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돌풍 (1)
제갈아연을 본 연호정은 만사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무안할 만도 하지만 제갈아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만면에 반가운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간 잘 지냈어?”
“이틀밖에 안 지났다.”
“반가워서 그러지.”
대체 뭔 친분이 쌓였다고 반가워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연호정이 팽대호에게 말했다.
“여하간 실례했소.”
“잉? 응? 어? 아! 괘, 괜찮소이다! 닳는 것도 아닌 걸, 뭐.”
“그럼.”
“가, 가시게?”
“그렇소만.”
“……어어, 살펴 가시오. 이따 뵙시다.”
그렇게 연호정이 숙소로 들어갔다.
제갈아연이 다시 한번 그를 부르려 할 때였다.
“아가씨.”
“네?”
“이만 숙소를 잡으시지요.”
“어, 근데 어차피 짐은 준이가 다 갖고 있어서요. 저는 친구하고 차나 한잔…….”
“아가씨.”
“…….”
“…….”
“알았어요, 알았어요.”
초로의 무사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속하가 건방을 떨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이, 괜찮아요! 아버지 말씀 기억하고 있다고요. 야, 준아. 어디 괜찮은 숙소나 딱, 골라 보거라!”
“물론이죠.”
“이이익.”
“아악! 왜, 왜 그러세요! 머리 다 헝클어져요!”
“다 너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인마.”
“사랑은 무슨! 심술이지! 어? 근데 왜 심술을 부려요?”
“…….”
“……자! 숙소 잡으러 갑시다! 가요, 가!”
그렇게 제갈 남매가 이동하려 할 때였다.
순간 제갈아연이 남궁현을 바라보았다.
“어? 오라버니?”
남궁현이 조금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제갈아연이 품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연호정을 대할 때나 제갈준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래. 너도 잘 지냈니?”
“네.”
“…….”
“그럼, 이따 뵐게요.”
제갈아연의 격식은 완벽했다. 누가 봐도 명문가의 재녀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어색함이 흘렀다. 제갈아연이 격식을 갖추고 타인을 대하는 것 자체가 그리 편해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제갈 남매도 숙소를 잡으러 들어갔다.
멀어져 가는 제갈아연을 보는 남궁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거처로 돌아오니 어느새 연지평이 들어와 있었다.
“형님?”
“왔느냐?”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혹시나 해서 들어왔어요.”
“그래, 잘했다.”
“근데 제갈 누님이랑 준이도 왔어요?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던데요?”
확실히 연지평의 감각은 뛰어났다. 따로 집중했다면 모르되, 대문 쪽의 목소리를 들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
“잘됐네요. 그래도 친분 있는 사람이 오니까 뭔가 안심이 돼요.”
“떨리냐?”
“……조금?”
솔직한 녀석.
연호정이 웃으며 창가로 턱짓했다.
“서쪽 건물에 자리를 잡을 것 같더라. 가서 차 한잔하고 오너라.”
“형님은요?”
“나는 됐다.”
연지평이 머리를 긁적였다.
“형님,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언제든지.”
“제갈 누님이 싫으세요?”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별 감정 없는데?”
“그러시구나.”
“왜?”
“아니에요. 그냥 전에도 그렇고, 제갈 누님을 좀 멀리하시는 것 같아서요.”
“싫어할 이유도 없지만, 딱히 좋아할 이유도 없잖아?”
연지평의 표정이 멍해졌다.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인간관계를 확실히 해 두는 사람은 처음 봤다.
“에,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연지평이 나가자 연호정이 창가에 앉았다.
반갑기는 반가운 모양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내려갔는지 벌써 연지평의 뒷모습이 보였다.
‘즐거워 보이는군.’
연호정의 얼굴에 은근한 자책감이 깃들었다.
‘옛날에는 저러지 않았겠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흐릿했다. 하지만 과거 후기지수 회합에 왔을 때는 동생을 철저하게 증오했던 시기였다. 아마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남들과는 친분을 쌓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그리 만들지 않겠다.’
제갈아연과 거리를 두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제갈준은 자신을 어려워했지만, 제갈아연은 그 딱딱한 벽을 허물고 싶어 했다.
사실 고마운 일이었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해도 그리 허물없이 다가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그렇기에 연호정은 타인을 경계했다.
정확히는 자신을 경계했다.
‘이번만큼은 실패하지 않아.’
반가움을 가득 안고 뛰어가는 연지평의 뒷모습.
저 활기찬 뒷모습에 두려움과 허무를 드리우고 싶지 않았다. 동생만이 아니라 가인(家人)들에게도 끔찍한 미래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삼교(三敎)의 난이 일기 전까지는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삼교의 난 이후에도.
‘적은 어디에나 있다.’
누가 적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심할 순 없는 노릇. 그렇게 생각하면 팽가에 대한 평가도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었다.
바닥에 앉은 연호정은 가부좌를 틀었다.
반개한 그의 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 어두워 보였다.
“이왕이면 구파일방까지 안 갔으면 좋겠군.”
한 시진 후.
“대공자님. 회합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내원 연회장으로 모이라고 합니다.”
“모용과 명가는?”
“지금 막 당도했습니다.”
* * *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와하핫! 엄청 오랜만이구나! 꼭 일 년 만인가?”
“그러네요.”
“이야! 고작 일 년 지났을 뿐인데 엄청 예뻐졌구나!”
“그러는 오라버니들은 더 커지셨네요?”
“워낙 잘 처먹으니깐.”
“호호호!”
“싸기도 엄청 싸.”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야외 연회장으로 들어오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팽씨 형제였다. 우람한 덩치도,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호탕한 목소리도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였다.
그러나 연호정의 눈은 팽대호, 팽만호에게 가지 않았다.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여인을 향했다.
‘모용!’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청초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체내에 감추고 있는 진기가 실로 대단했다.
그 잠재력은 오히려 팽씨 형제보다도 위였다. 그리고 그 힘이 어떤 힘인지, 저 여자가 누구인지도 연호정은 잘 알고 있었다.
‘모용군의 딸이로군.’
모용연화(慕容蓮花).
무림맹주 모용군을 대신하여 모용세가를 이끌었던 일세의 여걸이었다. 성정을 떠나 능력만큼은 모용군이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재녀였다.
연호정은 고개를 돌렸다.
과거 흑제성을 이끌던 시절 무던히도 부딪쳤던 여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명가(明家)를…….’
그때였다.
“누구 찾아?”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제갈아연이 웃으며 서 있었다.
“왔나?”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네 말투 진짜 나이 먹은 아저씨 같아.”
“일없다.”
“또, 또.”
연호정이 제갈아연의 차림새를 훑었다.
“그 옷차림은 뭐냐?”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밝을 것 같은 그녀의 미소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꽤 화려하지?”
초성루에서 처음 봤을 때, 그리고 장원으로 들어왔을 때 제갈아연의 옷차림은 수수했다. 워낙 미모가 뛰어나서 입고 있는 옷까지 화려하게 느껴졌을 뿐, 실제론 적당히 고급스러운 활동복에 가까웠다.
지금은 달랐다.
화려한 궁장을 입은 그녀의 자태는 실로 대단했다. 질 좋은 연녹색 비단 바탕에 붉은 매화를 수놓은 옷은 밝고 고운 그녀의 미모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정말?”
“그래, 잘 어울린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눈을 살폈다.
연호정의 눈은 투명했다. 지나치게 맑고 무감각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하게 주눅 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제갈아연의 표정은 밝았다.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온 그녀였다. 하지만 그러한 칭찬 이면에는 질투, 욕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포함된 경우가 많았다.
가족 외의 타인에게 이리 담백한 칭찬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자연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좀 과하다 싶긴 하지만…….”
“과하지 않은데?”
“그, 그래?”
“온몸을 금으로 치장한 것도 아닌데. 너보다 만 배는 화려하게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 널리고 널렸다.”
정말이었다.
흑도에선 본인의 분수에 맞지 않게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의 능력과 재력을 과시하며 세력을 모으려는 놈들 천지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제갈아연의 복장은 평범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표정 관리도 잘하는 법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몰랐다.
“저기 자리 있다. 가서 앉자.”
“됐다.”
“에이, 좋은 자리에서까지 튕기지 마.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귀찮게 굴지 말라고 하려던 연호정은 잠시 멈칫했다.
‘하긴.’
만약 이곳에 연가를 멸문시키려 하는 배후 가문이 있다면, 그 가문의 후계자는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과 연지평을 눈여겨볼 것이다.
‘생각해 보니 괜히 티 나게 행동할 필욘 없었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헤헷.”
“옆에 붙지 마.”
“거 되게 까칠하네.”
“시끄러워.”
“그런 성격으로 사는 거 피곤하지 않아?”
“피곤했으면 이렇게 안 살지.”
“흠,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좀 떨어져. 덥다.”
“날이 이렇게 쌀랑한데 덥긴. 게다가 너 정도 무공이면…….”
제갈아연은 아차 싶어 헛기침을 했다.
“미안. 괜한 말이었던가?”
확실히 눈치 하나는 예술이다. 그녀는 연호정이 무공을 숨긴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굳이 떠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미리 만들어 둔 음식들이라 다소 식었지만 그래도 맛은 있었다.
연호정이 선뜻 제갈아연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제갈아연 역시 웃으며 그의 잔을 채웠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래.”
“연가의 무공은 다 그렇게 강하니?”
“제갈가의 무공도 본가 못지않을 텐데.”
“아하? 중요한 건 무공이 아니라 사람이다?”
척하면 척이다. 제갈아연은 상대의 의도를 잘 파악할 줄 알았다.
제갈아연이 깔깔 웃었다.
“은근슬쩍 본인 자랑하네? 하긴, 자랑할 만하겠더라.”
“자랑할 실력 아니야.”
“겸손이야?”
“진심이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얼굴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무공을 대단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살피던 제갈아연이 물었다.
“더 강해지고 싶어?”
“모든 무인의 열망이지.”
“그건 그렇지. 그럼 네 꿈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야?”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웃음이었다. 하지만 담고 있는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적당히 강할 바에야 천하제일이 낫기야 하지.”
“……그렇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제갈아연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어중간한 것보단 최고가 낫지. 차라리 최악이 되거나.”
제갈아연이 밝게 웃었다.
“넌 좋겠다. 꿈이 있어서.”
천하제일인이 꿈은 아니지.
연호정은 굳이 그 말까진 하지 않았다.
“너는 꿈이 없나?”
“나? 흐으으음!”
제갈아연이 입을 앙다물고 고민했다. 아니, 고민하는 척을 했다.
“확실히 넌 어른스럽구나? 난 아직 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꿈을 생각해 본 적 없다고 어른이 애가 되나?”
“음, 그렇게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제갈아연이 팔꿈치로 연호정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너랑 얘기하다 보면 정말 내가 애가 된 것 같아. 내가 그래도 멍청하다는 소리 들어 본 적은 없는데 말이야.”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줘.”
“억? 언제 마셨어?”
“술병 내놔.”
“알았어! 따라 줄게! 성격 무지하게 급하네. 건배도 안 해 주고 고새 날름 마셨단 말이야?”
한 사람은 무표정한 얼굴로 술을 마시고, 다른 한 사람은 깔깔 웃으며 조잘거린다. 어디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조합이지만 문제는 두 사람의 분위기였다.
정말 격의 없는 분위기였다. 남녀가 술잔을 기울이는 데에도 담백하고 친숙해 보였다.
연회장에 모인 후기지수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아름다운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게다가 그 옆에 있는 청년도 인상이 다소 날렵할 뿐, 충분히 잘생긴 용모였다.
그 광경은 후기지수들을 묘한 감흥에 젖게 했다. 왠지 이 연회장에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주 즐거워 보이는데?”
연호정과 제갈아연이 고개를 돌렸다.
당양선이 뒷짐을 진 채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친구가 없어서 그러는데 합석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