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여름밤 3>
공원 벤치에 앉아서 무기력하게 더위에 짓눌리고 있었다.
‘더워서? 아니 정말 무기력한 상태이기 때문 아닐까?’
내가 스스로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있었지만 익숙한 형체였기 때문에 조용히 기다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김 씨 아저씨가 낮에 봤을 때와 다르게 굳은 안색으로 내 옆에 앉았다. 항상 급하게 떠날 것처럼 서서 대화를 나누던 김 씨 아저씨의 모습과 다른 행동에 내가 바라보자 지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납치도 아닌 실종이라고요?”
“그래.”
“부총경 딸이 대낮에 납치가 되었는데···어떻게···.”
“기주 아버지에게도 압박이 있었겠지. 너무 소란이 커지게 되면 기주가 무사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거다.”
“그런···.”
“거기다가 이건 윗선까지 개입된 일인지도 모른다.”
“네?”
“아니···. 분명 그럴 거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내가···. 알 던 얼굴을 만났다.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정부를 위해서라고 누가 그래요?”
“···?”
“설마 스스로 정부를 위해서 일한다는 말 한마디에 믿으시는 건 아니죠?”
“···!”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권위에 약한지 몰라요. 그래서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과거 정권 때 정 씨 사기 사건도 그렇게 된 거 아닌가요?”
“정 씨 사기 사건이라···.”
“대통령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계약하고 돈을 넘기고 그게 계속되다가 결국 펑 하고 터진 사건이잖아요. 지금으로 따져도 엄청난 금액이 증발했다고 하던데···.”
“···.”
“위에서 내려온 지시다. 하고 분위기만 잡고 있으면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강심장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게 넘어간 일은 또 얼마나 많고요.”
“···.”
생각에 잠긴 김 씨 아저씨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주의 행방에 대한 질문을 안 할 수 없었다.
“기주는···.”
“기주는 안전하게 있다.”
“기주가 어디 있는지 찾은 거예요?”
“위치는 확보했다···. 하지만 확실한 게 좋겠지. 지금 기주가 납치되어있는 장소를 알려줄 테니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
“네? 기주 있는 곳을 알았는데 어째서······.”
“나도 모르겠다. 누군가 내 눈을 계속 가리고 있었던 느낌이다. 분명 답이 눈앞에 있었는데 스스로 그 답을 피한 것처럼 말이다.”
“네?”
“기주가 있는 주소다. 직접보고 판단해. 나처럼 눈에 보이는 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오랜 시간 돌아가지 말고···.”
“김 씨 아저씨?”
김 씨 아저씨가 봉지에서 꺼낸 구겨진 종잇조각에 적힌 주소를 보는 사이에 김 씨 아저씨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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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혹스러웠지만 김 씨 아저씨가 준 주소로 황급히 움직였다.
‘도대체 오늘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도착한 곳은 모텔촌 근처의 작은 여관이었다. 오래된 여관이었지만 입구에 사람이 앉아 있었고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도와줄 태연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 관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여관이 크지 않아.’
모텔과 달리 사생활 보호가 약한 여관이었기 때문에 여관주인이 앉아 있는 입구에서 빙 둘러서 담벼락 쪽으로 향했다.
‘창문?’
여름 특유의 텁텁한 바람이 창문 사이로 통하고 있었다.
‘더워서 열어놨나 보군.’
괜찮은 숙소가 아닌 이상 아직 선풍기 정도가 전부인 곳이 많았다. 여기 여관도 선풍기로 여름 더위를 버티는 것으로 보였다. 모기향을 피웠는지 어두운 내부지만 붉은빛을 통해 내부를 찬찬히 살펴본다.
‘육체 강화로 시력도 강화돼서 대략 형체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어···.’
내가 긴장을 풀기 위해서 온몸에 힘을 주었다가 한 단계식 풀고는 다시 창문 안을 주시하자 그제야 덩치 큰 어른들 사이에 작게 웅크리고 입을 손으로 막고 있는 어린아이의 형체가 보였다.
‘울거나 때 쓰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걸 알고 무서워도 참고 있는 거겠지?’
김 씨 아저씨가 말한 형세나 기주 아버지가 어째서 납치를 실종으로 신고했는지에 대한 계산 따위는 던져버리고 무서운 곳에서 버티고 있는 저 아이가 내 동생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에 몸을 맡겼다.
분노에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지만 아직 그럴 수 없었다.
기주가 있는 곳을 확인했지만, 아직 내가 기주를 안전하게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인질극으로 가게 되면 기주를 찾지 못한 것만도 못할 수도 있어.’
김 씨 아저씨도 이런 점을 생각해서 위치만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서 조용히 넘어가면 안전하게 아이를 돌려보내지만 시끄러워지면 납치한 쪽도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거지.’
나는 좁은 골목길이라는 이점을 살려서 옆 골목의 담을 박차고 여관 담벼락에 올라섰다. 여관은 개인 집을 개조해서 만든 것인지 기주가 잡혀 있는 방과 담벼락 사이가 그렇게 넓지 않았다. 괜히 어두운데 바닥에 내려섰다가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담벼락에 선 자세로 여관의 지붕을 붙잡고 매달렸다.
“으윽···. 도저히 더워서 못 자겠네.”
깜박깜박―.
형광등이 커지면서 나는 소리에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지붕에 팔과 다리를 벌리고 버텨야 했다.
‘흐읍···.’
“씨···. 오늘 아침부터 뺑이 쳐서 피곤하거든. 자자.”
“우리가 잘 시간이냐?”
“하긴 지금이 한참 활동시간이긴 하지.”
“형님이 꼬맹이 옆에서 한시도 눈 떼지 말라고 했잖아.”
“뭐···. 옆에서 도망 못 가게 잡아만 두면 되는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꼬맹이 녀석 말도 잘 듣는데···.”
“이 밤중에 또 뭐가 아쉬워서 그런 얼굴로 헛소리야?”
“옆 방에···.”
“너 이 새끼···정말···.”
“그래서 싫다고요?”
“너 이 새끼 머리 좋다고···야 돌대가리 네가 방문 앞 지키고 있어. 나하고 이 새끼하고는 옆방에 갔다 올 테니까.”
“저도···.”
“이 새끼 차례 지키라고 어련히 알아서 신경 써준다니까?”
“네.”
“그래도 꼬맹이하고 한 명은 같이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이 새끼가 지가 꼴리게 만들고서 하는 헛소리는···”
“돌머리가 왜 돌머리야? 애새끼하고 같이 붙여놨는데 기다리기 힘들다고 일이라도 벌이면 너하고 나만 ×되는 거야.”
“아···.”
“이 새끼 방문 앞에 세워두고 혹시 모르니까 문 열리면 소리나게 해놔.”
“아무리 그래도 저도 생각이라는 게 있는데···. 제 앞에서 바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탁―.
“돌대가리가 왜 돌대가리인 줄 알아? 생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본능이 생각을 앞서는 놈이니까 그런 별명이 붙는 거야. 그러지 말고 다 나와. 방문 앞에서 지키라고.”
“네··네···”
“새끼들 빠져 가지곤 빨리 움직여.”
불이 켜지고 덩치 세 명이 사라지고 다시 불이 꺼지자. 잠든 것처럼 조용하던 작은 인형이 이부자리 밖으로 나와서 무릎을 잡고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나는 방안의 인기척이 작은 인형뿐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잠시 버티다가 팔에 힘을 주고 다리를 창문 턱에 올리고는 순식간에 방안으로 들어섰다.
놀랐는지 큰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주였지만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계속 입을 손으로 막고 있었는지 큰 소음은 나지 않았다.
“누···눅··.”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셨는지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기주에게 양손을 편 채 천천히 다가가 손가락으로 입을 막고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흐릿한 모깃불 향이 방안을 감싸고 나와 기주 사이를 살피듯 사라지자 자신을 구하러 아니 최소한 방금 나간 덩치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껴서인지 나에게 기주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도 손을 뻗어서 놀라지 말라는 듯 기주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나에게 와락 안겨 왔다.
“주인 오빠!”
나는 기주가 내 품에 들어오면서 소리가 나자 기주를 안아 들고 이제까지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창틀을 밟고 들어왔던 게 무색하게 소리가 나는 것을 무시하고 창틀을 밟고 나가려고 일어났다.
‘작네···.’
긴장해서 몰랐는데 창틀은 성인남성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작은 사이즈였다. 혼자서 나가는 건 가능하지만, 기주를 안고 지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았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기주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방문이 열리고 문 앞에 바로 지키고 서 있던 돌머리라는 덩치가 불도 켜지 않고 나에게 양팔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나는 기주를 내 뒤로 돌리고는 몸을 낮춰 돌머리의 양팔 공격을 피하고 주먹을 무방비한 복부에 안착시켰다.
퍽―.
소리를 먹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돌머리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나는 그런 돌머리의 등을 한차례 발로 차 정신을 잃었는지 확인하는 사이에 불이 켜졌다.
깜박깜박―.
“어떤 놈이야?”
“주인이 오빠야. 이 썩은 내야!”
“뭐? 꼬맹이 너!”
기주가 이제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고 말을 잘 들었는지 기주의 외침에 황당하다는 듯 손가락질을 하는 기주 말로 썩은 내가 나는 놈의 삿대질하는 손가락을 꺾었다.
손가락이 내 손에 꺾이자 비명을 지르면서 팔을 잡고 무릎을 꿇은 놈을 지나쳐 품에서 흉기를 꺼내는 덩치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끄악―.
탁―.
혹시 몰라 오는 길에 사신은 워커에 칼이 스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