히 다프네 왕비가 섭정을 맡는다.
다프네 왕비는 더욱 커진 힘과 권력으로 세이르를 언제든 처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엣가시로 여기던 세이르를 살려 둘 리는 없겠지.
그동안 리어 왕국이 세이르를 돌려 달라는 연락을 전혀 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어차피 곧 그레고리 왕이 죽기 때문이다. 국왕이 죽으면, 세이르는 귀국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 리어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이르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어떻게 하면 세이르를 보호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나는 그저 마른침을 삼켰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세이르의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황야의 끝, 까마득히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세이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베나토르 아카데미에 가려고 해.”
나는 비스듬히 보이는 세이르의 얼굴에서 분명한 의지를 발견한다.
과거의 비관과는 다른 빛이 그의 얼굴에 감돌았다. 세이르는 이미 떠나기를 각오한 듯했다.
나는 그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피치 못하게 데네브 왕국을 떠나게 될 순간을 예감했음을 알았다.
“베나토르 아카데미라고? 그게 정말이야?”
세이르가 말한 아카데미는 대륙의 반대쪽 끝에 있는 명문 아카데미였다. 규모가 커서 학교 전체가 하나의 도시나 마찬가지다. 어느 왕국에도 속하지 않으며 자치권을 갖고 있는 곳.
확실히 그곳이라면 세이르는 안전할 테다.
베나토르 아카데미는 관계자가 아닌 외부인의 출입이 극도로 제한된다. 일단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만 하면 학업을 명분으로 내세워서 곧장 귀국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아주 엄격한 곳인 만큼 허투루 학생을 받지 않는다.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도 없다. 추천장이 있다면 조금 낫지만, 없으면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시험을 통과하고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내 걱정을 짐작한 듯 세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추천장을 갖고 있으니까.”
“추천장……? 어떻게?”
“예전에 크로셀 님에게 받았어. 아마 오늘 일을 짐작하신 거 같아.”
‘아빠가……?’
아빠가 미리 대비해 놨다니 약간 의문스럽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사소한 의문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세이르가 베나토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 다프네 왕비조차도 쉽사리 사람을 들여보낼 수 없는 곳이다. 세이르가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기만 하면, 아카데미는 세이르를 보호할 테다.
“그렇구나, 잘됐어! 거기라면 안전할 거야.”
그러니 세이르에게 얼른 출발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괜스레 바닥만 툭툭 찼다. 세이르가 말했다.
“아쉽지는 않아?”
“별로……. 애초에 내가 너를 멋대로 데려온 거고. 네가 없어도 여기는 아무 상관 없으니까.”
“그래도 나는 아쉬워. 많이 그리울 거야.”
“…….”
“잠깐만.”
그때 세이르가 몇 걸음 어디론가 가더니 말을 한 마리 끌고 왔다. 기사들이 타던 말 중 한 마리였다. 다행히 멀리 도망가지 않고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베나토르 아카데미는 여기서 대륙의 반대쪽 끝이다. 제때 도착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우리는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이르는 한 손으로 말의 고삐를 붙잡고 서서,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불쑥 말했다.
“안젤리카, 이제까지 나는 너한테 도움받기만 한 것 같아.”
“……아니야.”
나 역시 세이르를 만나서, 이 녀석을 반쯤 억지로 우리 왕국으로 데려와서 즐거웠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니, 도움이라고 표현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이르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세이르 뮨 엘레인의 상태 이상 ‘염세주의’가 완전히 해제되었습니다.]
그때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세이르의 염세주의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갑자기 황야에 메마른 바람이 불어닥쳤다. 나는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눈을 찡그렸다가, 잠시 뒤 다시 떴다.
바람도 멎어 고요한 황야 위, 초봄의 풀잎을 닮은 색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했던 뿌리 깊은 비관을 떨쳐 낸 눈이 반짝였다.
그 시선이 너무 곧고 아름다워서…….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세이르,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응?”
나는 복슬이의 안장에 달린 가방을 열어 어떤 물건을 꺼냈다. 그것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다시 돌아와 세이르에게 내밀었다.
“이거 줄게, 가져가.”
내가 내민 것은 비둘기 모양으로 생긴 도자기였다. 세이르가 일단 받아 들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마법 전서구야. 이게 있으면 어디서든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도착하면 편지 보내.”
세이르가 마법 전서구를 소중하게 품에 챙겨 넣었다.
“알았어. 꼭 편지할게.”
“세이르, 꼭 열여덟 살이 돼. 어른이 되는 거야.”
원작에서 이루지 못한 일을 이번 세계에서는 꼭 이룰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세이르는 잠시 망설이더니 손을 뻗었다. 손은 내 뺨을 감싸려다가 멈칫하더니, 대신 내 머리카락을 장식한 에메랄드빛 리본을 붙잡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역시. 너한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웃으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리본의 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가벼우면서도 긴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못내 아쉬워하며 리본을 놓았다.
“갈게.”
“……응.”
황야의 저편으로 말이 달렸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 *
세이르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와 루카가 황야에 도착했다.
사라는 황야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놀라더니, 나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젤리카 님……. 많이 슬프시겠어요.”
“으으응, 괜찮아. ……괜찮아.”
세이르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거니까, 아쉬워하지 않을 테다.
소풍을 하러 갔다가 사람이 한 명 줄어서 돌아왔는데, 아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위로하듯 다정하게 안아 주었을 따름이다.
나는 아빠의 품에 고개를 기대며 물었다.
“아빠. 아빠가 세이르한테 베나토르 아카데미의 추천장을 주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떻게 그 들어가기 힘든 아카데미의 추천장을 손에 넣었는지.
오늘 일, 그러니까 그레고리 국왕의 갑작스러운 사망, 그리고 이를 계기로 세이르를 죽이려는 시도까지도 짐작했는지.
무엇보다도…….
“……어째서요?”
나는 이제 이 사람이, 아빠가 깜짝 놀랄 만큼 다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차갑다는 사실을 안다.
머지않아 다프네 왕비는 리어 왕국의 모든 실권을 손에 넣을 테다. 그녀가 오늘 일을 구실로 데네브 왕국을 압박해 올 가능성도 있었다. 세이르를 빼돌렸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아빠는 세이르가 제때 도망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준비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궁금했다.
아빠는 부드럽게 내 등을 토닥이며 대답했다.
“그 아이가 죽으면 우리 천사가 슬퍼할 테니까.”
“…….”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한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빠.”
세이르가 떠난 뒤 한동안 왕성 사람들은 나를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처럼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들의 그런 태도가 짜증스럽게 느껴질 때쯤.
“……!”
마법 전서구가 편지를 갖고 돌아왔다.
나는 곧장 세이르의 편지를 꺼내 읽고 깜짝 놀랐다.
[잘 도착했어.]
잘 도착했어? 자알?
나는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기가 막혔다.
그렇게 떠난 다음 처음으로 보내는 편지에 할 말이 그것뿐이야? 종이에 여백 너무 많지 않아? 육하원칙에 따라 어디가 어떻게 괜찮은지 자세히 쓰란 말야.
나는 곧장 펜을 들었다.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야.
베나토르 아카데미는 어때? 수업은 들을 만해? 너는 똑똑하니까 괜찮겠지만.
여기는 여전해.
참, 그날 숲에서 발견한 고슴도치 있지. 결국 내가 키우게 되었어.
그날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로코가 잘 데리고 왔더라고. 이름은 모코야.
그런데 이 고슴도치 좀 이상해. 다음에 만나면 말해 줄게.
그보다, 종이도 아까운데 편지를 길게 써 보는 건 어때? 최소 열 줄은 써!]
나는 이렇게 답장을 썼다가, 너무 구구절절한 것 같아 구겨서 버려 버리고 새로 썼다. 길게 쓰려니 지는 기분이라 내용은 짧았다.
[여기는 여전해. 아카데미는 어때?]
다음번 편지는 약 한 달이 지난 뒤에 왔다. 이번에도 종이에 비해 내용이 짧았다.
[아카데미 식당에 특이한 메뉴가 있어.
안젤리카가 좋아할 것 같아.]
이번에는 식당 이야기야?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고, 다시 한참 뒤에 답장이 왔다. 이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세이르의 편지는 늘 짧았는데, 꼭 자신이 무사하다고 내게 생존 신고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리어 왕국에서 장례식이 끝난 뒤, 사신이 데네브 왕국을 찾아왔다.
용건은 물론 세이르가 아카데미로 떠난 일에 대한 항의였다. 사신은 세이르와 데네브 왕국의 관계를 의심했다.
아빠가 직접 사신을 상대했기 때문에, 세세한 내용까지는 듣지 못했다. 아무튼 사신은 식사도 하지 않고 꽁지 빠지게 돌아갔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리어 왕국은 아직 어린 왕자, 에드윈 리어가 왕위를 물려받았고 다프네 선왕비가 섭정이 되었다. 이후 공격적으로 세를 확장했고, 데네브 왕국 역시 가파르게 성장했다. 자연히 나 역시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그런 와중에 세이르의 편지는 기다려지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편지가 오는 간격이 점점 길어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오던 편지가 한 계절에 한 번, 반년에 한 번이 되더니 이윽고 그마저도 끊겨 버렸다.
마법 전서구는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나는 열네 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