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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8화 (48/963)

48화. 바람이 불어오다 (3)

연위는 연호정을 거처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연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거우냐?”

연호정이 도끼를 들어 보였다.

“무거워서 좋습니다.”

“그럴 것 같았다.”

연호정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연위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예?”

가벼운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연위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질문이었다. 연위는 결심한 듯 물었다.

“혼인할 생각이 있느냐?”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인이요?”

“그렇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연호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구나.”

“왜 그러십니까? 좋은 혼처라도 들어왔습니까?”

“매파를 보내온 것은 아니다. 그저 네 의사를 묻고 싶었을 뿐이다.”

“당장 혼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상대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침음하던 연위가 말했다.

“모용세가는 어떠하냐?”

연호정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 모용세가요?”

“그렇다.”

“어…….”

연호정은 드물게 당황했다.

“모용세가라 하심은 누구를?”

“알아보니 이번 후기지수 회합에도 참여했더구나. 모용연화라고, 현 가주의 딸이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연화?’

모용연화.

당대 가주인 모용군의 딸로, 어린 나이임에도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가문의 대소사에 관여한다는 여걸이었다.

‘설마 모용연화를 언급하실 줄이야.’

모용연화는 과거 흑암제 시절에 수도 없이 부딪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무림맹주였던 모용군에게는 가문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주 대행을 둘 사람이 필요했다.

놀랍게도 그가 선택한 것은 아들들이 아닌 딸, 모용연화였다.

모용세가 정도 되는 거대한 가문을 맡길 정도로 모용연화의 능력은 발군이었다. 아비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녀는 고작 몇 년 새에 모용세가의 크기를 삼 할 이상 불린 수완가이기도 했다.

당연히 무공의 재능도 출중했다. 가문을 잇지 않는 딸에게까지 비전을 가르쳐 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것이다.

“그 아이의 재능이 여러모로 특출나다고 하더구나. 너도 회합에서 봤으니 알겠지만.”

“아, 예.”

“물론 재능이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내 가만히 들어 보니, 성품 역시 나무랄 데가 없다더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호정은 모용연화의 독기 가득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생의 모용연화가 아니라, 흑암제 시절의 모용연화는 그러했다.

천성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중요한 법이다.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이 바뀌는 것은 단 하나의 사건으로 충분하다.

다만 모용군이 애지중지할 정도면, 모용연화의 천성 역시 선하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의외로 연위는 아쉬움을 표하지 않았다.

“알았다. 기실, 나 역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 이유가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얼굴 한 번 못 보고 혼사를 치르는 이들이 많지만, 난 그러한 혼사에는 반대하는 편이다.”

“그렇습니까?”

“평생을 함께 살아갈 사람이다. 가문의 이름을 떨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사람의 행복을 지키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법이다.”

“…….”

“훗날 마음에 드는 처자가 생기면 그 사람의 집안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사랑하셨습니까?”

다소 짓궂은 질문이었다.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 요량으로 한 질문이기도 했다.

“내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지.”

“……!”

연호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네 어미가 죽은 날,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를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따라 죽으려고 몇 번이나 목에 검을 겨누었는지 모른다.”

“…….”

“그러나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고통일 수 있다. 이 애비는 줄곧 그런 심정으로 살아왔다. 네 어미와 함께 가기에는 내가 지은 죄가 지나치게 컸어.”

“아버지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내 사람을 지키지 못한 죄.”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버지의 죄가 아닙니다.”

연위는 아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박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마음은 누구라도 알기 힘들 테니까.

다만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난 너희에게도 죄를 지었다.”

“아버지?”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난 너를 엄하게만 대했다.”

“그것 역시 죄가 아닙니다.”

“죄다. 난 너를 내 자식이 아닌 가문을 이을 후계자로 봤었으니까.”

“…….”

“남편으로서도, 아비로서도 실격이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하루하루 가슴에 묻어 왔던, 죽기 전에야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말을 이제야 큰아들에게 할 용기가 생겼다.

연호정은 아버지가 자신을 자식이 아닌 후계자로 봤단 말을 듣고도 섭섭해하지 않았다. 그러한 속내를 고백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자신을 자식으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런 걸 고백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네 마음이 그와 같다면 이번 혼인 얘기는 없던 것으로 하마.”

“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연호정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한데 왜 모용세가입니까?”

“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칠대세가의 다른 가문이 아니라, 굳이 모용세가를 언급하신 게 의아해서 그럽니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게 말하지 않았구나.”

“무엇을요?”

“반년 전, 너와 지평이 후기지수 회합에 참여하러 갔을 때 모용세가에서 연락이 왔다.”

“연락이요?”

“함께 사업해 볼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지.”

“사업 말입니까?”

“그래. 우리는 강소성 해상 무역권의 칠 할을 쥐고 있다. 모용세가도 무역 사업에 탐을 내는 모양이더구나.”

“……!”

모용세가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고? 굳이 이 시점에?

연호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함께하실 생각이십니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두 번이나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또다시 연락을 보내 왔지. 이번이 마지막 제안인 듯하니, 심사숙고해 볼 생각이다.”

모용세가, 해상 무역.

그리고 명가의 침공.

연관성이 전혀 없는 듯하면서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과거 명가가 어떻게 몰락했는지 모른다. 다만 그 몰락이 한순간에 이뤄졌다는 것만 알 뿐. 그리고 명가가 몰락한 것은 본가가 멸문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 모용군이 무림맹주의 위(位)에 올랐다.

그렇게 모용세가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가 되었다.

‘정보가 부족해. 부족하기는 한데…….’

연호정이 다시 물었다.

“하나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설령 아버지께서 모용가와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해도, 그쪽 가문 자제와 절 혼인시킬 생각은 하지 않으실 분입니다.”

“음.”

“누가 추천해 준 것입니까?”

“태경 총관이다.”

“……!!”

연위는 아들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며 첨언했다.

“그이는 총관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본가에 득이 될 만한 일을 고민하지. 어차피 네가 거절했으니, 그이를 너무 나쁘게 보진 말아라.”

“예? 아, 예.”

혼사 때문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태경을 떠올렸다. 마흔도 채 되지 않는 나이에 어수룩한 표정, 별 존재감 없이 연가의 재정을 관리하는 그를.

‘나는 의심하고 있었다. 가문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거란 걸.’

아버지의 안목은 출중하다.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을 가문의 총관 자리에 앉힐 만큼 만만한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전 보여 주셨던 모습처럼 아버지 역시 사람이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다. 나아가 상대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속인다면, 마음먹고 파고들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아버지.”

“말하거라.”

“모용세가와의 사업 연수, 잠시 뒤로 미뤄 주십시오.”

“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알아볼 게 좀 있습니다.”

* * *

“허엇?!”

태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안하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와서.”

“헉헉! 아, 아닙니다!”

“불이 켜졌기에 들렀소. 내가 방해한 건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 여기 앉으십시오.”

의자에 앉은 연호정이 방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총관실엔 처음 와 보는 것 같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가주님과 아랫것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안 찾아와서요.”

태경은 순식간에 차를 타 왔다.

“자, 드십시오.”

“고맙소.”

차를 한 모금 마신 연호정이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업무 중이시오?”

“그렇습니다. 올해 무슨 천재지변이 일어날지 모르잖습니까? 슬슬 예산을 잡아 봐야지요.”

강소성은 해마다 수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가는 매해 수재민들에게 돈을 풀어 민생 안전을 위해 힘썼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으시오.”

“하핫, 고생이랄 게 있습니까? 안 그래도 월봉을 많이 받고 있는데, 최소한 돈값은 해야지요.”

껄껄껄 웃는 얼굴이 무척 해맑았다.

물끄러미 태경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혼사 얘기를 꺼내셨다고 들었소.”

“헛?!”

태경이 목을 움츠렸다.

“에…… 그게.”

“…….”

“……가주님께 들으셨습니까?”

“그렇소.”

태경이 헛기침을 했다.

“그, 뭐랄까요. 저는 그저 연가의 번창을 위해서 드린 말씀이긴 한데요…….”

“…….”

“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묘한 사람이었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사람에서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을 오간다.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연가의 분위기가 워낙 딱딱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연호정이 표정을 풀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소. 모용연화라는 소저, 회합에서도 본 적이 있으니까.”

“아?!”

“재녀(才女)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더이다. 오히려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소.”

태경이 당황하여 말했다.

“에,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공자님께서는 연가의 장자이십니다! 모용가의 장녀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뒤질 게 하나도 없으신 분인걸요.”

“하하, 그렇소?”

“그럼요! 절 믿으십시오.”

“믿지요. 믿고 말고요.”

연호정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한데 어쩌겠소? 내가 당장 혼인할 생각이 없는 것을.”

“아…….”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야 뭔들 못하겠소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소.”

“아하하, 어쩔 수 없지요. 대공자님께서 마음에 안 드신다면야…….”

“모용 소저가 너무 뛰어나서 말이오.”

“예?”

연호정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자세였다.

“내가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소이다. 회합에서 본 모용 소저는 지아비를 섬길 만한 여자가 아니었소. 오히려 잡아먹는다면 모를까.”

“그, 그렇습니까?”

“재주 많은 사람치고, 상대를 진심으로 위해 주는 사람 못 봤소이다.”

태경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나서서…….”

“뭐,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예?”

“모용가주님 혈육 말고, 모용세가에 다른 처자는 없소? 능력은 부족하지만 성품은 고운, 그러면서 직계인 처자 말이오.”

태경의 눈이 반짝였다.

“그 말씀은?”

“어차피 혼인이야 한 번은 해야 하오. 그럴 거면 참한 사람이 좋지 않겠소? 게다가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아버지께서도 날 달리 보지 않겠냔 말이오.”

“가, 가주님께서는 지금도 대공자님을…….”

“우리 솔직해집시다. 내가 운이 좋아 무공이 늘었지만, 아버지는 날 지난 십구 년 동안 봐 오신 분이오. 나보다는 동생을 소가주로 점찍어 놓으셨을 거란 말이오.”

태경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연호정이 은근히 말했다.

“총관께 부탁 하나 합시다.”

“……부탁이요?”

“아버지께 잘 말해 주시오. 모용연화 말고 다른 사람으로 며느리 삼아 달라고 말이오.”

“제, 제가요?!”

“아, 미색은 당연히 고와야 하오.”

“…….”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경 역시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태 총관. 총관도 한창때 아니오? 앞날이 그리 창창한데 줄을 잘 잡아야 성공하지?”

“……아, 예.”

“같이 잘살아 봅시다. 부탁 좀 하겠소.”

태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 숙인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러나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면…… 저는 대공자님만 믿겠습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래, 나만 믿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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