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오늘은···2>
미련이 남는 듯 초콜릿이 포장지 안에서 녹아내리도록 한동안 계속 쳐다보던 소녀는 이내 일별하고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변호사의 손을 지나쳐 그대로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소녀가 병원을 나가는 모습을 아무도 제지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녀조차 자신이 오늘 처음 본 변호사의 말을 듣고 병원 밖으로 향하는 것에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소녀를 끌어당기듯 소녀는 목적지를 아는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그런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변호사의 모습은 소녀를 걱정해서 따라가는 보호자처럼 보였다. 변호사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소녀는 한층 한층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기···경수하고 영화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소녀는 홀리듯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옥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보통 상업 건물의 옥상 문은 잠겨있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아무런 잠금장치도 없었다.
소녀가 기다렸다는 듯 건물 외벽으로 향했다. 소녀의 어깨까지 올라오는 난간 높이에 소녀가 정신을 차린 듯 뒤를 돌면서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그때 소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오던 변호사가 말했다.
“이대로 병실로 돌아갈 겁니까? 다들 동정해주는 그 자리로? 동정 좋지요. 하지만 같은 인간대 인간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소녀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인권 변호사라는 남자를 그제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오르고 입꼬리가 하늘까지 올라간 두려운 모습이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된 소녀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리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다리는 이상하게 변호사의 말을 굳건히 믿는 것처럼 자기 키만 한 난간을 넘기 시작했다.
“···나···나는···.”
“동정이 아닌 사랑을 받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건···.”
“지금 이렇게 아픈 선택을 하지만 당신의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만들고 싶은 존재가 있으시죠? 그렇다면 그 이름을 살인 용의자라는 지저분한 연결고리와 함께 기억하고 싶게 만드는 게 좋습니까?”
“그건···싫어···싫어요.”
“사람이 선택을 할 때 항상 좋은 선택만 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일과 더 좋은 일 중에 선택한다면 아주 좋겠지만 대부분 나쁜 일과 나쁜 일 중 그나마 나은 것을 선택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의 선택은···.”
공포로 질려있던 소녀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소녀의 반짝이던 눈동자가 침잠하면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제가···여기서 뛰어내리면 경수는···저를 기억해줄까요?”
“그럼요. 당연합니다.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서 용감하게 뛰어내린 소녀 용사로 기억할 겁니다.”
소녀의 정신은 이미 인권변호사라는 변호사의 달변에 녹아버린 것 같았다. 공포심에 사로잡혀있던 눈동자도 흐릿해지고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내가 죽어버리면 난···더는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소녀의 가슴은 이건 잘못된 선택이라는 듯 쿵쿵 리드미컬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큰 소리로 두드려 소녀의 다짐을 깨보려고 노력했지만, 소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결백하게···그렇게···경수에게 기억될 수 있을까?’
소녀의 망설임이 극에 달하고 소녀의 위태로운 모습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전부 걱정하기 시작하면서 인권변호사라고 말하는 변호사의 말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이제까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던 게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냉랭한 표정을 짓더니 외치기 시작했다.
“화냥년 소리를 듣다가 자신을 겁탈한 남자하고 결혼한 네 애미처럼 너도 그렇게 살 거냐? 이렇게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는데 내다 찰 거냐고 평생 그렇게 살아. 네 애미처럼.”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걸까? 소녀는 난간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엄··엄마가···그럼···.”
“네 아빠는 강간범이야 아하하··핫····. 다들 쉬쉬하면서 그냥 결혼 시킨 거지 병신들···. 너도 그렇게 살고 싶냐? 강간범 아내가 되어서 그 아이들을 키우는 거야. 그러면서 자신을 강간한 놈한테 화냥년 소리를 들으면서 두들겨 맞다가 죽는 거지.”
소녀는 자신을 괴롭히던 체육 교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과 변호사의 말이 앞뒤 사실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정신이 그 자리에서 메말라 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고 그저 이 자리에서 편하게 모든 일들이 깨끗하게 해결되고 그런 상태에서 경수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소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쳐···뭐가 사실인지도 모르겠어···더는···.’
힘이 빠졌지만 한 발자국 허공으로 발걸음을 옮길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소녀는 그저 쏟아지듯 흘러나오는 비난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에 하늘을 보았다. 오늘 따뜻한 햇살을 비추던 하늘은 그대로였다. 따뜻하고 동시에 잡을 수 없는 그런 존재.
소녀가 마침내 결심을 한 듯 하늘을 보던 시선을 지상을 향해 돌리자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데···나는···나는···뭐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그냥···이대로 모든 걸 깔끔하게······.’
소녀가 자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했던 건물 주변의 사람들이 소녀의 안전을 걱정해서 웅성거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저주를 하듯 말하는 변호사의 말은 자신을 걱정하는 인파의 얼굴 표정까지도 일그러트리고 그들이 외치는 걱정 어린 한숨마저도 자신을 비난하는 고함소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소녀는 슬픔으로 문드러지다 못해 썩어가는 가슴속에서 한줄기 바람을 속삭여 보았다.
“경수야···보고 싶어···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그런데···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더라···내가 좀 더 일찍 너를 만났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웃고 떠들고 가끔은 마주 보면서 그러면서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오늘 와서 나한테 말해준 이민 제안 너무 좋았는데···너무 좋아서 그런데 도저히 마냥 좋아라고 말할 수 없었어···왜 그랬는지 지금 여기에 서야 알 것 같아. 그냥 어떤 모습이라도 네 옆에 있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것도 이제 안 된다고 하네. 그래서 너무 아쉬워 초콜릿 주고 싶었는데 오늘 병실에 와줬을 때 그것부터 주는 거였는데···그게 너무 아쉬워서···그래서 미련이 남나 봐···나 살고 싶은데···살 수가 없네···.”
“다들 내가 살면 안 된다고 해. 다들 나를 피해자라고 하면서 동시에 가해자라고 해. 나 때문이라고 사실 어제 그 사람 부인이 왔어. 나를 욕하면서 남편 살려내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내 잘못 아니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이민 가서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해주는 네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런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도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이런 나라도 너한테 좋은 모습으로 남으려면 이 한 걸음이 필요하데···용기가 안 나지만···그렇지만 용기를 내보려고 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실히 알면 천일 아저씨 같은 슬픔은 없게. 그렇게···확실하게···.”
소녀의 기도와 같은 중얼거림은 옆에서 크게 소녀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덮여서 허공으로 녹아들 듯 그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소녀는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봤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닌 하늘을···그리고 한걸음 내디뎠다. 소녀는 순간 중력이 느껴지는 않은 황홀한 부유감에 눈을 감았다.
‘하아···마침내···.’
그 생각과 동시에 눈을 뜨고 떨어지면서 보는 광경이 한눈에 담겼다. 심장이 터질 듯 울리는 와중에 멀리서 비통하게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경수의 모습에 소녀는 생각했다.
‘마지막에 경수를 봐서······.’
쾅!
소녀의 모습은 한 줌의 붉은 핏물이 되어버렸다.
[아하하핫···좋아. 아주 좋구나. 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스스로 비참하게 마무리시키다니. 흡족하다.]
인권변호사라는 남자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괴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사고현장을 내려다보는 모습은 누구라도 섬찟할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그의 모습을 찍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내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감상하듯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변호사가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제대로 된 인권 변호사 역할만 잘 끝내면 우리 사무실은 제대로 유명세를 탈 수 있을 거야.’
자살 현장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찍기 위해서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슬쩍 보면서 변호사는 헛기침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을 때 그는 더 이상 미소 짓는 모습이 아닌 절박한 피해자를 변호하기 위한 한 명의 인권 변호사가 서 있었다.
그의 달변에 모든 기자들이 그에게 집중할 때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학생의 모습이 보였지만 유가족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관심을 끊고 이내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플래시를 즐기면서 그는 담담하지만 감정에 호소하듯 자신의 특기를 말발로 사람들을 현혹하기 시작했다.
[크흠···역시 힘을 과도하게 사용했나···땅꾼이 깨어난 모양이군······뭐···땅꾼 따위야 위대한 나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변호사는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기자들을 상대로 날카로운 질문에도 피하지 않고 달변으로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싶을 정도로 잘하게 되었으니···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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