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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7화 (27/963)

27화. 싸움의 이유 (2)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머리는 산발했고 얼굴에도 때가 덕지덕지 묻었으며 걸친 옷은 누더기나 다름이 없었지만, 치아만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용두방주라? 거 상상만 해도 즐겁수다. 아쉽게도 사부 목숨이 고래 심줄보다 질겨서 말요. 향후 몇 년은 요원할 것 같소.”

“…….”

“그나저나 귀하는 이 거지를 아는데, 거지는 귀공자를 모르고 있구먼? 어디 보자, 이십 년 넘도록 밥 빌어먹던 눈치를 총동원해서 때려 맞혀 보자면…….”

“연호정이라 하오.”

“으잉?”

연호정이 드물게 포권을 취했다.

“강소 벽산연가의 장남 연호정이오. 반갑소.”

가득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의와 격식을 차린 인사였다. 적어도 상대를 무시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 그래, 반갑소.”

그는 은근히 놀랐다.

개방은 구대문파, 칠대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방파다. 하지만 명문가의 자제들이 가장 기피하는 방파이기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개방도(丐幇徒) 전부가 거지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호 경험 많은 무림인이야 개방의 대단함을 알아주지만, 젊은 청춘남녀들은 달랐다. 그저 더러운 거지라서 피하기만 급급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면 확실히 연호정의 인사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되는군.’

가득상을 보는 연호정의 눈은 진심 어린 호의를 품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백도 무림에 뒤지지 않는 힘을 쌓아 올렸음에도 흑도는 흑도라며 천시받았다. 하지만 가득상은 흑도를 진심으로 전우로서 대해 주었다.

삭막했던 세월, 연호정이 인간적으로 호의를 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것 참, 이런 인사는 얼마 만에 받아 보는 건지.”

가득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꼴을 보면 비듬이 한 바가지는 나올 것 같은데 의외로 그런 건 없었다.

“그럼 그쪽은 연가의 이공자시고?”

연지평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강소 벽산연가의 이공자, 연지평이라 합니다. 개방의 후개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연지평의 인사 역시 예의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초면이니 호의고 뭐고 할 것도 없지만, 적어도 상대를 경시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가득상은 괜히 우물쭈물했다. 참 반가운 인사긴 한데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허! 소문하고는 너무 다르잖아?’

연호정이 웃으며 물었다.

“식사는 끝나셨소?”

“식사? 아, 방금 끝났소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었지. 이런 맛난 음식은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나더이다.”

“아쉽군. 괜찮다면 점심은 같이 먹읍시다.”

연지평은 놀라서 연호정을 보았다. 그는 형이 누군가에게 먼저 밥을 먹자고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가득상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럽시다.”

“그럼 편히 쉬시길.”

“아, 귀하도.”

그렇게 연씨 형제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형제의 뒷모습을 보던 가득상은 입맛을 다셨다.

“초성루 건부터 하나하나 캐 보려 했더니만 날름 기습당했네.”

혹시 연호정이 이쪽 속내를 알고 선수를 친 것 아닐까?

‘그건 아니야.’

개방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선 사람 보는 눈은 필수다. 가득상이 볼 때 연호정의 호의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했다.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이지.’

찝찝함에 머리를 벅벅 긁고 있을 때였다.

“후개십니까?”

가득상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푸른 검을 찬 미청년이 있었다. 비단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희대의 미남자였다.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남궁가의 자제분?”

남궁현이 포권했다.

“남궁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 나도 반갑소.”

“한데 여기는 어쩐 일로?”

“근처에 일이 있어서 들렀는데, 마침 후기지수 회합을 한다지 않소? 대문 밖으로 흘러나오는 냄새가 기가 막힙디다. 체면 불고하고 들어왔수다.”

남궁현이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칠대세가 후기지수들의 회합이니 누군가가 허가를 해 줬다면 더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회합을 주최한 것은 남궁세가가 아닌가? 미리 언질이라도 줬어야 했다.

게다가 명문가의 자녀들이 모인 곳에 거지라니? 아무리 개방의 후계라도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즐겁게 놀다 가시길.”

형식적인 인사를 끝으로 남궁현 역시 식당으로 향했다.

가득상이 히죽 웃었다.

“이게 정상인데 말이야.”

기분이 나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삼십이 넘었고, 강호 경험도 풍부했다.

다만 연호정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혹시 전에 날 만난 적이라도 있나?”

* * *

“없어.”

“아, 그렇구나.”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는데, 개방의 작은 주인을 언제 봤었겠냐.”

“하긴, 그러네요.”

“왜?”

“형님이 타인에게 먼저 밥 먹자고 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흑암제 시절에도 세력을 규합하거나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자리를 제외하면 홀로 밥 먹길 즐겼으니까.

‘여전하군.’

가득상의 미소는 여전히 맑았다. 백도 무림의 정보 총책이었던 사람이 그리 순하기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음?’

문득 드는 생각에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 사람, 과거 회합 때는 오지 않았는데?’

흑암제였을 때의 삶, 즉 과거로 돌아오기 전 참여했던 후기지수 회합 때는 가득상을 본 적이 없었다.

그건 확실했다. 가득상이라는 인물 자체를 흑제성주가 된 이후에 봤으니까.

‘지금은 왜?’

뭐지? 내가 기억이 잘못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과거가 달라졌다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니, 제갈 남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과거의 나는 초성루를 들르지 않았어. 하지만 이번엔 들렀다. 우리가 없었다면 제갈 남매는 음화홍류를 익힌 그 미친놈한테 당했을 게 분명해.’

이건 확실하다. 뇌화방주인지 뭔지 하는 놈은 예전에도 똑같이 불을 질렀을 것이고, 제갈 남매 성격상 도망치지 않고 맞섰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 생에서 제갈 남매는 어떻게 된 거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제갈세가는 그때도 존재했어. 가세가 크게 기울기는 했지만, 다행히 다른 세가의 지원으로 명맥은 유지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 가문은…….

“잠시 실례해도 되겠소?”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수염을 멋들어지게 다듬은 중년 검사가 서 있었다. 완벽하게 가다듬은 복식, 등에 걸고 있는 푸른 장검이 섬뜩한 예기를 풍겼다.

‘남궁!’

중년 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잘 생겨서 쳐다봤소.”

검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왠지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한데 누구시오?”

“흠! 추성(秋晟)이라 하오.”

“……?”

“이번 회합에 남궁 공자를 모시고 온 호위대장이오.”

근처에서 식사 중이던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뇌협(雷俠) 추성?!”

웅성거림이 커졌다.

상당히 유명한 고수인 모양이었다. 연지평도 놀란 눈으로 추성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연호정은 추성이 누군지 몰랐다. 그가 세상에 나와 흑도를 평정할 때도, 흑제성주로 군림할 때도 듣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추성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제아무리 남궁가 소속이라도 나이가 마흔이 넘은 어른이었다. 호위무사이니만큼 공대는 해 주지만, 한참 어린 후기지수의 삐딱한 모습을 보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연지평이 아차 싶어 일어났다.

“일단 앞에 앉으시죠.”

물끄러미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추성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연지평에게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추성이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소.”

“그러시오.”

“오늘 정오에 연회가 시작될 것이오.”

“알고 있소.”

“연회 전에 이곳에서 나가시오.”

순간 연지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못 들었소? 그럼 다시 한번 말해 주겠소. 금일 정오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장원에서 나가라 하였소.”

당황한 연지평과는 달리 연호정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변화는 있었다. 연호정의 얼굴에는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극히 미미하긴 하지만.

“나가 달라?”

“그렇소.”

“이유는?”

“고래(古來)로 칠대세가의 후기지수 회합에서 불상사가 난 적은 없었소. 그러나 귀하는 명망 있고 역사 깊은 이 회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소.”

추성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귀하는 이 회합에 참여할 자격이 없소. 스스로 잘 알 거라 믿소이다.”

추성의 말을 듣던 연호정은 식당 끝, 창가를 힐끔거렸다.

그곳에는 남궁현이 있었다. 햇볕 잘 드는 탁자 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품이 넘쳤다.

그때,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됩니다!”

의자가 넘어질 만큼 강하게 일어나 소리친 사람은 연지평이었다.

“어제의 사건은 이미 일단락이 되었어요! 형님도 오늘 연회에서 모두에게 사과하겠다고 했고요! 한데 이제 와서 나가 달라니?!”

“사과의 문제 이전에 품격의 문제요. 게다가, 아침부터 식당에 나와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비추는 그 행위, 진정 반성은 하고 있는지 의문이외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식당에 나온 것과 반성이 무슨 상관입니까? 또한 품격이란 것은…….”

“나는 내 할 말을 다 전했소. 더는 이 일로 얼굴 붉히지 않았으면 하니, 연회 전에 나가 주시길.”

그 말을 끝으로 추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러나 연지평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식당 전체를 울렸다.

항상 웃기만 바빴던 연지평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당신은 한 가문의 호위무사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남궁 공자를 지키는 것이지, 참여한 사람의 자격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추성이 차갑게 웃었다.

“과연 그럴까?”

“무슨 말입니까?”

“칠대세가 회합의 주최 가문은 오 년에 한 번씩 바뀌게 되오. 그리고 금년도 회합 주최 가문은 남궁세가요.”

“……!”

“나는 남궁 공자와 함께 이번 회합의 운영 전반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소. 그것도 가주님께 직접.”

“…….”

“어제는 이공자님께서 자리를 정리하셨으니 나서지 않았으나 오늘은 다르오. 이공자님께서는 마음이 여려 자리를 정리하는 데서 끝내셨지만, 난 회합을 망칠 위험 요소를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전혀 없소.”

연지평은 당황했다. 남궁가주에게 직접 명령을 받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연지평이 모를 만했다.

후기지수 회합은 말이 회합이지 친목 도모의 성향이 강했다. 그러니 연회를 여는 것이고,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혈기에 이런저런 사고가 날 위험도 충분하다. 주최 가문 측은 그런 피치 못할 사건, 사고를 무마하기 위해 믿을 만한 사람을 딸려 보낸다.

연지평은 태어나서 한 번도 회합의 주최 측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회합에 참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세세한 부분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주최 가문 측은 회합에 문제가 되는 사항, 혹은 사람을 쫓아낼 권리가 있소. 그런 관례는 수도 없이 많았소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특별할 것도 없다는 거요.”

“이익!”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오. 두 사람도 체면을 안다면 조용히 나가시는 게 좋을 거요.”

연지평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그때였다.

한참 멀리 떨어진 남궁현을 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지평.”

“……예, 형님.”

“열 내지 말고 앉아서 밥이나 먹어라.”

연호정이 동파육 한 점을 집어 크게 베어 물었다.

“쩝쩝, 아버지 말씀 잊었냐? 상대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 잘하라는. 꼴통인 나도 구분을 하는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꿀꺽.”

“얼른 먹어. 식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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