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9화 (19/963)

19화. 무인의 가치관 (3)

“가주님.”

“무슨 일인가.”

태경은 연가 총관이 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연위에게 깍듯하다 못해 조심스러웠다.

“모용세가(慕容世家)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모용에서?”

“예에.”

무심한 연위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모용세가는 연가와 함께 같은 칠대세가의 일원이었다. 벽산연가와는 달리 오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전통적인 무림세가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연가는 모용세가와 별 접점이 없었다. 그간 정도무림맹(正道武林盟)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인연은 그게 전부였다.

“주게.”

“여기 있습니다.”

서신을 읽은 연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태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업 제안이로군.”

“사업이요?”

탁자에 서신을 놓은 연위가 검지로 탁자를 두들겼다.

‘힘을 합치자?’

연가가 있는 강소성은 절강성과 함께 해상 무역을 활발히 하는 지역이었다.

물론 명성이 높은 문파들의 경우 강소와 절강에 분타를 세워 무역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강소에 터를 잡은 연가 역시 무역 사업을 하고 있었다.

‘모용가도 이쪽 일을 해 보겠다는 건가?’

과거 모용세가는 중원의 변방인 요녕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삼백 년 전 혈교지란(血敎之亂) 이후 중원 한복판인 호남성으로 이주했다.

내륙에 자리를 잡았으니 해상 무역에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되겠군. 총관.”

“예.”

“지필묵을 준비해 주게.”

“아, 옙!”

연위는 순식간에 서신을 써서 말렸다.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칭송받는 검객답게 필치가 몹시 수려했다.

“이것을 모용가에게 전하게.”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 보게.”

태경이 꾸벅 고개를 숙이곤 가주실을 나갔다.

다시 업무로 돌아가려던 연위가 문득 창가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눈동자 위로 보일 듯 말 듯한 걱정이 드리워졌다.

“……그쪽도 춥겠군.”

* * *

“와아아!”

연지평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일었다.

“굉장해요, 형님!”

합비에 들어서자 눈에 띄게 사람이 많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시의 화려함이 그야말로 대단했다. 항주(杭州)와 함께 천당 소리 듣는 소주(蘇州)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연지평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닷가와 인접한 강소성과는 확실히 달랐다. 건물부터 사람들의 의복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눈을 즐겁게 했다.

들뜬 연지평을 보던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툭툭 건드렸다.

“네 동생 기분이 거의 파도를 타는데? 어젯밤까지만 해도 세상 고민은 다 떠안은 기색이더니만. 바닷가 근처에서 살아서 그런가?”

“…….”

“평소에도 저러니?”

“시끄러워.”

“말을 해도 꼭.”

연지평이 흥분한 얼굴로 연호정에게 다가왔다.

“형님! 형님! 우리 저기 저잣거리에 놀러 갈래요? 그럴래요?”

연호정의 얼굴에 난감함이 깃들었다.

“일단 숙소부터 잡는 건 어떠냐?”

“숙소는 아무 데나 잡아도 되잖아요! 네?”

뭐, 그건 그렇긴 하다만.

“멀쩡해 보여도 휴식이 우선일 거다.”

연호정이 제갈아연과 제갈준을 가리켰다.

연지평은 아차 싶었다.

“아!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신나서…….”

제갈아연이 푼수처럼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휴, 괜찮아. 우리 눈치 보지 말고 가서 놀아. 숙소야 우리가 가서 잡으면 되지, 뭐.”

제갈준도 나서서 말했다.

“그래요. 어차피 이틀 정도 남았으니까 그동안 근처에서 쉬면 되죠.”

제갈 남매가 신모를 돌아보며 동시에 물었다.

“그렇죠?”

신모가 헛기침했다.

“대공자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연호정에게 모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먼저 회합장에 가 있을 테니 놀다가 올 사람은 그러도록 해.”

“커험!”

“아아…….”

헛기침 소리와 안타까움이 절로 느껴지는 신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 없이 말했는데 뭔가 오해의 소지를 줄 것 같은 발언이긴 하다.

“아니, 정말 난 신경 안 써도 된다.”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연호정이 도끼눈으로 제갈아연을 노려보았다.

제갈아연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하지만 할 말은 했다.

“이왕 같이 가기로 했으면 같이 움직이는 게 맞지. 허험!”

“너희는 따로 할 일이 있을 텐데?”

“응? 할 일이라니?”

“너희가 따돌렸을 확률이 아주 높은 가문의 호위들부터 찾아야 하지 않나?”

“억?!”

제갈준도 아차 싶었는지 절뚝거리던 다리를 빳빳하게 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알 만하군. 회합이 시작하기 전까지 호위를 못 찾으면 죄 없는 호위들은 가문으로 돌아가서 매타작을 맞겠군.”

“아, 안 돼!”

파라락!

제갈아연이 냅다 제갈준을 둘러업었다. 제갈준이 말릴 새도 없었다.

“우리 먼저 갈게! 신 대협! 회합장에서 봬요! 정아! 다시 보자!”

“으아아악! 누님! 내려줘요! 사내대장부가……!”

“닥쳐, 이 약골 자식아!”

파바박!

제갈 남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갈 남매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중얼거렸다.

“끝까지 친한 척이네, 저거.”

구파일방이든 칠대세가든, 모두를 의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제갈세가에 관한 의심은 거의 희석된 상태지만 혹시 또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사건이 터지는 걸 수도 없이 봐 온 그였다. 아직 제갈세가에 대한 경계를 풀 때가 아니었다.

‘제대로 알려면 가문의 중진을 봐야 해. 방심은 금물이다.’

그때, 연지평이 물었다.

“형님.”

“응?”

“회합장으로 가요.”

“어? 너 저잣거리 돌아보고 싶다며?”

연지평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형님이 같이 안 가시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괜찮아요.”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정 그러면 오늘 밤까지만 같이…….”

“아니에요,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놀러 온 게 아니잖아요. 모임이긴 해도 가문의 명성에 먹칠할 순 없죠. 마음을 가다듬는 게 좋겠어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대견하군.’

이 나이대에 소년들과는 확실히 생각하는 게 다르다. 아직 순수함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 생각도 깊다.

“그래, 그러도록 하자.”

“예!”

그렇게 일행은 곧장 회합장으로 향했다.

회합장으로 향하며 연호정은 생각에 빠졌다.

‘후기지수 회합은 이틀 뒤. 사흘 동안 진행된다. 말이 회합이지 사교장일 뿐이니, 그사이에 알아볼 건 다 알아봐야 해.’

칠대세가를 대표하는 후기지수의 모임인 만큼 머릿수가 적다. 설령 한 가문에서 대여섯 명을 보낸다 해도 오십 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 개개인의 무공과 진기를 모조리 훑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연호정의 수준으론 타인의 내공 성질을 보는 것만으로 분석하는 건 불가능했다.

‘싸움까지는 아니어도 비무나 신체 접촉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때였다.

“죄송해요.”

“음?”

연호정이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지?”

“죄송해요.”

“뭐가?”

연지평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사실 어제 숲에서 형님이랑 제갈 누님이랑 대화하는 걸 들었어요.”

“안다.”

“헉! 아, 알고 계셨어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진기를 그리 어설프게 감췄으니 티가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지.”

“아…….”

“그런 걸로 미안해할 필요 없다. 신경이 쓰였다면 내가 먼저 널 불렀을 거야.”

연지평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그렇고요.”

“음? 또 나한테 잘못한 게 있었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죄송해요.”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동생이 왜 그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젯밤, 제갈아연과의 대화에서 연지평이 유독 말수가 적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지.’

자신의 방식과 주관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동생을 신경 쓰지 못한 게 미안했다.

연호정이 연지평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으갸갹! 혀, 형님!”

“이놈아, 나이도 어린놈이 자꾸 죄송하단 말을 입에 담는 거 아니야. 습관 된다.”

“하지만……!”

“나는 주관이 지나치게 뚜렷하고 거칠어서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지지 못해. 그러다 보니 굳이 남을 이해하지 않으려 할 때도 있다. 그래서 고마움도, 미안함도 잘 느끼지 못해.”

“…….”

“나처럼 극단적일 필요는 없지만, 감사와 죄송을 입에 달고 사는 것도 좋은 건 아니라고 본다. 다르다는 게 틀린 건 아니잖느냐?”

“그런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연호정은 어지간해선 자신의 생각을 동생에게 주입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고민하게 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닌, 자신보다 더 넓고 깊게 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이 세워 준 주관을 자신이 세웠다며 착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두런두런 대화하는 형제를 보는 신모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몹시 우애가 깊구나.’

초성루로 향할 때도 생각했던 바였다.

그래서 내심 의아했다. 대공자가 이공자를 끔찍하게 증오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신모가 보기에 연가 형제는 세상 어떤 형제보다도 우애가 깊어 보였다.

‘게다가…….’

신모의 눈이 연호정의 등에 박혔다.

‘굉장하셨지.’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나고 나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특히나 판단력이 대단했다. 마치 수도 없이 화재 사건을 겪어 본 사람처럼 놀랍도록 빠르고 분명한 대응책을 내놓았다.

‘대체 어디서 그런 경험을 하셨을까?’

무공이야 가주님께서 따로 전수해 주셨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답을 찾아가는 일련의 행동은 비급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두 번 겪어 본 솜씨가 아니었어.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

“신 대주.”

“예? 아, 예!”

“대원 하나를 시켜 회합장 입구에 보초를 세워 줬으면 해.”

신모가 퍼뜩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회합장 입구까지 도착해 있었다. 말이 회합장이지 장원 하나를 빌렸을 뿐이었다. 물론 그 장원이 수백 명을 수용할 정도로 컸지만.

“아, 물론입니다.”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몇 명인지도 즉각 내게 보고해 줬으면 좋겠군.”

“대공자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좋아.”

연호정이 슬슬 어깨를 풀었다.

“들어가 볼까?”

신모가 장원의 대문을 두들겼다.

쿵! 쿵!

“안에 계시오?”

기다렸다는 듯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오?”

“강소 벽산연가에서 왔소. 문을 열어 주시오.”

잠시 후.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널따란 장원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대문과 가까이 있는 일단의 무리도.

“벽산연가?”

“그렇소.”

가장 앞에 선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사천의 한호명이라 하오. 연가의 무사들을 뵈어 영광이외다.”

사천, 그리고 한호명.

비록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지만 신모는 단숨에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독룡철편(毒龍鐵鞭) 한호명?!”

“하하! 알아봐 주어 영광이오.”

신모와 마찬가지로 한호명 역시 한 지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절정고수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신모와 한호명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 지역 최고의 무가(武家) 소속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연호정의 눈에 번갯불이 튀었다.

한호명의 뒤, 적당한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청년이 보였다.

“당가(唐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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