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어?
어어? 설마?
나는 뒤늦게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얼떨떨해져서 말했다.
“……설마, 세이르?”
“못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아니, 이렇게 쑥 커 버렸는데 어떻게 바로 알아봐?
“하하…….”
살짝 찡그리는 저 표정을 보니 이제 알겠다. 정말로 세이르다.
세이르가 부쩍 큰 모습으로 내 앞에 있었다.
방금까지 내 앞에서 느끼하게 굴던 나딘은 세이르가 등장하자마자 바짝 쫄아 붙었다. 태세 전환이 엄청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표정을 봐서는 꼭 세이르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세이르는 나딘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미안해. 여기까지 왔는데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 버렸네.”
그리고 슥, 옆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스텔라가 나딘의 옷깃을 붙잡더니 질질 끌고 나가 밖에 던져 버렸다.
그제야 홀 안에 소리가 돌아왔다. 굳어 있던 공기가 다시 부드러워진 느낌. 주위를 서성이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아카데미의 원로 이사 한 명이 짧은 축사를 했고,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세이르는 내게 춤을 청하고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나 춤은 잘 못 추는데.”
여기 오기 전, 따로 춤을 연습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초대장을 받아 이 무도회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춤까지 출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세이르는 빙그레 웃으며 홀의 중앙에서 내 손을 고쳐 잡았다.
“괜찮아. 나한테 맞추면 돼.”
그렇게 말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우면서도 능숙하다. 나는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며 속삭였다.
“너, 진짜 세이르 맞지? 사실은 다른 사람이 세이르인 척하는 거 아니지?”
“틀림없는 세이르 뮨 엘레인 맞아.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그야…….”
이렇게 마주 보고 선 상태에서 얼굴을 보려면 이제 고개를 뒤로 꺾어야 했다. 팔다리가 길쭉하게 뻗은 모습이, 또래 중에서도 큰 편 같았다.
이상하다. 지난 3년간 나도 꽤 컸는데, 세이르는 어떻게 그보다 더 큰 거람. 얘 혼자만 키 크는 비법이라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굴은 또 어떤가. 턱선이 갸름해지고 이목구비는 한층 더 선명해졌다. 워낙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부쩍 어른에 가까워진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많이 변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릴 적 그대로인 부분도 있었다. 싱그러운 웃음, 경쾌한 듯 다정한 태도, 초록빛 눈이 머금은 호의 따위였다.
세이르가 나를 붙잡고 음악에 맞춰 빙글 돌았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만든 그림자가 그의 얼굴 위에서 흔들린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부쩍 큰 세이르와 다시 만나서 함께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그립다.
시간의 공백이 분명하게 자리하는데, 동시에 바로 어제 그를 만난 것 같기도 했다.
분명 현실인데도 어딘가 현실 같지 않은 느낌.
그리고 세이르는 정말로 춤을 잘 췄다. 무도회에서 추는 춤을 잘 모르는 나도 그가 능숙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음악에 맞추어 세이르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바짝 붙이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그거 어떻게 한 거야? 꽃 말야.”
“안젤리카한테는 더 예쁜 꽃이 어울릴 것 같아서.”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라. 슈욱, 팟 하더니 꽃이 가루가 됐잖아.”
나딘이 내게 내민 꽃, 분명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는데 부서졌다. 그렇다고 마법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 그거. 검기야.”
“응?”
나도 모르게 세이르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연회용 옷차림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당연히 성검은 차지 않은 상태다.
“검이 없는데 검을 쓸 수 있는 거야?”
그럼 애초에 검기가 아닌 거 아닌가?
음악의 템포가 빨라졌다. 세이르는 나를 안아 빙그르르 돌리고는 내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그러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글쎄, 그냥 되던데.”
무슨 태연한 얼굴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잠깐, 맞다, 상태창!’
띠링!
눈앞에 세이르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이름 : 세이르 뮨 엘레인
직위 : 엘레인 소공작(A)
소속 : 베나토르 아카데미
레벨 : 62
특성 : 성검의 주인(S), 아카데미의 학생회장(A)]
나는 깜짝 놀랐다.
‘레벨이 62라고?’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23이었나 24였던 거 같은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지만, 그사이에 레벨이 이렇게나 많이 올랐다고?
“……윽, 안젤리카.”
아차. 상태창에 한눈파는 바람에 그만 세이르의 발을 밟아 버렸다. 나는 세이르의 팔 위에 손을 얹고 미안하다는 뜻으로 눈을 찡긋했다.
상태창에는 레벨 외에도 또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아까 세이르가 나타났을 때 좀비가 한 말을 듣고 짐작하기는 했지만, 재차 확인했달까.
“세이르가 학생회장이었구나.”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나는 기가 막혀서 세이르의 발을 꾹 밟아 주었다. 이번에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였다.
“……윽!”
“말 안 했어! 아니, 거기다 편지에도 계속 답장 안 했잖아.”
춤을 추다 말고 큰소리를 내니 뒤통수로 꽂히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미안.”
“…….”
“학생회장 일은 말할 틈이 없었어. 학생회장이 되는 과정 중에 이런저런 잡음이 생겨서 그걸 해결하느라.”
“…….”
“편지 답장도 미안.”
세이르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만나면 잔뜩 화를 내 줄 생각이었는데, 막상 사과를 들으니 우습게도 금방 화가 풀려 버렸다.
“답장은 왜 안 했는데?”
하지만 화가 풀려 버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부러 퉁명스레 물었다.
“언젠가부터 주위를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조심해야겠다 싶었어.”
“뭐?”
갑자기 놀라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주위에 눈이 많았다. 나는 눈빛으로만 의문을 표시했다.
음악 소리가 커졌다. 세이르는 음악에 파묻혀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원래는 이 성령제에 너를 초대하는 것도 고민했어. 혹시라도 네가 휘말릴까 봐.”
“…….”
“그래도…… 보고 싶어서.”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에서 초록빛 눈이 반짝거렸다. 거리가 가깝다.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나는 괜스레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렸다.
“세이르, 누가 너를 감시하고 있으면 위험한 거 아니야?”
뜻밖에도 세이르는 이 질문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이젠 괜찮으니까.”
아니,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더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려 했는데, 고조된 춤곡이 이윽고 끝을 맞이했다.
부쩍 어른에 가까워진 소년이 아쉬운 듯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녹아내릴 듯 짙은 웃음을 담아 말했다.
“네가 와 줘서 기뻐, 안젤리카.”
첫 번째 춤곡이 끝난 이후에 니키와 루카도 세이르와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들 세이르를 반가워했고, 경쾌한 분위기 속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데네브 왕국을 떠나고 3년 만이다. 화젯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시간은 금방 흘렀고, 어느덧 무도회를 파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슬슬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겠다, 아쉽지만 돌아가야지 싶었다.
“안젤리카 님, 이제 돌아가려고?”
숙소까지 안내를 부탁하려고 스텔라를 찾는데 니키가 불쑥 말을 걸었다.
“응, 니키는?”
“나도 이제 가고 싶긴 한데…… 아!”
니키가 갑자기 내 등 뒤를 보고 놀란 소리를 냈다. 차가운 음료 두 잔을 갖고 온 세이르가 서 있었다.
세이르는 나와 니키에게 음료를 한 잔씩 건넸다. 단숨에 그 음료를 다 마신 니키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럼 세이르 님이 안젤리카 님 데려다주면 되겠다.”
“응? 아니, 그럴 것까진 없는데.”
실은 아까부터 주위에 세이르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학생회장이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이참에 가까워졌으면 하는 사람이 많겠지.
눈치가 나쁜 애는 아니니 세이르도 충분히 그런 기색을 느꼈을 테다. 그러나 세이르는 자신의 주위를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세이르는 무도회 시작부터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었으니, 슬슬 그를 놓아줄까 하던 참이었다.
거기다 이 연회장에서 방문객용 숙소까지는 가깝다. 사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이르는 선뜻 나를 데려다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안내할게. 니키, 스텔라한테는 먼저 돌아갔다고 전해 줘.”
나는 니키를 붙잡고 물었다.
“그럼 니키도 같이 가자. 이제 돌아가고 싶다며?”
“어? 으, 으응? 아니야! 나는 좀 더 있다가 루카 데리고 갈게. 먼저 돌아가!”
니키는 금방 태세를 바꾸더니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다는데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니키에게 이따가 보자고 말한 뒤 연회장을 떠났다.
연회장을 나서자마자 서늘한 밤바람이 뺨을 두들겼다.
조명으로 장식된 연회장 주변은 밤이 되니 더욱 화려해졌다. 사람들이 날린 풍등이 밤의 하늘을 화사하게 수놓는다. 예쁜 풍경이었다.
“…….”
“…….”
세이르와 나는 잠시 그 화사한 풍경 속을 말없이 걸었다. 세이르는 나보다 훨씬 보폭이 넓은데도 내게 걸음을 맞춰 주었다.
역시 이 녀석, 너무 커 버려서 둘만 남으니까 어색하단 말이지.
열네 살과 열일곱 살. 터울은 변하지 않았는데 세이르 혼자 부쩍 어른에 가까워진 것 같다.
나는 주위 풍경을 보면서 불쑥 입을 열었다.
“오늘 시험 치러 갔었다며. 그래서 늦게 온 거야?”
“응, 명목상으로는.”
“명목상?”
학교 시험에 붙이기에는 어째 어색한 표현이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세이르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주위를 감시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지?”
“아, 맞아, 그거! 어떻게 된 거야? 누구인지는 알아? 목적은?”
마구 질문을 쏟아 냈지만, 세이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짐작 가는 바가 있으니까, 곧 해결될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서 오늘, 밖에서 남의 눈을 피해서 처리할 일이 있었어.”
“……그렇구나.”
세이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오늘 낮에 한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이 학교의 학생회장이 흑막이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학생회장이 세이르란 말이지.
‘에이, 그래도 세이르인데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는 거 맞겠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방문객용 숙소 앞에 도착했다.
세이르는 나를 문 앞까지 데려다준 뒤 곧장 돌아서지 않고 잠시 서성였다. 그러다 못내 아쉬워하며 세이르가 돌아가려 할 때.
나는 세이르에게 불쑥 물었다.
“세이르, 내일 시간 있어?”
“네가 원하면 있지.”
마침 잘됐다.
무도회는 재미있었다. 이제 남은 성령제 기간 동안에는 해야 할 일을 팍팍 해치워야지.
“그럼 내일 시간 좀 내줘. 같이 가 줬으면 하는 데가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