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뭐 거의 걸어 다니는 재앙 취급이다. 세이르가 너무한 건지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너무한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세이르가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사과했다.
“그,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야……. 세이르도 학생들한테 오해받아서 힘들겠다.”
내 생각에 세이르는 오히려 마음 약하고 허술한 데가 있는 편인데, 무슨 세금 추징원이나 감사원 같은 취급을 받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세이르는 내 말을 듣고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실토했다.
“사실 오해는 아니야.”
“응?”
“학생회장이 된 직후에 전 부학생회장을 중심으로 한 비리 문제가 있었거든.”
어제 스텔라가 언급했던 그 일인가. 아카데미에서도 어지간한 왕국 못지않은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자세히 물었다.
“헤에,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상당수는 퇴학 처분을 받았고, 나머지는 정학. 비리가 있던 연구소는 예산을 대폭 깎았고.”
그 말을 들으니 학생들이 세이르의 머리카락만 보여도 깜짝 놀라는 모습도 이해되었다.
원래 털면 먼지는 나오기 마련. 큰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겁이 나겠지, 암.
“내가 기념품을 못 산 것도 다 세이르 때문이구나.”
“그래서 말했잖아, 미안하다고.”
“…….”
“한 군데, 괜찮은 곳도 있어. 가 볼래?”
세금 추징원이라도 본 듯 놀라는 학생들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괜찮겠지. 세이르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세이르가 나를 데려간 곳은 아카데미의 학생회실이었다. 평소에 세이르가 장시간 머무는 곳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세이르를 보고 놀라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은 편한 곳이었다.
학생회실에는 커다란 책상과 책장, 티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었다.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였다. 창밖으로는 성령제로 들뜬 아카데미의 풍경이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세이르는 나를 티 테이블 앞으로 안내한 뒤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잠시 뒤, 차를 가지고 티 테이블로 돌아왔다.
“안젤리카, 여기, 차.”
“고마워. 잘 마실게.”
상큼한 향이 강하게 나는 따뜻한 차였다. 강렬한 신맛이 마음에 든다. 나는 레몬 한 조각을 찻잔에 더했다.
“이거 맛있다.”
“이곳 카페테리아에서 파는 비밀 메뉴야. 음……. 상급생들이 신입생에게 사 주는 전통이 있어.”
“헤에, 그래? 재미있는 전통이네.”
“이 차,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따뜻한 차의 향기에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나는 차 맛을 음미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성령제로 붐비는 바깥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쉬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세이르를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계속 하려다 만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세이르, 다시 만나서 반가워.”
사실은 세이르와 재회한 무도회 날에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에 하지 못했다.
“……너무 늦었지만.”
“하하, 나도. 다시 만나서 반가워, 안젤리카.”
성령제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나는 내심 기쁘면서도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 세이르를 다시 만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다시 만나기 무서운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휴양 도시 엘나스에서 내가 세이르를 구한 일도, 세이르가 데네브 왕국에서 지낸 시절도 이제 와서는 전부 다 지나간 일.
편지 답장이 끊긴 이후로, 내게는 유년 시절의 일을 세이르가 벌써 다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내 참. 장차 훌륭한 흑막이 될 사람답지 않은 생각에 빠질 뻔했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정말 터무니없는 걱정이다.
요즘 골렘 문제 때문에 너무 신경을 썼나? 괜한 고민을 해 버렸다니까.
이렇게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다 보니 분명히 알겠다. 나이를 먹고 키가 자라고 한 걸음 어른에 가까워졌어도, 세이르가 여전히 나와 같은 유년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세이르, 네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세이르는 자기 몫의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초록빛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말했잖아. 안젤리카,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다고. 그런데 걱정이나 끼치고 있을 수는 없지.”
진지한 대답이 돌아오니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나는 괜스레 세이르의 시선을 피하며 농담조로 대꾸했다.
“그래, 그래. 걱정도 안 끼치는 세계 최고의 착한 어린이 해.”
“……하하.”
이제 ‘어린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커져 버렸지만 말이지.
그리고 소파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며 차를 마저 마시는데, 문득 어떤 물건이 눈에 띄었다.
“어?”
“안젤리카, 왜 그래?”
“……저거.”
“아.”
세이르는 황급히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감추려고 했지만 이미 다 봤다.
책상 위에는 한 뼘 정도 크기의 솜 인형이 놓여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 인형은 낯이 익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세이르에게 만들어 준 그 인형이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왕성에 있던 세이르의 방은 아직 비우지 않았다. 당연히 그곳에 인형을 놓고 갔거나, 잃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이르는 농담처럼 대답했다.
“누가 준 건데.”
나는 인형을 집어 들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소중하게 보관했는지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엄청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바느질이 서투른 티가 났다.
‘어쩔 수 없잖아. 나는 그때 열 살이었다고.’
속으로 누구한테 하는 건지 모를 변명을 중얼거렸다.
특별한 기능도 없는 그냥 인형. 그런데 세이르가 이 인형을 계속 보관했다는 사실을 알자 기분이 묘했다.
나는 괜스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별로 잘 만들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나한테는 소중한 물건이야.”
“……다음에! 다음에 훨씬 더 잘 만들어 줄게.”
“하하, 기대할게.”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듯 세이르가 활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쁘게 생긴 애가 환하게 웃으니까 눈이 부실 정도였다.
“아직 우리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갑자기 무슨 이야기야?”
아차, 입 밖으로 소리 내 버렸다. 민망한 마음에 나는 책상 위에 도로 인형을 내려놓고 화제를 돌렸다.
“크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고 보니 세이르, 성령제가 끝나면 곧 방학이지?”
“응, 그렇지.”
세이르가 졸업할 때까지는 아직 약 1년, 두 번의 방학이 더 남은 상황이었다.
이제까지 세이르는 아카데미가 방학을 맞이해도 계속 아카데미 안에 남아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세이르는 다프네 왕비의 여러 수작을 피해 이곳 베나토르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니까.
현재 그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이곳. 굳이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서 위험을 겪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 때문에 지난 3년간, 아카데미가 방학일 때도 나는 세이르를 만나지 못했다.
‘……졸업할 때까지 앞으로 1년이라.’
세이르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이윽고 열여덟 살. <마.왕.꾸>에서는 어떻게 해서도 도달하지 못했던 어른이 된다. 이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승계받지 못했던 공작 작위를 정식으로 승계받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엘레인 소공작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엘레인 공작.
그렇게 되면, 세이르는 더 이상 예전처럼 얼렁뚱땅 데네브 왕국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부당한 대우하에 핍박받던 어린 소공작을 구금하는 일과, 남의 나라 공작을 구금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리니까.
어쩌면 세이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다시는 예전처럼 편하게 만나지 못할 수도…….
‘헉, 또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할 뻔했네. 훌륭한 흑막답지 않은 일을 할 뻔했어.’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잠시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을 뿐, 세이르는 여전히 내 부하 1호다. 잘 키운 부하를 쉽게 떠나보낼 수는 없지.
세이르와 나눈 아주 오래전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계속 여기 있어. 네가 있고 싶은 만큼.”
그래, 나는 이 말을 지킬 생각이다. 현실적인 문제는 더 힘을 길러서 어떻게든 해결하자.
“……안젤리카?”
내가 한참 말이 없자, 세이르가 테이블을 톡 치며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아. 미안.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이번 방학에도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
이번에도 당연히 그렇겠거니 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세이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방학 때는 아카데미 밖으로 나갈 생각이야. 갈 곳이 있어서.”
“어? 정말? 어디로 가는데?”
“그건, 음…… 아직 비밀.”
“뭐어, 왜?”
닦달했지만 세이르는 곤란한 듯 웃을 뿐 행선지를 말해 주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 무슨 일이길래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는 거지.
그보다 이 녀석, 역시 예전보다 의뭉스러워졌지 않아? 나를 제치고 훌륭한 흑막의 자리라도 노리는 건가?
나는 때아닌 경쟁의식을 느끼며 세이르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확실해지면 말할게.”
“……알았어.”
뭐, 어쩔 수 없지. 마음에 안 들지만, 굉장히 마음에 안 들지만. 나 역시 세이르 몰래 꾸미는 일은 있으니까.
“그보다 안젤리카, 내일은 뭘 할 예정이야?”
“아. 나 내일은 볼일이 있어.”
“그래? 뭔데?”
“비밀. 어차피 세이르는 못 오는 곳이야. 여자만 참가할 수 있거든.”
“……흐음.”
“내가 없다고 쓸쓸해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농담이었는데. 어디까지나 가볍게 웃어넘기라는 농담이었는데, 세이르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게, 쓸쓸하겠다.”
* * *
다음 날.
“거창한 연회가 아니니까 오늘은 가볍게만 치장했어요.”
“가볍게……?”
거울 속에 화사하게 꾸민 내 모습이 비쳤다. 특히 머리에 단 꽃 모양 장식이 반짝반짝 빛을 발해 아름다웠다.
여전히 사라가 말하는 ‘가볍게’의 기준은 의심스럽지만, 어쨌거나 사라의 솜씨는 무척 좋았다.
“안젤리카 님, 즐겁게 다녀오세요.”
“응!”
아카데미의 별관 앞까지 함께 온 사라가 생긋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시계를 보니 딱 정각이다. 나는 사라에게 손을 흔든 뒤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 중이냐면…….
실은 보육원의 세 자매 중 첫째, 마거릿이 내년에 베나토르 아카데미에 입학할 예정이다.
마거릿은 아주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이었고, 주말 학교 교사의 권유로 본 입학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러나 나는 마거릿이 경제적인 이유로 진학을 포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 될 일이지. 그렇지 않아도 똑똑한 인재가 많이 필요한데 공부를 포기하다니!
나는 당장 보육원으로 달려가 마거릿을 설득했다.
“마거릿, 내가 네 후원자가 될게. 아카데미에 진학해.”
“하, 하지만 동생들이 있는데 저 혼자만 아카데미에 갈 수는…….”
“언니, 나 때문에 공부 못하면 싫어!”
“나도 많이 컸어. 샐리는 내가 돌볼 테니까 언니, 걱정하지 마.”
“흑, 얘들아……!”
뭐 이런 감동적인 광경을 연출한 끝에, 결국 마거릿은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내년이면 이 아카데미의 신입생이 된다.
마거릿의 진학이랑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랑 무슨 상관이냐고?
오늘, 별관에서는 아카데미의 여성 후원자와 우수한 여학생들만 참석할 수 있는 티 파티가 열린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인 이 티 파티는, 원래는 비정기적으로 매우 드물게 열렸다. 그런데 올해는 마침 성령제 기간과 겹쳤다.
이 티 파티는 내가 베나토르 아카데미에 온 또 하나의 목적이다. 오늘 나는 후원자로서 티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내년에 입학할 마거릿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