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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2화 (52/963)

52화.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2)

번쩍!

한 줄기 푸른 광채가 절벽에 스며들었다.

스스스.

푸른빛에 맞은 절벽에 일 장 길이의 검흔(劍痕)이 생겨났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극상의 검기(劍氣)로 내쳤음에도 절삭음이나 굉음 없이 검흔만 새겨 놓았다.

그만큼 검기의 절단력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파괴 성질이 있는 경력(勁力)을 극한까지 압축하니, 절단상 외에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는다.

어지간한 고수의 검력(劍力)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평생을 검에 매진해도 넘보기 힘든 놀라운 무공이었다.

“음.”

절벽에 새겨진 검흔을 본 초로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이번에는 될 것 같더니만.”

스르릉.

검이 칼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초로인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나이는 오십 줄에 들어선 것 같은데 드러난 상체는 굉장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전혀 둔해 보이지 않는 상체 근육은 극한까지 압축되어 차돌을 보는 듯했다.

“후우, 당분간은 검에 매진해야겠군. 고작 일 장이라니, 한참 멀었어.”

그때,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초라해지는데요?”

“왔느냐?”

모용연화가 절벽을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굉장하세요. 이 먼 거리에서 저 정도 검흔이라니. 저는 언제쯤 흉내라도 내 볼까요.”

“허허, 과욕도 그런 과욕이 없구나. 네 연배에 그만한 무공을 연성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애비 때를 생각하면, 너는 천재라는 말을 들어도 부족하지 않으니라.”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제 나이 때는 이미 삭풍검(朔風劍)을 대성했었다고 들었어요.”

“무공을 대성하는 것과 구현하는 것은 별개지. 무공의 성취는 내가 높았을지언정, 너만큼 자연스레 구현하는 능력은 없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모용연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부심이야 항상 느끼고 있어요. 다만 욕심은 과하면 과할수록 좋다고 봐요.”

“틀린 말은 아니다만, 자칫 욕심에 잡아먹히면 퇴보할 수도 있다.”

“제가 그 정도로 못나진 않았어요, 아버지.”

“암, 누구 딸인데.”

초로인, 모용군이 껄껄껄 웃었다.

모용연화는 마주 웃으며 품에서 서찰을 꺼내 들었다.

“기쁜 소식이 왔어요.”

모용군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붉은 서찰이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서찰을 받아 펼친 모용군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명가가 성공했다고 하네요?”

“그렇구나.”

“무공의 본류를 찾았으니, 수명 문제도 해결이 될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명가의 무공은 강하다. 본가의 무공에 견주어도 별 부족함이 없어.”

모용연화가 절벽을 바라보았다.

“저 무상(無上)의 검력에 비할 만한가요?”

“그 역시 알 수 없지. 다만, 전에 명가주와 가볍게 손속을 나눠 본 적이 있었지.”

“어? 그건 못 들었는데요?”

“생사결도 아니고, 서로 실력만 확인했다. 여기저기 떠들어 댈 정도는 아니야.”

모용연화의 눈이 빛났다.

가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람이 자신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전부 알려 주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친딸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 몇몇 있다.

그래서 그녀는 모용군을 존경했다. 세가의 정점에 서고도 철저하게 주변을 경계하는 신중함과 날카로움을 본받고 싶었다.

“어땠나요? 명가주의 무공은.”

“대단했다.”

“아버지께서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되잖아요.”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칠대세가 가주 중 만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대외적으로는 명가주와 연가주의 무공이 수위를 다툰다고 하지만, 그 역시 실제로 붙어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아버지처럼, 다른 가주들도 힘을 숨기고 있을 거란 말씀인가요?”

“당연하다. 명가와 연가, 신생 두 가문과는 달리 전통 있는 다섯 가문은 절대 자신의 힘을 다 드러내지 않는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하나, 그것을 감안해도 명가주의 무공은 굉장했다. 본류의 무공을 찾는다면, 본가의 비학(秘學)에 뒤지지 않을 거라 예상한다.”

“굉장하네요.”

“괜히 천하제일가라는 이름을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게 아니지.”

모용연화가 싱긋 웃었다.

“아쉽게 됐네요. 이젠 그 호칭을 못 쓸 테니.”

모용군이 서찰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강조라도 하듯, 세필(細筆)임에도 다른 내용보다 글씨가 굵었다.

“쯧쯧, 명가주. 조상의 무공을 찾는 것까지는 좋았다만, 욕심이 너무 과했소이다. 죄도 없는 인부 수백 명을 죽이고서 어찌 뻔뻔하게 천하제일이라 하겠소?”

놀랍게도 모용군은 명가가 한 짓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모용군이 가주가 된 날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암계였다. 그는 명가만이 아니라 칠대세가에 속한 가문 전체에 ‘눈’을 심어 두었다.

그중 몇몇 가문에는 전문 세작까지 침투시켜, 그 가문 내에 비밀 통로나 안가(安家)까지도 만들어 놓았다. 대표적으로 연가가 있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했고, 믿을 만한 자를 준비해야 했다. 제아무리 모용군이라도 십수 년 만에 준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 거사(巨事)는 전대 가주인 아버지와 함께 벌인 일이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 너의 조부님께 나의 능력을 증명했다. 내 형제들을 쳐 내면서까지.”

“알고 있어요, 아버지.”

“너 역시 내게 지닌바 능력을 증명하는 중이다. 네가 자신이 있을 때, 이 애비에게 네가 그린 판을 가져오거라. 만족할 만한 계획이라면 내 너에게 가문을 맡길 것이다.”

모용연화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착착 준비 중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허허허.”

모용군은 딸의 배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들들의 재능도 범상치 않았지만, 놈들은 선(線)을 넘으려 들지 않았다.

그가 딸을 총애하는 이유였다. 자신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모용연화는, 필요하다면 혈육조차 베어 버릴 냉혈철심(冷血鐵心)의 소유자였다.

신기(神技)에 이른 두뇌보다 훨씬 중요한 재능. 그것은 바로 냉혹함이었다.

“그나저나 연가에서는 따로 연락이 없었더냐?”

“네. 아직은요.”

모용군이 혀를 찼다.

“참으로 답답한 위인이로다. 파도마저 가를 만큼 단호한 검법으로 유명하다는 자가, 이런 부분에선 영 소심하군.”

“아무래도 성향 자체가 모험을 싫어하는 사람 같아요.”

“그렇기도 할 것이다. 연가주는 젊었을 적에도 세력 확장에는 관심이 없었어.”

“게다가 이번만큼은 더 신중할 겁니다. 세 번이나 사업 제안을 받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요. 필경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가문의 명맥이나마 유지하려면 순순히 동의하는 게 좋을 터인데.”

그때였다.

저 멀리서 흑색 무복에 복면까지 찬 무사 하나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스륵.

모용군 앞에서 무릎을 꿇은 무사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님.”

“자네가 어쩐 일로 이 시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어떤 문제?”

“연가 쪽에 심어 놓은 연락책에게서 닷새째 연락이 없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서늘해졌다.

연락책은 하루 한 번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필수였다. 일이 터져도 어지간하면 사흘을 넘기지 않는다.

닷새째 연락이 없다는 건, 연락책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설마 연가에서 알아챈 것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태경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십 년 가까이 가문에 뿌리를 내린 총관을 의심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문제는 진짜 세작과 연락책이었다. 운이 나빠 태경이 걸릴지라도, 나일과 장학은 발각되어선 안 된다. 애초에 진짜는 그 둘이었다. 태경은 나일과 장학을 완전히 심어 놓기 위한 포장에 불과했다.

“정확한 것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그들의 정보 거래처인 통천단을 건드려 보는 중입니다.”

“신속하게 알아보도록 하라.”

“예.”

모용연화가 아미를 찌푸렸다.

“무슨 일일까요? 장학은 초일류 연락책이에요. 결코 실수할 사람이 아니죠.”

“사람인 이상 실수를 안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외부 요인 때문이냐, 아니면 그 외의 문제냐를 따져 봐야겠지.”

모용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니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물론 그래야지. 혹시라도 진정 연가가 세작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면, 잡소리가 나기 전에 묻어 버려야 할 텐데.”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 벌써 칼을 뽑아야 하는가.”

* * *

“……까지, 총 일곱 군데입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망설이던 이백현(李柏絃)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 역시, 타 가문처럼 전체를 요새화(要塞化)해야 할 것 같습니다.”

칠대세가에 꼽힌 역사가 짧을 뿐, 가문 자체의 역사는 백오십 년을 넘겼다.

하지만 현재 연가의 건각들은 망가진 몇 곳을 제외하면 선조들이 썼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져갈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으니 굳이 새로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그는 건물에 별 미련이 없었다. 전대 가주, 아버지께서 고집을 부리셨기에 놔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별수 없었다.

“편 노인을 부르게.”

“편일강 신공(神工) 말씀입니까?”

“그렇네.”

이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 신공의 실력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마는…… 그분은 토목이나 기관진식이 아닌 대장장이가 아닙니까?”

연위가 이백현을 바라보았다.

이백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바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편 노인은.”

“예?”

“편 노인은, 기관진식의 대가(大家)들과 친분이 깊네.”

“아!”

“모시고 오게.”

“예, 예! 알겠습니다.”

이백현이 가주실을 나섰다.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는 연위의 뒷모습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외로워 보였다.

연지평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답답해하고 계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충격이 컸다. 태경 총관은 그에게도 잘해 주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아버지만큼 힘들진 않을 것이다. 사람으로서, 가문의 수장으로서 큰 충격을 받으셨을 것이다.

“아버…….”

“하면, 마무리하고 일어나 보겠습니다.”

연지평이 깜짝 놀라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위가 몸을 돌렸다.

“가는 것이냐?”

“예.”

연지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다니요? 형님, 어디 가세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중원 나들이.”

“예에?!”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연위가 물었다.

“목적지는 따로 정해 두지 않은 것이냐?”

“바로 그걸 아버지와 상담해 보려 합니다.”

“음?”

연호정이 탁자 위에 있는 서신을 들었다.

“우리야 세작을 잡았으니 한숨 돌렸지만, 저쪽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필시 당황하고 있겠지요.”

“물론 그렇겠지.”

“그렇다면 그들이 후속 조치를 어떻게 취할지를 봐야 합니다.”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세가의 그림자는 전부 지웠다. 그들이 이쪽 사정을 파악하기란 힘들 테니, 아마 통천단을 통해 알아보려 할 것이다.”

정확한 안목이었다.

연호정은 거짓이 판을 치는 곳에서 온갖 아수라장을 겪은 남자다. 그러나 연위는 그러한 경험이 없이도 적이 어떻게 나올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타고난 지혜와 능력은 어디로 가지 않는 법. 연호정은 한결 마음의 짐을 덜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을 공론화해 봤자 피해 보는 건 본인들이니, 조심스레 접근할 수밖에 없겠지요.”

“문제는 그 이후다. 이쪽 상황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연위는 모용군과 친분이 거의 없었다. 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상대를 알아야 수법을 유추할 수 있는 법. 타인과의 친분을 쌓아 두지 않은 것이 연위의 약점이었다.

“즉,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모른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렇지.”

“와중에 적의 일차 행동은 예측할 수 있고요.”

“그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하나입니다.”

연위와 연지평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적의 눈을 흐리게 만든 후, 예측하지 못한 지점에서 공습을 가하면 됩니다.”

“……?!”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가야 할 곳도 정해진 셈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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