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경수 아버지 이야기 2>
학생 때 누군가 말했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졸업해서 한자리하는 게 어떻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형.
어머니. 여동생.
인생 친구.
그리고 나의 인생.
그것의 피비린내를 밟고 적당히라는 언사를 말할 수 없는 나는.
적당히에 대한 대답은 이미 출발해 버린 주사위를 다시 주워드는 것만큼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탕.
그리고 다시 한번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아악! 선유 형. 형···정신 차려. 형···.”
“호광···호광아···도망가···너···너는···잡히면···.”
선유 형은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내가 도망갈 걸 바랐다. 이미 빨갱이로 낙인찍힌 내가 여기서 잡히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니 일어나야 했다.
‘아아아아아악.’
속으로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이 난무했지만 닥치고 선유 형을 버리고 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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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해봐.”
“당신도 참. 아직 말하려면 멀었어요. 그리고 보통 엄마라고 먼저 한다고요.”
“그런가?”
“오늘은 어디 쪽으로 갈 거예요?”
“병원하고 시내 쪽 다니다가 일찍 올게. 올 때 뭐 사 올까?”
“그건 됐고 조심해서 와요. 아직 경수가 어려서 최류탄 냄새 맡으면···.”
‘내가 뭐라고 답했더라.’
“알겠어. 조심해서 올게. 택시 창문도 열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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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가장 먼저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나르고 택시 무전기로 선유 형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시위대의 전면에서 다시금 외치고 있었다.
‘독재철폐.’
선유 형의 차가워져 가는 손끝의 감각을 붙잡듯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이미 내 손에 남아 있는 건 한 줌의 피비린내와 최루탄의 매캐한 내음만 남은 흩어지는 모든 걸 의미 없이 부여잡는다. 나는 다시금 속에서 일어나는 울분을 씹어먹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잡히면···경수는···.’
자신과 같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지 않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진압대원들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후에 어떤 원망을 듣더라고 지금 잡힐 수는 없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구토감과 정신을 흔드는 아득한 분노와 감정에 순간 열이 끝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각은 아주 작은 상자에 억지로 구겨 넣었다가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것처럼 아찔해져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비틀거리자 내 이상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종혁이가 다급하게 나를 부축하는 게 느껴졌다. 점차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눈동자 안에서 푸른빛이 돌면서 은은한 별빛으로 빛나는 저울 모양이 전면에 나타났다. 종혁이는 내 상태가 걱정된다는 듯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이는 거겠지?’
삐빅삐빅.
병실 문이 열리고 수척한 경수 아버지가 알 수 없는 의료기구에 의지해 누워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안 보일 메시지가 은은한 별빛으로 망막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경고 대상자 박호광 저울이 극도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 업의 해소되지 않으면 타락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경수 아버지가 타락자가 된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의 의미는 나중에 대백공에게 질문하기로 하고 나는 다시금 특이점을 부여해 해결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상자 박호광의 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존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업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같은 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경수 아버지 업이라면···.’
[대상자 박호광의 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어받을 존재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양손에 무언갈 잔뜩 들고 온 경수가 표정 없이 나와 종혁이를 바라봤다.
익숙해지지 않는 두통과 함께 아찔한 괴리를 느낄 수 있었다.
‘연속으로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감각이 잘게 쪼개져서 작은 먼지가 되어 작은 공에 억지로 눌러담는 느낌과 함께 직접 듣고 느끼고 감정까지 읽어내리는 빙의한 것처럼 감각과 감정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건··술법이 강화된 건가?’
방금 전처럼 감정까지 완전히 동조되면서 받은 정신적 충격에 빨려 드는 감각을 통제하자 이전과 좀 다른 느낌이 들면서 장면이 안정되었다.
생각이 더 길어지기도 전에 모든 감각이 휩쓸리면서 경수가 경수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오게 된 정보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밤새 경수를 간호한 경수의 어머니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는 자신의 자녀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차라리 자신이 아팠으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경수의 등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가 깊은 한숨과 함께 방을 나가셨다.
‘달칵.’
방 밖에서 무뚝뚝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곤하지만, 평소와 같은 카량카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경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마냥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무력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나는 출근해야 되니까···경수하고 식사 챙겨서 먹어요.”
“···.”
“경수가 걱정돼서 오늘 일도 구하러 안 나갔으면서 이럴 때만 또 대답 없지. 내가 답답해서···. 냉장고에 죽 만들어 놨으니까 태워서 둘이 먹어요. 알았죠?”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툼 같은 아침 인사가 끝나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퍽.’
부엌에서 둔탁한 소음과 함께 탄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는 정도의 매운 탄 냄새가 온 집안을 울리자 옆집에서 사람이 나온 건지 쿵쿵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
무기력함에 눌려 계속 누워 있던 경수는 계속되는 소음에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박차고 방 밖으로 나왔다.
경수는 도저히 누워있을 수 없어서 무기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방문 바로 앞이 현관문이었기 때문에 바로 사람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방문을 열자 부엌은 탄 냄새와 매캐한 연기로 앞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옆집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남자가 들어오더니 거실의 상황을 확인하고 다급하게 움직였다.
‘여기서 김 씨 아저씨가 왜 나와?’
위급한 상황에서 가스불부터 잠금 다음 경수 아버지에게 응급처치를 하면서 동시에 신고까지 하는 김 씨 아저씨의 등장에 당혹감을 가지기 무섭게 장면이 빨려들 듯 전환되었다.
경수는 이리저리 이끌리듯 사람들에 치여 정신을 차리고 나니 경수는 아버지와 함께 구급차에 타고 있었다.
“이봐 학생 괜찮아? 머리가 어지럽거나 하지는 않고?”
경수는 괜찮냐고 끈질기게 물어보는 구급차의 소방대원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멍한 눈으로 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는 경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삐빅삐빅.’
경수의 감정이 스며들 듯 느껴지기 시작한다.
‘슬픔. 당혹···불안···너무 혼란스러워···.’
술법의 힘을 조율하던 특수한 감각이 경수의 감정에 휩쓸려 놓쳤다고 생각한 순간.
바닥과 천장이 한순간에 바뀌는 듯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반전되면서 감정이 몰려든다.
알 수 없는 의료기기를 덮어쓴 생소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경수가 아버지를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본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경수와 아버지는 대화가 없었다. 그저 침묵과 몸짓으로 서로를 인식할 뿐이었다. 그래서 몰랐던 것 같다.
‘이렇게 마르셨던가?’
항상 강건하게 옆에 있을 거라고 근거 없는 믿음을 줬던 아버지의 체구가 구급차의 침상 안에서 너무 작게 구겨져 있는 것 같았다.
경수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현실을 거부하는 것처럼.
‘언제쯤 이던가···.’
경수는 현실에서 눈을 돌려 오래전 일을 기억해 내려고 노력했다.
아니···
지금 상황에 닥치고 나자 미련이 남는 것처럼 과거까지 아버지와의 추억을 기억해내려 했다.
무뚝뚝하고 거칠기만 한 다가가기 어려운 아버지의 모습만이 아닌 다른 추억을 들추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에는 자주 마주 보고 아버지가 집에 오시기만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경수는 어릴 때의 기억은 거의 없다.
‘나만 그런 걸까?’
국민 학생 아니 초등 학생 때의 기억도 종혁이와의 추억이 아니었다면 거의 기억나는 게 없을 정도였다.
‘나는 왜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까?’
경수는 평상시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과거의 추억까지도 밑바닥부터 침잠하듯 천천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기억해 내려 바닥부터 훑어보듯 했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은 그저 말없이 서로에서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침묵하고 침묵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쓰러진 모습에서 도망가듯 상념에 사로잡혔지만 희미하게 호흡기 사이로 말하는 입모양에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바짝 다가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희···숙아···아이···아···경··경수···데리고···.’
무언가 경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경수 아버지의 목소리가 매캐한 탄내와 함께 경수의 기억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순간.
‘철컥’
‘드르륵.’
“빨리. 중년 남성 부엌에서 혼절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구급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대원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아버지가 응급실 문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멍하니 옆에 앉아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응급실로 들어가는 침대를 따라잡으며 크게 외쳤다.
“저···아빠···아빠···.”
응급실 의료진으로 보이는 사람이 경수를 붙잡으며 막아섰다.
“보호자 분 아직이신가요?”
주변에서 계속 보호자를 찾았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경수는 어머니가 오시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응급실로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응급실 앞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경수는 생각했다.
‘나는···.’
경수의 생각이 길어지기 무섭게 경수 어머니가 날 듯이 뛰어와 경수의 얼굴을 여기저기 살피고는 꽉 품에 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수야.”
“아빠가···아빠가···.”
“괜찮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옆에 있잖아.”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던 의료진 중에 한 명이 다가와 어머니를 데리고 응급실에서 급한 처치가 끝났고 검사결과를 기다린다면서 중환자실로 안내했다. 경수 어머니는 중환자실이라고 적혀있는 입원실 앞에서 한참 멍하니 그 문만 바라보다 경수의 손을 놓으면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작게 말했다. 경수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경수는 알 수 있었다.
경수는 주먹을 꽉 쥐였지만 방금까지 자신을 단단하게 품어줬던 어머니도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작은 소녀도 자신의 눈앞에 없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