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유산3>
“참···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네요.”
“저도 몰랐는데 오늘 그 소리를 많이 듣는 것 같아요.”
“······참···많이 닮았어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글쎄요. 다음에 보게 되면 그럴까요. 지금은 어렵네요.”
따뜻한 커피를 내려다보던 할머니가 말했다.
“따뜻해요. 참. 그 사람도 따뜻했어요. 너무 따뜻해서 그 온기에 몸을 녹이다가 화상을 입는 것도 모를 만큼.”
“네?”
할머니는 나를 통해 무언가를 보는 듯 방금 봤던 기억 속 슬픈 듯 기쁜 듯 아무것도 일어낼 수 없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리면서 나에게 명함을 하나 밀어줬다.
“이건 오라버니가 저에게 보내준 김 씨 연락처에요.”
명함은 연락처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연락처 하단에 작게 Mr. Kim이라는 영문이 작게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건···.”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그저 미국에서 제가 자리 잡을 때 걱정되었는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보내준 사람이에요. 김 씨는 자주 연락처를 바꿔서 오라버니도 연락처를 모른다고 보내달라고 했는데······너무 늦어버렸네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게 돼서 마음의 짐을 던 것 같네요. 오라버니에게는 큰 빚을 졌거든요.”
“여기로 연락했을 때 누구 소개라고 하면 될까요?”
“홍···홍 할머니 소개로 연락했다고 하면 될 거에요.”
적막했던 장례식장 복도로 다급하게 느껴지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조용해야 할 장례식장이 소란스러워지자 손에 든 명함에서 주의를 돌려 입구 쪽을 향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조용하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어떻게 되었든 산사람의 시간은 흘러가니까요.”
“네. 바쁘신데 시간 내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와야죠. 오라버니는···그런 사람이니까요.”
장례식 입구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성이 홍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
나는 외할아버지의 삶의 무게가 전해지는 작은 명함을 들고 생각했다.
‘외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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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가 몰리는 시간대 커피숍의 한자리를 잡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말을 건넨다.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테라스에 자리 잡은 평범하지만 기이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Mr. Kim?”
“김 씨로 불러라.”
“그럼 김 씨 아저씨로 부를게요.”
“···.”
지나가다가 한두 번 볼법한 아저씨가 내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홍 할머니 소개로 나왔어요.”
“···.”
“내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그분은 제 외할아버지 되세요. 그런데······. 아저씨가 외할아버지가 찾던 김 씨 아저씨에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는 게 끝이었다.
그런 그 아저씨의 고갯짓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은 아찔한 두통과 귀속에서 울리는 이명을 참으면서 생경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집중해야 했다.
흐릿한 오래된 사진 속 장면처럼 느끼는 것과 동시에 사진이 움직이는 듯한 이상한 부유감이 느껴진다. 이명이 섞인 듣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점차 대화 소리가 선명해진다.
대리석 벽이 둘러싸인 곳은 처음 본 공간이었다. 익숙하지 않는 문구에는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가 벽면에 새겨져 있었다.
이름 없는 별들이 그려진 벽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곳은?’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을 뿐이지만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의 존재감에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흉흉한 기색을 풍기면서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검은 양복을 입은 것만으로도 인상이 바뀐 김 씨 아저씨가 담담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상이 바뀐 상태였다.
“회사에 들어올 때의 신념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어겨서까지 지켜야 할 정도의 신념인가?”
“···.”
“강제 은퇴 당할 수도 있다. 알고 있는 건가?”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저 눈 한번 감고 지나가는 것으로 조용히 끝낼 수 있었잖아.”
“그렇게 되면 45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장무열 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국가를 위해 희생된 그의 삶을 국가가 외면해야 하는 겁니까?”
“어디에나 약간의 희생은 있는 법이야.”
“국민과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이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너도 빨갱이가 될 생각이냐?”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의 의견이 아니면 전부 빨갱이인 겁니까?”
“그래 이 빨갱이 새끼야. 넌 무조건 강제 은퇴다. 어디 도망갈 생각도 하지마. 이 새끼. 결국 장무열 그 새끼한테 여권 넘긴 게 너지?”
“어떤 말을 해도 들을 생각조차 없지 않습니까?”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듯한 사진들이 급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기억을 읽어내리고 있는걸 방해하는 듯 오감이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다른 사진들이 차르륵 넘어가는 느낌과 함께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끼익.’
도로 한복판에 피 흘리고 있는 김 씨 아저씨와 그 앞에 급정거를 한 차에서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성이 내리고 당혹해하는 순간 뒷문이 열리면서 외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외할아버지와 김 씨 아저씨와 만난 기억인가?’
둔방 서운 대학병원이라고 적힌 응급실로 들어가더니 외할아버지는 외삼촌을 호출했다.
외삼촌의 사람 좋은 모습만 보다가 응급실에서 심각한 모습을 본 나는 외삼촌이 의사라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장면과 붉은 피가 흩뿌려지는 걸 보면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 수술 시기를 놓치지 않았는지 심각해 보이던 김 씨 아저씨는 병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 사이 간호사와 외삼촌이 왔다 간 이후 외할아버지가 병실에 방문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김 씨 아저씨가 눈을 떴다.
‘아니 정신을 차렸는데 알리지 않은 건가?’
의구심이 들기 무섭게 검은색 승용차에서 급정거로 서더니 차 안에서 4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내렸다. 외할아버지가 무언갈 말하자 고민하는 것 같더니 피를 흘리는 김 씨 아저씨를 무심하게 보던 남성들이 사라지자 다시 김 씨 아저씨를 차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오감이 뒤틀리는 느낌이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줄어들더니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긴 병원이라네. 그렇게 상처 입은 짐승 마냥 하지 않아도 돼.”
“···.”
“내가 나이가 있다 보니 편하게 말하네만 불만이라면 불만이라고 말이라도 하게나.”
“···.”
“대답이 없으니 나 편한 대로 생각하겠네.”
“···.”
“뭐 자네에 대해서 빨갱이니 간첩이니 말들이 많은데 어쨌든 산목숨 죽게 놔둘 수 없어서 조카 덕 좀 봤네. 어려서부터 정이 많아서 걱정했더니 이렇게 잘 커서···.”
“수술···막았을 텐데···.”
“내 조카가 여기 병원 외과 과장일세. 뭐, 치료비용이야 내가 부담한다고 했고 그럼 못할 것도 없지.”
김 씨 아저씨는 외할아버지를 지긋이 보더니 말했다. 상처 입은 짐승이 자신에게 위해가 되는 인간인지 살펴보듯 조심스럽지만, 의심이 섞인 눈초리였다.
“분명···불이익을 받게 될 겁니다.”
“뭐 일평생 쉽게 산 인생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게.”
“제가 있던 회사에서···.”
“그만···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네. 나도 빨갱이 미워하면서 한평생 눈 막고 귀 막고 살았다네. 그러다 보니 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지. 그러니 더는 눈 앞을 가리는 그딴 흑색선전에 내 시야를 흩트리지 않을 생각이네. 자네가 간첩만 아니면 돼. 내 어린 여동생이 북에서 내려온 군인에게 몹쓸 짓을 당한 이후 그쪽을 좋게 생각하지 못하네. 뭐 나이가 드니 이렇게 말하지만 젊었을 적은 나도 거칠게 말하고 행동했지. 이런 상처 입은 이들을 이용하는 걸 알면서도 속에서 불이나 동참하고는 했는데 그게 잘못된 걸 알고 나니 너무 먼 길을 돌아왔더군. 이건 그저 내 속죄라고 생각하게. 몸 성히 나으면 돌아가게. 치료는 내 조카가 맡아서 책임지고 해줄 테니.”
“···.”
아찔한 감각과 함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들리던 대화가 엿가락처럼 느려지면서 감각이 점차 돌아오면서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김 씨 아저씨의 기억이 흘러들어오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곤란함으로 읽은 듯 의아하게 바라보거나 걱정스럽게 보지는 않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상념을 흘러내듯 말했다.
“외할아버지가 김 씨 아저씨 연락처를 알려고 한 이유를 아세요?”
“···.”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그가 나를 쳐다보자 평범해 보이는 차림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나도 만나보지 못했으니 무슨 일인지 확실하게는 모르지. 다만 짐작하자면 사람 찾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아···.”
“아마도 딸을 찾고 싶어서였겠지. 늦었지만······늦지 않았군. 다행이야.”
“네?”
“찾고 싶은 사람을 찾은 걸 보면···.”
“아···.”
‘눈앞의 김 씨 아저씨라는 사람이 위험하지만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알겠어. 그런데 대백공은 왜 이 사람의 연락처를 보상이라고 말한 걸까?’
대백공은 홍 할머니를 만나라는 게 특이점 보상이라고 했지만 홍 할머니가 김 씨 아저씨 연락처를 준 걸 보면 김 씨 아저씨가 보상이라는 뜻일 텐데···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스리자 긴장으로 가려졌던 시야가 넓어지면서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 씨 아저씨의 검은색 점퍼는 한겨울에 입기에 너무 얇아 보였다.
표정도 무표정이었지만 눈가가 붉어진 건 김 씨 아저씨도 외할아버지 소식에 슬퍼하는 걸까? 피곤한 표정의 김 씨 아저씨는 이 추운 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노천카페에서 나와 만나고 있었다.
‘김 씨 아저씨의 영상에서 봤던 상황이 사실이라면 강제 은퇴 당해서일까?’
“이건 사례비에요.”
“뭐?”
나는 준비했던 돈이 담긴 봉투를 품에서 꺼내서 김 씨 아저씨의 자리로 밀었다. 이제까지 담담했던 표정과 행동이 거짓말처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외할아버지가 찾는 사람이 딸이라 걸 알 정도면 이미 조사하신 거잖아요. 그럼 착수금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잘 모르지만, 이 정도는 줘야 할 것 같아서···부족하면 말씀하세요.”
이내 고민하던 김 씨 아저씨는 봉투를 나에게 밀었다.
“내가 한 일에 대한 대가만 받는다. 이건 상정 외야.”
“그럼 제가 미리 드리는 계약금 같은 거라고 보면 안 될까요?”
나를 관찰하듯 매서운 눈초리로 봤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걸 강조했다.
“저 같은 학생이 하는 말을 들어주고 의뢰를 받아주실 분이 필요하거든요. 최소한 저는 계산은 확실하고요.”
봉투를 보는 그의 눈이 짙어지면서 말했다.
“뭐, 계산은 확실하긴 한 것 같군.”
“그리고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하고요.”
“처음 본 나를 믿는다는 거냐?”
“외할아버지를 믿는 거죠. 마지막 순간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할 정도의 상대라면 믿을만해서가 아닐까요?”
“···.”
“난 불법적인 일은 안 해.”
“저도 그런 건 질색이에요. 저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거든요.”
“내 능력에 대해서 의심조차 안 하는 건가?”
‘최소한 전직 국정원 같은데 의심할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나는 다시 최강의 방패를 덧붙였다.
“외할아버지를 믿는 거죠.”
“불법적인 일은 안 하기 때문에 명확한 계약조건이 아니면 돈은 받지 않아. 불법적인 일에 엮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계속 마음에 걸리던 일을 부탁해 볼까?’
“그럼 명확하게 하죠. 제가 의뢰하고 싶은 사람은 한영철이라는 체육 교사에요.”
“···?”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요 몇 주간 신문에 오르내리는 체육 교사가 그 사람이에요.”
“미성년자 강간범?”
“하지만 우리나라 법상 아마 집행유예를 노리고 피해자들에게 접근해서 합의해달라고 매달릴 거예요. 좋게 말해서 매달리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스토킹하면서 피해자에 대한 안 좋은 소문 퍼트리겠죠.”
“×××.”
나는 김 씨 아저씨의 욕설을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말했다.
“그걸 좀···.”
“뭐?”
내가 요구한 내용을 들은 김 씨 아저씨는 골 때린다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불법은 아니잖아요?”
“이건 착수금으로 받지. 추가 비용이 더 나올 수 있는데 괜찮나?”
“네 부족하지 않게 중간에 돈이 더 나가면 바로 연락 주세요.”
학생인 내가 돈에 연연하지 말고 해결해달라는 모습에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뭔가 포기한듯한 표정으로 내가 의뢰한 내용을 자세하게 물어보면서 상의하기 시작했다.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 김 씨 아저씨는 어느새 인파에 가려 사라졌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김 씨 아저씨의 등을 보면서 말했다. 청자는 이미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 혼란을 잠재우듯.
“난 아저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작은 소망을 담아본다.
‘외할아버지가 구해준 사람이라면 꼭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보다 더 죽어가는 표정을 한 김 씨 아저씨에게 계속 마음에 걸리던 일을 부탁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홍 할머니 말처럼 산 사람의 시간은 흘러야 하니까. 흘러갈 방향만 잡아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