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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5화 (55/963)

55화.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5)

“가주님. 대공자에게 서신이 왔습니다.”

“주게.”

서신을 받아 펼친 연위가 눈을 빛냈다.

‘빠르구나.’

벌써 하남에 도달했단다. 말을 타고 넘어갔다고 해도 굉장한 속도였다. 아마 몇 번이나 말을 갈았을 것이다.

‘모용세가를 다급하게 만들려는 것이군.’

연위는 연호정이 의도한 바를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새삼 아들의 행동력에 놀라게 된다. 자신은 가주가 되어 무수히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아들은 그런 적이 없지 않은가.

신속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든다. 당황한 상대는 생각지도 못한 빈틈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그 빈틈을 공략하는 순간 적의 무장은 해제된다.

구를 대로 굴러 본 노강호의 방식이었다. 연위조차 이런 대응 방법은 즉각 떠올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번 세작을 잡을 때도 직접 적진에 파고들어 상대를 농락해 진실을 드러내게 했다.

대담한 방식이었다. 지혜로운 추진력이었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아비로서 걱정은 되었지만, 무인으로선 감탄할 수밖에 없는 대응이었다.

‘어찌 되었든, 호정이 이렇게 움직였으니 모용세가도 어떻게든 접선하려 하겠군. 하지만 거리가 있으니 믿을 만한 아군의 보조를 얻을 확률이 높아.’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떠나기 전,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무조건 명가입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가 있느냐? 기실, 모용세가와 손을 잡을 만한 세력은 널리고 널렸다. 굳이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가문과 연수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명가입니다. 명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리 생각하는지 이유를 묻고 있잖느냐.’

‘……확답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번 하남행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모용세가와 손을 잡은 곳이 어디인지.’

지금도 의문이었다. 왜 모용세가가 명가와 손을 잡았다고 생각할까?

연위 역시 모용세가가 단독으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하지만 손을 잡은 조직이 반드시 명가일 필요도 없다.

‘…….’

그러나, 아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그는 연호정의 뛰어난 안목과 판단력을 믿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위가 이백현을 불렀다.

“철곤개 지부장에게 연락하게. 연락해서, 강소성과 절강성 인근에 명가와 연관이 있는 문파나 조직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깍지를 낀 채 생각에 잠긴 연위.

그의 눈에 선명한 예기가 감돌았다.

“……만약 정말로 명가와 연관이 있다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가주지검(家主之劍)을 뽑을 것이다.

* * *

청년이 연호정을 안내한 곳은 인적이 드문 숲속이었다.

석양이 지는 시간에 숲으로 인도한다. 상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아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호정의 표정은 무심함 그 자체였다.

공포나 불안, 의심의 빛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긴장도, 흥분도 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저 담담하고도 담담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기엔 그러했다.

젊은 청년, 명도(明導)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은 긴장도 안 하나?’

천하제일가, 구주명가에서 보자고 했다. 제아무리 벽산연가의 대공자라 해도 긴장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한데 이놈에겐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그건 뭐지?”

“뭐가?”

“도끼 말이야.”

“내 무기다.”

명도는 기가 차서 말했다.

“그 큰 도끼를 무기로 쓴다고? 검이 아니라?”

“그래.”

벽산연가의 주무공은 검이었다.

그 검학(劍學)이 얼마나 뛰어나면 이런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무당(武當)의 검보다 부드럽지도, 화산(華山)의 검보다 정교하지도 않다. 남궁(南宮)의 검만큼 장중하지도 않고, 모용(慕容)의 검만큼 격렬하지도 않다. 그래도 연가의 검은 강하다. 그 정직함은 정통 중의 정통이라, 어떤 의미론 가장 백도 무공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연가가 칠대세가로 꼽힌 지 오십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만큼 큰 명성을 얻은 건, 단순히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검학은 능히 중원을 대표할 만했다.

그런 놀라운 검법을 갖고도 칠가 중 세력은 가장 작았다. 군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법, 무림인들이 찬사를 보내는 이유였다.

“대공자인데도 도끼를 무기로 쓴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명도가 더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말투 좀 고치지 그러나?”

“그러는 그쪽 말투는 예의가 가득하다고 생각하나?”

“…….”

하긴, 초면에 시간을 내라 마라 했으니 이쪽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명도는 솔직하게 불쾌감을 드러냈다.

명가는 천하제일가다. 칠대세가의 하나로 꼽히지만, 다른 육대세가와는 수준이 다르다.

무림에서는 힘이 곧 권력이요, 명성이 곧 지위가 된다.

말하자면 구주명가는 무림 최상층 귀족이나 다름이 없다. 소림이라면 모를까, 세력도 작은 연가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가문이 아닌 것이다.

‘한참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라 이건가?’

그는 내심 연호정을 비웃었다.

후기지수 회합 때 아주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고 들었다.

목이 뻣뻣해질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부견자 소리를 들으며 세간에 비웃음을 듣던 놈이 광풍사라는 그럴듯한 별호도 얻지 않았는가.

‘많이 즐겨라.’

두각을 나타내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고수가 어디 한둘인가. 명도는 연호정이라고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각이 넘도록 걷자 모닥불 빛이 보였다.

명도가 턱으로 모닥불 쪽을 가리켰다.

“가 봐라. 널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신다.”

“그러지.”

“그건 내려놓고.”

명도가 도끼를 가리켰다.

피식 웃은 연호정이 대꾸도 없이 모닥불 쪽으로 향했다.

명도의 눈이 차가워졌다.

“건방을 받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당장 내려놓도록.”

연호정은 여전히 말없이 걸었다.

명도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감히……!”

그때였다.

“놔둬.”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당장 손을 쓰려던 명도가 움찔했다. 거역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결국 그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연호정의 등을 노려봐야만 했다.

연호정은 명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잡어(雜魚)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방금 들려온 음성을 떠올렸다.

‘상당하군.’

목소리에 실린 내공은 흔치 않은 깊이를 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절정고수의 내공이라 봐도 무방하다.

‘제법 끌고 왔어.’

게다가 느껴지는 인기척도 한둘이 아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못해도 스물은 되는 것 같았다.

그의 기감은 정확했다.

“엄청나게 큰 도끼네? 무게도 굉장할 것 같은데, 그걸 용케 들고 다니는군.”

모닥불 근처로 가자, 이십여 명의 무사들을 세워 둔 채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인이었다. 명도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여인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누군데?”

“오? 신선한 반응. 성격이 거칠다고 하더니만, 역시 그러네?”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명온지(明溫池)라 해. 들어 본 적 없지?”

“없다.”

“호호! 사람 무안하게. 보통은 말이라도 들어 봤다고들 하지 않아?”

쿵!

도끼를 놓고 그 위에 손을 올린 채 나무에 기댄 연호정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 불렀으면 부른 이유나 말해 봐.”

명온지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보통 성격은 아니군.’

거칠든 소심하든, 혹은 타인에게 무심하든 경계심이 많든.

어떤 성격의 사람이라도 문제는 없다. 진짜 문제는 상대의 성격을 모를 때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연호정이란 청년은 보통이 아니었다. 말투는 거칠지만 어떤 성격인지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같이 왔던 후개는 어디로 갔대? 애들 풀어서 주루 확인해 보니깐 사라졌다고 하던데?”

그 잠깐 새에 주루를 뒤졌다는 얘기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멋대로인 양반이라 나도 모르지. 그래서 용건은?”

“오호, 그렇구나.”

명온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혼자면서 잘도 왔네?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나 봐?”

“귀찮게 하는 놈들이 워낙에 많은 인생이라서. 이번에도 그런 날파리 놈들이겠구나, 싶어서 왔지.”

“날파리면 치우게?”

“날파리인가?”

도발적인 어조였다.

명온지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그 뒤에 선 무사들의 눈빛은 바뀌었다.

살기는 흘리지 않는다. 그러나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죽일 기세였다.

상대가 벽산연가의 장자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배짱이 두둑하네? 우리가 명가에서 왔다는 거, 명도한테 듣지 않았어?”

“벌레보다도 못한 머저리가 되는 데에 명가든 뭐든 무슨 상관이야?”

“허어.”

이 정도가 되면 명온지도 가만히 참고 들어 주기 힘들다.

“자꾸 그렇게 삐딱하게 나오면 못써. 용건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다치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빨리빨리 말하란 말이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혹시 이해력이 딸리나?”

명온지의 눈이 서늘해졌다.

제아무리 명가의 첩보 조직인 암사대(暗死隊)의 대주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녀는 보이는 것과 달리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였다. 하지만 첩보대의 대장을 맡을 만한 연배가 아니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대단한 것이다. 그 나이에 첩보 조직의 수장이 되려면 출중한 능력과 재능이 바탕이 되어야 하니까.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역시 그녀의 멋진 능력이었다. 한데 이 버릇없는 놈이 그것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어. 재미있는 친구야.”

명온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 낭비하는 건 안 좋아한단 말이지? 좋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

“연가는 요새 어때? 별문제 없이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나?”

연호정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본론을 말한다면서 연가에 관해 묻는다. 모용세가에게 전부 들었으면서.

소위 첩보 조직에 몸을 담고 있거나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의 화법이 이렇다. 본론에 들어간다면서도 슬쩍 상대를 떠본다.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명온지의 표정, 어조, 말투는 철저하게 훈련받은, 나쁘게 말하자면 전형적인 첩보 조직원의 화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난리가 났지.”

“어엇? 무슨 일 있니?”

“별 멍청한 가문에서 세작 몇을 심어 놔서 말이야. 그거 다 뽑아내고 정리 좀 하느라 등허리가 쑤실 지경이란 말이지.”

명온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은근슬쩍 물어보려고 했는데 대놓고 다 말해 준다. 이런 걸 알려 줄 성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더 놀라웠다.

“그런 걸 우리에게……?”

“그리고.”

스스스슥.

연호정이 도끼날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 멍청한 가문과 함께 본가를 날름 삼키려 들려는 승냥이들도 있었지, 아마?”

“……?!”

모닥불 빛을 받아서 그런 걸까.

명온지의 눈빛이 유독 일렁이는 듯했다.

“생각해 보니 묘하지? 지금 제일 다급한 놈들은 모용세가인데, 그놈들보다 너희가 먼저 날 찾아왔네? 모용세가가 선수를 뺏길 만큼 능력 없는 밥버러지는 아닌데.”

“그건…….”

“천하제일이란 간판, 참 구질구질하게도 땄다. 그치?”

우우웅.

도끼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올라왔다.

“쉽게 땄으니 쪼개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것 같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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