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싸움의 이유 (3)
식당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추성의 얼굴은 그야말로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식당 끝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남궁현의 얼굴도 굳을 대로 굳어져 있었다.
연지평은 침을 삼켰다.
“혀, 형님.”
“왜? 배 안 고프냐?”
“……그게 아니라.”
“안 먹을 거면 내가 다 먹는다? 새벽부터 수련했더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같아.”
쿵!
땅이 울렸다.
연호정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추성에게 향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연호정이 추성을 힐끔거렸다.
그 눈빛이 참으로 묘했다. 사람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짐승이나 별것 없는 풍경을 보는 것처럼 무심했다.
추성을 보던 연호정이 다시 고기를 씹기 시작했다.
철저한 무시였다. 추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라 했는지 물었잖느냐!!”
“시끄럽군.”
연호정이 귀를 후볐다.
“역시 짐승은 짐승이야. 사람 말을 영 못 알아 처먹어.”
활활 잘 타고 있는 불에 기름을 쏟아붓는다.
“이 애송이가 감히!”
그때였다.
“그만하시오.”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남궁현이 다가왔다.
추성은 남궁현을 보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 것 같았다.
실제로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고 있었다. 정말로 검을 뽑을 기세였다.
남궁현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추 단주!”
“…….”
“물러나 있으시오.”
이를 아득바득 갈던 추성이 몸을 돌렸다. 옷자락에서 펄럭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친 몸짓이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쉰 남궁현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자는 거요?”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그럼 당신에게 하는 말이지 누구에게 하는 말이겠소?”
“내가 뭘 어쨌길래 그러시나?”
“타 가문의 호위대장에게 모욕을 준 그 행위, 본가가 곱게 넘어갈 것 같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댁네 호위대장에게 모욕을 줬지?”
“뭐라?”
“누구라고 말한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치졸하군. 말장난하지 마시오. 이 상황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래, 말 잘했다.”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 상황을 다 보고 있었으면서도 왜 진즉 안 튀어나온 거냐? 어제 내 성질머리도 다 봤으면서 한가하게 차나 마시고 있어?”
“뭐, 뭐라고?”
“할 얘기가 있으면 나와서 직접 해라. 나이 먹은 호위대장 앞세워서 구경이나 하지 말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요?!”
“치졸하게 굴지 말란 소리다. 남궁세가의 이공자씩이나 되는 놈이 뭐가 아쉬워서 내게 나가 달란 말 한마디 못 하는 것이냐? 설마 내가 무섭나?”
“착각도 유분수군. 사람을 그리 몰고…….”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를 않는다. 어차피 들어 봤자 뻔한 말일 것이다.
신경 건드리는 말을 할 게 뻔하다면, 그냥 후련하게 내 할 말만 하면 된다.
“나한테 좋은 감정 없는 것 잘 알고 있다. 그럼 무인답게 당당하게 비무를 신청하든,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하든 해. 수작을 부리려면 티나 안 나게 하든가.”
“점입가경이군. 내가 왜 당신을…….”
“아니었어? 네 여동생 건 때문이라도 작정하고 있었을 텐데?”
남궁현의 표정이 돌변했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데서 남궁상화 얘기를 꺼내다니? 이건 위험했다.
남궁현이 서둘러 입을 열려 할 때, 이미 연호정의 말은 쏟아지고 있었다.
“성격 꼬인 거야 천성일 수 있지만, 그 잘난 명문가의 법도를 배웠다면 선은 넘지 말아야지. 너나 네 여동생을 보니 남궁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남궁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지금 본가를 모욕하는 거요?”
“너도 짐승 소리 안 들으려면 사람 말 제대로 들어야겠다. 남궁이라는 이름이 아깝다는 건, 너나 네 여동생이 남궁세가의 사람답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정도 말도 해석이 안 되나?”
“이……!”
“그리고.”
연호정의 눈에서 은은한 빛이 일었다.
순간 남궁현의 몸이 움찔했다. 한순간 번갯불처럼 튄 안광이 안구를 타고 뒤통수를 뚫고 지나간 듯했다.
“지금 이곳에서, 너희는 종결된 어제의 사건을 빌미로 나와 동생을 통해 본가를 모욕하고 있다. 그런 내가 너희를 모욕해선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모, 모욕이라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모욕이 아니었나? 하면 네가 호위대장에게 이 일을 시킨 게 아니란 말이지?”
“당연한 것 아니오!”
“하면 내가 이 자리에서 본가를 모욕한 네놈의 호위대장을 손봐 줘도 할 말이 없겠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연호정은 말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네가 시킨 일이 아니라면, 네 호위대장은 멋대로 나서서 타 가문을 모욕한 것이 된다. 모욕을 당한 가문의 장자로서 마땅히 이 원(怨)을 풀어야지 않겠나?”
“당치도 않은 소리! 추 단주는 그저 회합을 위해 본인의 권한을 행사했을 뿐, 누군가를 모욕하거나……!”
“내게 치졸하게 굴지 말라 했지? 너도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네 잘난 호위대장의 고압적인 태도를 이 식당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봤어.”
남궁현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저기 떨어져 자리한 젊은 남녀들이 이곳을 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흥미로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칠대세가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남궁현이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그는 그저 연회 둘째 날의 분위기를 새로이 환기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추성을 시켜 연호정을 몰아치게 한 것은 자신이었다. 다만 진짜로 연씨 형제를 몰아낼 생각은 없었다. 세는 작아도 연가 역시 칠대세가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저 적당한 순간에 나서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사건을 무마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것은 물론 상대의 기를 꺾기 위함이었으며, 나아가 연호정을 방심케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의 체면을 깎고 남궁의 위세를 알릴 생각이었다.
한데 이게 뭔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줘야 할 좌중이 오히려 상대의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정 그게 싫으면 나 대신 직접 호위대장을 혼내 주시든가.”
“뭐, 뭐라고?!”
“권한이 있든 없든 네 호위대장은 선을 넘었어. 가문의 이공자로서 따끔하게 혼을 내 줘야 하지 않겠나?”
“……!!”
“선택해라.”
남궁현은 본디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런 막무가내식의 상황을 접한 적이 없었다. 기실 이런 일은, 사건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할 만큼 사소한 다툼이었다.
한데 상대는 이 사소한 다툼에 가문의 명예라는 짐을 걸어 버렸다. 제아무리 남궁현이 똑똑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제가 책임지면 그만입니다.”
남궁현이 추성을 돌아보았다.
추성의 눈은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어쨌든 이 일은 저 때문에 발생한 것이니, 제 선에서 처리하면 될 일이 아닙니까. 굳이 공자님께서 고민하실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남궁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런 빌어먹을!’
최악이었다.
추성은 이런 식으로 나서선 안 됐다. 차라리 상대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나는 죄가 없다는 등의 말을 해야 했다.
한데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한다. 그 말은 연가를 모욕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시리도록 하얀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웃는, 정말이지 기분 좋은 미소였다.
“제 주인과는 달리 책임은 질 줄 아는군.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우우웅.
추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공을 발산하진 않지만 심상치 않은 기도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 귀하께서는 이 추성에게 어떤 식으로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오?”
“무림인이 갈등을 푸는 방식에 대단할 게 있나?”
“하면 비무라도 하자는 말이오?”
“그게 깔끔하지 않겠어?”
추성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칠대세가의 장자라도 스물이 안 된 청년이었다. 반대로 자신은 십오 년이 넘도록 강호의 생사를 경험한 일류 중의 일류였다.
그런 자신과 비무를 하자니? 상대의 저 자신감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추성이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명가의 삼공자와 싸우는 걸 보니 과연 박투(搏鬪)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소. 이왕 그런 김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추성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내려 주시는 건 어떻겠소?”
비웃음임과 동시에 남궁세가의 위대함을 알릴 기회이기도 했다. 추성은 정말이지 후기지수들이 보는 앞에서 연호정을 철저하게 쓰러트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연호정은?
‘이게 웬 떡이야?’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판을 벌이고 싶었는데 저런 말까지 해 주다니? 조금 전의 일은 싹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럴까?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움츠려야 할 사람이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순간 추성은 상대에게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건 아닌가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호정이 자신을 이길 확률은 일 할이 채 안 됐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친선 비무라는 것도 있으니까. 자네에게 책임을 물은 뒤, 후기지수끼리 무용을 뽐내는 것도 제법 의미가 있는 일 아니겠나?”
추성은 저도 모르게 허! 하고 조소를 터트렸다.
“좋을 대로 하시오.”
“좋지, 아주 좋아.”
연호정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은 추성이 아니라 명호림을 보고 있었다.
“한판 시원하게 놀아 보자고.”
* * *
“뭐, 뭐라고?!”
제갈아연이 입을 쩍 벌렸다.
“추성? 설마 얼마 전에 남궁세가의 단주로 취임했다던 그 뇌협 추성?!”
“……예.”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이런 제기랄! 어쩌자고 그런 사람과?!”
뇌협 추성.
하남과 안휘 일대에서 상당한 명성을 날렸던 중견 고수가 바로 추성이었다.
불같은 성정에 어울리는 난폭한 검술이 특징으로, 십오 년 동안 하남과 안휘 일대의 산적 중 삼 할을 홀로 토벌한 걸로 유명했다.
그 산적 중에는 무공을 익힌 자들이 태반이었다. 비록 대부분이 흑도 출신이지만 백 단위의 큰 산적 패도 많았다.
즉, 후기지수 수준의 무공이 통할 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후기지수는 어디까지나 동년배 중 특출난 자를 뜻하는바, 간혹 세기의 천재가 나오기도 하지만 무수한 실전을 겪은 진짜 검사와 싸우는 건 누구라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남궁세가가 추성을 괜히 단주(團主)직에 앉혔겠는가.
“막아야 해! 아무리 호정의 무공이 뛰어나도 이건 아니야!”
“그게…….”
연지평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외원 연무장에서 준비 중입니다. 일각 뒤에 시작할 거래요.”
“허억!”
제갈아연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안 돼! 추성은 무공만큼이나 손속이 독하다고 알려진 사람이야! 사람들 눈치를 볼 성격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어요. 여기서 물러나면 본가 이전에 형님의 명예가 떨어질 거라고요.”
제갈아연은 기가 막혔다.
“아니 근데 평이, 너는 왜 이리 초연해? 다 놔 버린 거야? 해탈해 버린 거니?”
연지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도 걱정은 돼요. 몇 번이나 말렸다고요. 하지만…….”
“하지만?”
“걱정이 되는 만큼이나 형님을 믿거든요.”
“……!”
“지금껏 제가 본 형님은, 남들 눈엔 다소 과격해 보여도 언제나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을 하셨어요. 혈육으로서 걱정은 되지만, 형님께 생각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형님을 믿는다고? 아무리 형을 믿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참으로 괴상한 형제다. 걱정은 하지만 믿는다? 평범한 사람의 사고가 아니었다.
‘형제는 형제네.’
하지만 연지평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불안해하지 않고 있었다.
형의 판단은 물론 실력도 믿고 있는 게 확실했다.
“너희는 진짜 여러모로 난형난제다.”
“예?”
“됐어! 얼른 연무장이나 가자! 준아! 너도 얼른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