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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후, 인생 다시 산다-22화 (22/205)

<022화 모범생의 삶4>

띠리리링.

차임벨일 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제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학력고사가 끝난 중학교 3학년 교실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보기 시작한 영화 감상이었지만 더 이상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는 교실에서 영화를 열심히 보는 아이들은 손에 꼽을 것이다. 거기에 한발 더 나가면 나와 종혁이 경수처럼 교실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대화할 만한 곳을 찾게 마련이다.

“으···추워. 꼭 여기까지 와야 했었냐~!!”

계속된 영화 감상으로 끝은 영화배우의 대사를 차용한 경수의 말에 나는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렇다고 교실에서 문재하하고 엮인 걸 말할 수는 없잖아.”

“그거 잘 해결된 거라며···.”

“그렇기는 한데 자꾸 구설수가 펴지니깐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 말이야.”

“네가 17대 1로 무쌍 찍었다는 것? 아뵤~”

“아니거든···.”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는 내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런 내 뒤로 작은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부 거짓말인 건 아니지.”

갑작스럽게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우리는 깜짝 놀라서 소각장 입구를 쳐다보았다. 짧은 치마에 롱패딩을 입고 있어서 맨 다리만 나와 있는 게 추워 보였다.

“넌···.”

“그날 재하랑 맞짱 뜰 때 봤지? 난 윤지혜야. 지혜라고 불러.”

내가 전학 온 백신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지만 남자반 여자반이 따로였기 때문에 사실상 여학생을 학교 안에서 마주치는 건 힘들었다. 그런 이유를 반영하듯 경수가 경직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너···넌···.옆 반의···.”

“그 별명으로 부를 생각이면 죽여버린다. 재하가 처음에 부르기 시작했는데 내가···아주···.”

토하는 시늉을 하면서 질색하는 지혜의 반응에 다행히 경수는 마지막 선을 지킬 수 있었다.

‘별명이 뭐길래 저렇게 싫어하는 거지?’

당황스러워하는 우리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혜를 나한테 당당하게 다가와서 휴대폰을 꺼냈다.

“너 번호가 뭐야?”

“나 휴대폰 없어.”

“흐음···뭐, 고등학생 되면 생기겠지. 이건 내 번호.”

내가 휴대폰이 없을 것도 예상했는지 쪽지로 보이는 종이를 나한테 주었다.

“너···무슨···.”

“난 강한 사람한테 관심이 있어. 넌 그날 강해 보였고.”

“뭐?”

“진짜 주인이가 18 대 1로 이긴 거야?”

“갑자기 숫자는 왜 늘어나는데 네가 헛소문 내고 다니는 거지?”

내가 종혁이의 어깨에 팔을 걸면서 인상을 썼다.

“18 대 1은 아니지만···뭐, 거기 모였던 인원은 20명이 넘었는데 사실 싸운 건 4명이었어. 그래도 재하가 친위대라고 끌고 다니는 애들 전부 덤빈 건데 한순간에 끝내던걸? 여기 녹화도 했어.”

‘녹화라고?’

나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지혜가 넘겨준 핸드폰의 영상을 보는 경수와 종혁이의 뒤로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얼굴이 제대로 찍힌 건 없네. 하긴 멀리서 찍었을 테니깐.’

얼굴에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화면에 녹화된 문재하와 같이 다니는 아이들의 경탄 섞인 비명과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이 어우러지자 교실에서 내내 보던 지겨운 액션 영화 보다 생동감 넘치는 장면에 경수와 종혁이는 화면에 빠져들 듯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내 영상을 지우려고 했다.

“어? 지우개?”

“왜? 완전 영화 한편 찍었는데?”

경수는 내가 빼낸 핸드폰에서 영상 지움 버튼을 누르자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종혁이가 아쉽다는 듯 한마디 덧붙이자 지혜가 그제야 내가 영상을 지울 수도 있다는 걸 느꼈는지 빠르게 다가왔다.

지혜는 영상을 지우려고 하는 나를 방해하면서 팔을 뻗어 핸드폰을 되찾아가려고 했지만 내가 손을 뻗어 높게 들자 키가 닿지 않는지 볼을 붉히면서 화를 냈다.

“내 핸드폰이거든 맘대로 지우지 말라고.”

“핸드폰을 넘겨서 남에게 보여줄 때는 영상이 지워질 것도 각오해야지.”

“흥, 혹시 몰라서 컴퓨터에 저장해놨거든.”

“뭐?”

나는 영상을 지우면서 지혜의 말에 놀란 표정을 잠깐 지었지만 이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사납게 말했다.

“이걸 저장해서 뭘 어쩌려고.”

나는 경찰서에 좋지 못한 이유로 불려올 어머니 생각에 눈이 깜깜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만들어냈다.

“너, 재하네랑 싸운 적 없다고 경찰에 말했다면서? 어떻게 넘어간 건지는 몰라도 이 영상이 있으면 네가 말한 거짓말도 끝이거든?”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영상은 심증일 뿐이지 물증이 아니야.”

당시 핸드폰 화소는 그렇게 화질이 좋지 못해서 멀리서 찍은 영상으로 특정인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나하고 다른 애들이 다 너를 지목하면 신빙성이 더 커질걸?”

나는 지혜를 지긋이 보면서 표정을 굳히고 답답한 심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무심하게 물어봤다.

“원하는 게 뭐야?”

“나 너 마음에 들어.”

“뭐?”

“헉···우리 학교 얼짱이?”

“주신이를?”

나보다 경수와 종혁이의 반응에 다는 뒷골이 당기는 걸 느끼면서 내내 유지하던 무표정한 포커페이스가 깨지는 걸 느꼈다. 머리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못들은 걸로 할 테니깐. 너희도 그렇게 알아. 그리고 너.”

“너가 아니라 지혜.”

“넌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난 강한 남자한테 관심이 많아. 넌 강하고.”

“너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순간. 익숙해지지 않는 두통과 함께 아찔한 괴리를 느낄 수 있었다. 사진 속 장면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과 멀리서 들리는 듯한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눈앞의 여학생이 지금보다 더 앳돼 보이는 모습으로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모습과 그런 아이를 지키려는 듯 아니 지탱하는 마지막 구명줄인 것처럼 감싸 안은 채 상복을 입고 흐느끼는 여성의 모습이 사진이 움직이는 듯 눈을 어지럽히는 이미지였다. 대화가 지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혹시라도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익숙해지지 않은 혼란스러운 감각을 억지로 내리누르면서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주먹을 꽉 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아악···이럴 리···이럴 리가 없어. 너희 아버지가 이렇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게 되어서···.’

‘너희 아버지는 강한 사람이었어. 부당한 일에도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그런 사람.’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그런 결정을···.’

‘아직 자녀도 어린데···.’

‘너무 자신이 옳다고 나서더니만 갑작스럽게 잘못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자살하다니.’

‘그 사람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보네.’

‘조금만 더 버텨주었다면 희망이 생겼을 텐데.’

‘압박이 심했겠지.’

‘약한 사람.’

‘심약했어.’

‘약해.’

‘너희 아버지는 심약해서 너와 네 가족을 전부 버리고 도망간 거야.’

처음에는 장례식장의 수군거림처럼 느껴지던 소리가 이내 어린 여자아이를 손가락질하면서 저주하는 목소리로 바뀌고 곧. 아찔한 감각과 함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들리던 대화가 엿가락처럼 느려지면서 감각이 점차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차갑게 굳은 채 서 있는 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갑게 굳은 나와 당당한 척 하지만 내 거절에 얼굴이 붉어진 여학생을 마주한 경수와 종혁이는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가 계속 대답하지 않고 차갑게 바라본다고 느꼈는지 긴장된 소리로 내 말을 받았다.

“너는? 뭐?”

나는 처음 하려고 했던 말들을 속으로 씹어먹으면서 어떻게 좋게 거절할 수 있을지 수십 가지를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너 강해 보이지 않아. 너만 강한 사람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그러니깐 거절할게. 그리고 강하다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아. 단순하게 내가 싸움을 잘한다고 강하다고 쉽게 생각하지마.”

“내가···약하다고?”

“그래.”

“문재하가 무리에서 내가 최고로 잘 나가거든?”

“그것과 강한 건 다른 거야.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난···난 강한 애들하고 어울려 다니니깐 절대 약하지 않아!”

“그게 정답이 아니란 거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난 강하지 않아. 차라리 지금 여기 모여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한 건 여기 경수, 경수가 가장 강할 거야.”

“뭐? 내가?”

갑작스럽게 화재가 자신에게 몰리자 당혹스러운 듯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제는 아예 초점이 잡히지 않을 정도인 경수였다.

종혁이도 황당한 표정으로 경수를 가리키는 내 손짓이 정말 경수를 향한 것인지 다시 한번 보더니 말했다.

“경수가 가장 강하다고?”

“우리는 학생이야. 그리고 학력고사 시험 성적을 생각하면 여기서 가장 강한 건 경수지.”

“그건 모범생 기준인 거 아니야?”

“맞아. 그건 범생이나 할 말이라고.”

“쉽게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낮춰서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모범생의 삶이 쉽게 느껴지면 한번 시도해보는 건 어때? 막상 모범생의 하루일과를 생각해보니깐 막막하지? 그러니깐 그런 식으로 열심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사람들을 낮잡아서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뭐?”

“내가 경수보다 몸을 잘 쓰고 싸움도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칼보다 펜이 더 강하다고. 결국 사회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건 학력이야. 꿈이라는 둥 미래라는 둥 좋은 소리 같다 붙이지만 결국 사회가 원하는 건 자신들의 시스템에 잘 녹아날 새롭고 잘 돌아가는 말 잘 듣는 사람을 요구한다는 거지.”

“그런 건 꼰대 마인드라고···.”

“결국···우리도 꼰대가 될 거야. 너라고 평생 학생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억울하면 꼰대가 되어서 사회를 바꿀만한 위치에 서야 해. 그리고 그게 강한 거라고 난 생각해.”

“그게 어떻게 강한 거야?”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인내하고 노력하는 거니깐. 그건 심지가 굳고 강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어.”

그런 내 말을 들으면서 닭이 되어가고 있는 종혁이와 다르게 얼굴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경수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나···난 강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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