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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1화 (31/963)

31화. 확신 (1)

묵직한 장창이 헤아릴 수 없는 잔상을 만들어 냈다. 마치 거대한 꽃잎을 그리는 듯 환상적인 초식이었다.

하지만 붉었다. 꽃잎이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푸화아악!

추성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연무장 중앙을 흥건하게 적셨다.

“헉!”

“머, 멈춰요!”

연호정은 멈추지 않았다.

한 번 죽인다고 했으면 죽인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창날에 죽음의 살기가 어렸다.

“커헉!”

추성이 피를 토하며 벌벌 떨었다.

전신에 그물과 같은 창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창상이 아니었다. 창날에 실린 벽라진기가 상처로 침투하여 내상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초식에 침투경까지 담아 공격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수준 높은 무도(武道)인지를 떠나, 진짜 죽일 생각이 아니면 이렇게까지는 안 한다.

‘죽음?’

추성의 눈이 충혈되었다.

‘내가 죽는다고?’

흐릿한 시야에 연호정의 모습이 보였다.

난격(亂擊)의 창술로 사람 하나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린 악마가 차갑게 웃으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로소 추성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저놈, 아니 저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악귀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생각이다.

“쿨럭! 사, 살려……!”

연호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활시위를 당기듯 창대의 중간을 잡고 당긴 그가 있는 힘껏 창을 뻗었다.

파아앙!

추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카아아앙!!

장창이 멈추었다.

“허억!”

창날은 추성의 목젖 한 치 앞에 멈춰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꿰뚫렸을 것이다.

부르르 떨던 추성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이번 창격을 막은 것은 한 자루의 철곤(鐵棍)과 손이었다. 창대를 쳐 내려고 했지만, 힘이 너무 강해서 손으로 잡아 비튼 것이다.

그가 자신의 창을 막은 사람을 보았다.

“……용두방주?”

“아까도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철곤을 짓누르는 창의 압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사부 명줄이 하도 질겨서 말요. 아직은 후계자 노릇이나 하고 있소이다.”

“…….”

“끄응! 그나저나 힘이 무진장 좋소이다. 아파 죽겠구먼.”

주르륵.

창을 잡은 가득상의 손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이번 일격은 단순한 일격이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찌른 것이 아니라 회전, 전사력(轉絲力)까지 걸려 있었다. 관통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물끄러미 가득상을 보던 연호정이 창에 실은 힘을 풀었다.

“휴우!”

가득상이 질린 얼굴로 철곤과 손을 떼었다.

연호정이 표정을 굳혔다.

“무슨 짓이오? 자칫 잘못했으면 당신 손이…….”

“날아갈 뻔했지. 제때 내공을 쏟아붓지 않았으면 조금 더 처절한 거지가 될 뻔했네.”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터는 모습이 꽤 털털했다.

“그래도 손 하나에 사람 목숨 둘을 살릴 수 있으면 남는 장사 아니겠소?”

사람 목숨 둘.

한 명은 추성임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다른 한 명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소.”

가득상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 연호정에게만 들릴 정도로.

“남궁세가는 강하오. 구주명가가 세(勢)를 불리기 전까지만 해도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소. 알 거 아뇨?”

“대상(大象, 코끼리)을 쓰러트리는 방법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어렵소.”

“당신, 남궁세가를 쓰러트릴 생각인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필요하다면.”

가득상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웃고는 있지만 등골이 서늘했다.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를 떠나, 이 청년은 진심이었다.

‘위험해.’

능력은 둘째다.

가득상은 연호정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강철처럼 단단한 천성을 느꼈다.

그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는 따지지 않는다. 이 청년은 한 번 하겠다 마음먹은 건 목숨 걸고 이루려는 독기를 지녔다.

단순히 독기라는 단어를 쓰기가 미안할 정도의 강인한 마음.

그 마음이 사도(邪道)로 빠지면 광기(狂氣)가 될 것이고, 정도(正道)를 따르면 신념이 될 것이다.

“어쨌든 보는 사람이 많소. 이 싸움은 여기서 끝내는 것으로 합시다.”

무색투명한 눈으로 가득상을 보던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이 무인이었다.

뜻밖인 것은, 그들의 눈빛이었다.

보통 이처럼 살벌한 싸움을 보았다면 두려움에 떠는 것이 정상이다. 범부(凡夫)들의 세계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저들 역시 무림인이라는 걸까?

이곳을 보는 후기지수들의 눈빛에는 단순한 놀라움 외에 진한 흥분도 깃들어 있었다.

피를 보고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인의 흥분이었다.

호쾌하고도 무자비하게 몰아붙이는 창술. 비록 그 창술가(槍術家)에게 당하긴 했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검도 고수의 패배.

마무리는 과했을지언정 창검이 부딪치는 굉음과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방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문에서 합(合)을 주고받으며 자란 후기지수들에게는 합을 맞춰 보지 않은 실전 같은 비무가 웅심을 자극할 만했다. 그것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저 남궁현조차도 눈빛이 달아올라 있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뜻밖의 치열한 승부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저 친구들 잔뜩 흥분했구먼? 생각보다 쉽겠는데?”

연호정이 가득상을 바라보았다.

가득상이 희극적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멋들어지게 정리해 보시구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무인 간의 생사결이었소. 승부를 방해한 죄, 꼭 받아 내리다.”

“거참 성격 희한한 양반일세. 고맙다는 소리는 못 할망정. 아, 됐어. 어서 정리나 하쇼.”

연호정이 창으로 바닥을 찍었다.

쿠웅!

모두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놀라게들 해서 미안하오. 하지만 만약 후개 분이 막지 않았다면, 난 진심으로 이 검사를 죽였을 것이오.”

오싹!

섬뜩한 분위기가 외원을 장악했다.

무인으로서 흥분했지만, 그들은 대의(大義)를 교육받은 백도의 자손이었다. 서슴없이 상대를 죽이겠다고 말한 연호정을 좋게 보긴 힘든 것이다.

“이유가 있소?”

덩치 큰 청년이 물었다. 어제와는 달리 심각하게 굳어진 표정이었다. 팽대호였다.

“연 형이 추 단주를 이긴 실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소. 하지만 좋은 자리에서,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었소?”

어제처럼 연호정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팽대호의 선이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어제의 사건과 지금의 승부는 별개로 본다. 그에게는 그런 뚜렷한 잣대가 있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연 형이라 부른 것만으로도 연호정에게 호의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숨길 이유는 없겠군. 금일 아침…….”

연호정은 짧고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말은 장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의 핵심은 놓치지 않았고, 이런 상황이 되기까지의 인과 과정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일까? 실제 말은 짧았지만 청자(聽者)들은 긴 얘기를 들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만큼 화자인 연호정의 말이 조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가득상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보통이 아니야.’

추성을 몰아붙였던 무공보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인상적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조리 있게 얘기하는데, 하나도 흘려들을 것이 없다.

읊조리듯 자연스레 흐르는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선택한 단어와 어법에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연설처럼 들릴 정도였다.

이건 타고난 게 아니라 경험에서 나오는 익숙함이었다. 높은 자리에서 좌중을 이끌어 보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완급 조절이었다.

감탄 어린 얼굴로 연호정을 보던 가득상의 얼굴에 점점 의혹이 일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스물이 안 된 나이로 추성을 꺾은 살벌한 실력.

철저하게 연마되어 절로 상대를 압도하는 신념.

좌중의 눈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걸 넘어,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분위기로 끌어들이는 기묘한 매력까지.

‘이건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청년이 아니라 거대 문파를 이끄는 수장이라고 착각했을 거야.’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당신 누구지?’

외원이 조용해졌다.

연호정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남궁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궁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애써 표정 관리는 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당황하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쯧.”

뒷짐을 진 명호림이 한숨을 쉬었다.

“남궁 아우가 실수했구먼.”

남궁현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하니 명호림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제아무리 뇌협이라 하나 남궁세가에 영입된 지 얼마 안 된 사람 아닌가. 추 단주 입장에서는 자네 가문에 뭔가를 보여 주고 싶었을 터, 수하의 의욕을 잘 다독여 주는 것도 윗사람으로서의 미덕일세.”

남궁현의 눈이 빛났다.

명호림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회합을 개최하는 가문의 노곤함을 모르지 않네. 충분히 날 서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수하를 다독이지 못한 것은 자네의 실수였네. 마땅히 모두가 보는 데서 사과해야 하지 않겠나?”

교묘한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좋은 회합 자리에서 모욕 운운하며 피를 본 것도 실수가 아니냐.

충분히 그런 얘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 연호정을 공격할 빌미는 충분했단 뜻이다.

그러나 명호림은 남궁현에게 회합 개최 가문의 대표로서 책임을 물었다.

가득상의 눈이 반짝였다.

‘이 일을 완전히 묻어 버리시겠다? 교활하구먼.’

남궁현이 책임지고 사과하면 이 사건은 끝나 버린다. 그리고 끝난 사건을 다시 들추는 것은 치졸한 짓이 된다. 바로 추성이 그랬던 것처럼.

동시에 남궁현의 의도도 묻히게 될 것이다. 명백한 잘못은 사라지고, 수하 관리를 못 한 ‘실수’만 남게 되는 것이다.

명호림은 남궁현을 꾸짖는 척하면서 사건을 봉합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어른으로서의 면모도 잘 보여 주었다.

명호림과 남궁현의 눈빛이 부딪쳤다.

‘자네, 나한테 빚 하나 진 걸세.’

‘잊지 않겠소.’

‘어서 마무리하게.’

그렇게 남궁현이 입을 열려 할 때.

“보기 좋군.”

모두의 눈이 연호정에게 닿았다.

연호정은 웃으며 남궁현을 보았다.

“그럴 녀석은 아니지만, 나도 내 ‘동생’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면 체면 집어치우고 나섰을 것이오.”

명호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체면이고 자시고 할 게 있소? 그저 남궁 아우의 잘못이 명확하니…….”

“사죄드립니다.”

명호림이 깜짝 놀라서 남궁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연무장 앞까지 온 남궁현이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추 단주에게 명을 내린 것은 접니다. 수하의 실수가 아니라, 제가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뭐, 뭐라고?!”

“이 회합을 최대한 멋지게 마무리 짓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일에 당황했고, 화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여 연 공자의 잘못이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남은 화를 연 공자에게 풀었습니다.”

좌중이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남궁현은 연호정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심지어 추성의 행동도 자신이 시킨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투명하고 반듯해야 할 개최 가문의 대표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연 공자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사건이 마무리될 참인데, 느닷없이 진실을 고백한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여 남궁현을 보았다.

남궁현이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부디 저의 잘못을…….”

동생이 저지른 일은.

“용서해 주시길.”

입을 닫아라.

예의를 다하여 사죄하는 남궁현을 보며,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싫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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