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1화 (51/963)

51화.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1)

‘빠져나갔는가.’

벽을 몇 번이나 두드려 봐도 대답은 없었다. 성공적으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일은 신속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거기 누구냐!”

“나요.”

“엇! 이 사람아, 간 떨어질 뻔했잖아!”

“미안하오.”

“그나저나 왜 여기 있어? 동벽 담당이잖아?”

“근무 시간이 끝났소이다. 교대하러 가오.”

“쯧, 어련히 알아서 올까.”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소.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오.”

“가끔 자네를 보면 심장이 얼마나 큰지 궁금하네. 총관이 세작으로 잡힌 판국에 긴장도 안 되나?”

“이미 잡혔잖소? 긴장할 게 뭐가 있소.”

“으이그, 이 사람아. 어디 세작이 혼자 침투하는 것 봤나? 필시 방수가 있을 거라고.”

“방수고 뭐고 모르겠고, 난 밥이나 먹어야겠소.”

“사람 참. 견장 이리 주게.”

“여기 있소.”

“조심하게. 이런 날에는 자네의 그 무던한 성격이 독이 될 수도 있어. 조용히 밥 먹고 들어가 쉬시게.”

“그 정도요?”

“눈치 없는 사람 같으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총관이야, 총관! 아까 법인각주님 못 봤어? 눈에 살기가 가득하시더구먼.”

“음…… 확실히 오늘은 몸 좀 사려야겠군.”

“이럴 때 보면 자네도 참 특이하단 말이야.”

“어쨌든 고맙소. 난 이만 가오.”

“어, 들어가서 쉬게.”

배를 부여잡고 살살 뛰어가는 나일.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던 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한 녀석이라니까. 존재감이 없어도 저렇게 없을 수가 있나. 성격이 무던해서 그런가?”

잠시 후, 나일은 식당에 들어가서 다 식은 밥에 찬거리 두어 개를 담았다. 그러고는 총총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덜컹.

나일이 숙소 문을 열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얼어붙었다.

‘……?!’

숙소는 열 명이 쓰는 공용이었다.

그런데 숙소가 텅 비어 있었다. 열 명 중 네 명이 곯아떨어졌어야 할 시간임에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때였다.

“밥이 다 식었네?”

나일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음식 잘하는 곳 아는데 같이 갈까? 보아하니 밥값은 하겠어.”

“…….”

“싫으면 별수 없고.”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더구먼. 제사 치러 줄 사람도 없을 테니, 그거 먹고 뒈지시게.”

파악!

큼직한 밥그릇이 연호정의 얼굴로 날아왔다. 동시에 나일의 신형이 번개처럼 숙소 지붕 위로 올라갔다.

“……!!”

나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사삭. 사사사사삭.

숙소 지붕 너머.

내원 건물 곳곳에서 수많은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서 있는 장소였다. 그 장소들 하나하나가 혹시 모를 사태의 퇴로(退路)로 점찍어 둔 곳이었다.

나일의 눈이 흔들렸다.

‘어, 어떻게?!’

세작이나 살수가 아니면 절대로 알 수 없는, 퇴각에 용이한 길들이었다. 실전 경험이 뛰어난 노강호들도 따로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길목이었다.

그 길목이 전부 차단당한 것이다. 나일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야심한 시간에 쥐새끼와 입씨름하고 싶진 않아. 그래서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나일이 밑을 내려다보았다.

연호정이 견봉에 도끼를 걸치고 서 있었다. 던진 밥그릇과 내용물은 땅을 구르고 있었다.

“외원 마구간에서 일하던 네놈들 연락책(連絡責)은 창응대주 검에 목이 달아났다.”

“……!!”

“내려와.”

연락책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나일은 어이가 없었다. 어지간한 조직에서도 세작 둘에 연락책까지 쓰는 경우는 없었다.

연락책을 키우는 것 자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뿐더러, 어설프게 침투시켰다가 걸린 사례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가에 심어 둔 연락책은 달랐다.

그는 이 방면에서 초일류 소리를 듣는 전문가였다. 애초에 연락책이란 존재 자체가 위험을 감수할 일이 적기에 세작보다도 잡기가 어려웠다.

연락책의 존재를 아는 것도 신기한데, 그놈이 마구간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스륵. 후웅.

나일이 땅으로 내려왔다.

가벼운 발걸음, 두 발이 땅에 닿았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기가 막힌 신법이었다.

“누구냐?”

“연호정.”

나일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알고 싶었다.

“누가 연락책의 존재를 알려 주었지?”

“내가.”

“네놈이?”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화초처럼 자란 네놈이 세작 침투와 살수행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이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내가 컸던 온실을 보면 그런 말 못 할 것이다.”

세작 침투? 암살? 연락책? 그런 건 흑도에서 일상다반사였다

정의보다는 비열함을, 진실보다는 거짓을 좋아하는 흑도는 속이는 게 순간이요, 죽이는 게 일상이었다. 무공은 나일보다 떨어질지언정 실력은 그보다 몇 배나 뛰어난 자들이 수두룩하단 말이다.

그런 속고 속이는 미친 전장을 휘어잡아 통합한 게 바로 연호정이었다.

존재 여부만 파악하면, 세작이나 연락책을 잡아내는 건 파리 때려잡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나일의 눈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 설마 네놈이 음신(陰神)이라도 된단 말이냐?!”

“요새 유행하는 신종 모욕 방법이냐? 어디 그 음침한 놈을 갖다 대?”

쿵!

창대 끝이 땅을 찍었다. 일대가 뒤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울림이었다.

“꿇어.”

츠츠츠.

나일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일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건 안 되겠지?”

터어엉!

나일이 달려들었다.

세작이나 살수들은 업종 특성상 대다수가 경신술의 대가들이다. 일반 무림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공을 익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일의 움직임은 빨랐다. 회귀한 후 보았던 어떤 고수들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투웅!

턱을 노린 반권(半拳)이 헛방을 쳤다.

막은 것이 아니라 흘려 냈다. 나일은 상대의 대응에 비로소 확신했다.

‘이놈은 전문가다!’

체술을 익힌 세작의 공격은 절대 그냥 막아선 안 된다. 체외로 풍기지 않는 독기(毒氣)를 손톱 끝에 항상 발라 두기 때문이다.

파파파팡!

나일의 공격이 이어졌다.

연호정과 같은 일격필살의 무공이 아니었다. 어차피 손톱에 한 번만 긁히면 전투 불능 상태가 되니, 체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나일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극한의 지구력이 필요한 연환 공격이었다. 한번 몰아치면 공세를 역전하기 힘든 최고급 암살 무공인 것이다.

그 업계 최고급의 무공을, 연호정은 너무나도 쉽게 파훼하고 있었다.

파파파!

‘이럴 수가.’

빠르고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끊김이 없는 암권(暗拳) 살초들이 모조리 헛방을 쳤다.

‘어떻게!!’

연호정의 대응은 간결하다 못해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성의 없는 손짓에 음험한 살초들이 전부 틀어졌다.

워낙 이런 쪽 무공에 정통하다 보니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를 다 알고 있다. 모르면 모를까, 아는 이상 막지 못한다면 흑암제가 아니다.

‘빌어먹을.’

나일은 절망감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상대를 쓰러트린 후, 인질로 잡고 이곳을 탈출하려 하였다. 한데 쓰러트리기는커녕 일격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사면초가의 상황. 인질을 잡으려 해도 통하지 않는 고수에게 덤벼들었으니 와중 최악의 선택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마음이 꺾인 자, 구사하는 무공도 흔들린다. 나일의 암권이 특유의 날카로움을 점점 잃어 갔다.

후욱!

연호정이 길쭉한 다리로 나일의 하단을 노렸다. 마음이 꺾였든 그렇지 않든, 막기 힘든 각법이었다.

빠각!

“크윽!”

나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른쪽 무릎이 안쪽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부러진 것이다.

“역시 어설퍼.”

나일이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이 양손으로 도끼를 크게 들어 올렸다.

“독단도 물리지 않고 보내? 뭔 자신감이야.”

콰아앙!

“크아악!”

무식하게 큰 도끼질 한 방에 다리가 날아갔다. 비명을 지른 나일은 몇 차례나 부르르 떨더니 기절해 버렸다.

연호정이 서늘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월광이 맑았다.

“이쪽은 끝났습니다, 아버지.”

* * *

“헉헉!”

거친 숲을 달리는 태경의 몸은 땀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내공을 익히긴 했지만, 무공을 연마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뜀박질은 빨랐다.

‘빨리, 더 빨리!’

한번 독방에 갇혔으니, 다시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불확실성에 도박을 걸기에는 지나온 생이 너무나 거칠었다. 적어도 강소성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최소한 첫 번째 안가(安家)라도 들러야 한다!’

다행히도 그는 일대 지형에 빠삭했다. 지형도 외우지 않고 파견되는 세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야트막한 산의 정상이 코앞이었다. 이 산만 넘으면 관도 옆 초림이 나온다. 초림에는 모용세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지은 안가가 있었다.

“헉헉!”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오르막길보다는 훨씬 속도가 붙을 것이다.

숨을 몰아쉬던 태경이 다시 달리기 시작하려던 때였다.

“고작 그건가?”

투둑!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태경이 밟은 나뭇가지였다.

땀으로 젖은 태경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고작 그런 꼴을 보이려고, 이 나를 속인 채 십 년 가까이 암약해 있었던가?”

태경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박.

큼직한 나무 옆으로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 요대 좌측에는 별다른 세공이 들어가지 않은 평범한 장검을 찼다.

그러나 검은 평범했을지언정 그의 눈빛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무심함의 극치. 냉혹함의 절정.

“……가주님.”

“그래도 가주라 불러 주기는 하는가?”

태경은 눈을 감았다.

‘끝났구나.’

연위는 칠대세가의 가주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무공의 소유자다. 강호에 드문 초절정고수의 손에서 벗어날 방법이 태경에겐 전무했다.

태경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시린 달빛을 받아 빛나는 연위의 두 눈은 공포 그 자체였다. 맹수의 눈도 저렇게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는 그저…….”

“그저?”

“그저, 천하에 이르고 싶었을 뿐이오.”

“그런 추잡스러운 짓거리로 말인가?”

태경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천하에 이르는 데에 방법이 무슨 상관이오! 모두가 당신 같지는 않소이다! 연가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고 자란 당신은 결코 날 이해할 수 없소!”

“내가 자네를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태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날 보내 주시오.”

“그럴 순 없네.”

“나, 나만 세작으로 들어간 게 아니오! 연가에는 나 말고도……!”

“뇌옥 경비병 나일, 마구간의 장학.”

“……!!”

“그 외에 또 있던가?”

“그걸 어떻게……?!”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는 내 아들을 너무 우습게 봤네.”

그제야 태경은 깨달았다. 연호정이 자신에게 끝까지 거짓말을 했음을.

뇌옥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속였다는 걸 깨달았다.

“유언은 있나?”

“이…… 그 개 같은 놈이!!”

서걱!

태경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연위가 차가운 눈으로 떨어진 태경의 목을 노려보았다.

“유언의 유무를 물었지, 내 아들을 모욕하라 한 적은 없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