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싸움의 명분 (3)
가득상이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가 질린 눈으로 연호정의 등을 바라보았다.
“후욱. 후욱.”
숨소리가 격했다. 상체가 연신 들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후우우.”
호흡을 고르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랐다.
드러난 목과 팔뚝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병을 한계까지 써서 전신 근육이 과열된 것이다.
우우웅.
은은한 담청색 기운이 연호정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벽라진결이었다.
가득상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죽였소?”
쩍!
연호정이 도끼를 빼 들어 견봉에 걸쳤다.
“그럴 리가.”
어느새 살기를 갈무리한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졌다.
가득상은 서둘러 명온지에게로 다가갔다.
“학…… 학…….”
명온지의 상태는 그야말로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상반신 전체에 도끼로 인한 참상(斬傷)이 가득했다. 상처의 깊이를 보니 갈비뼈 대여섯 개는 족히 부러졌겠다.
오른팔은 팔꿈치부터 날아갔고, 얼굴 여기저기에도 도끼의 경풍(勁風)에 베인 상처가 났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은, 극심한 공포로 얼이 빠져 있었다.
‘지독하다.’
사람을 이렇게 만들 바에야 죽이는 게 낫겠다. 아마 명온지는 몸은 회복해도 정신은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출혈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특수한 무공을 익힌 모양이었다.
“걸레짝을 만들어 놓으셨구려.”
연호정이 무심하게 물었다.
“놈들은?”
“다 잡았소.”
“다행이군.”
“다행이지. 일단은.”
굳은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가득상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는 건 알겠지만,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소. 진짜 죽일 뻔했잖소?”
“안 죽였잖소?”
그거면 된 거 아니냐.
가득상은 할 말을 잃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모용세가도 그렇고 명가도 그렇고, 자신의 가문을 풍비박산 내려는 이들이었다. 연호정 입장에선 명백한 적이란 말이다.
기실, 그 성격에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만했다.
“한 놈은 어쩔 수 없었소.”
“엉? 그게 무슨 말이오?”
“한 놈은 죽었소.”
“……!”
기어코 사고를 치고야 말았군.
가득상은 따질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일을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은 옮깁시다. 제길! 혹시 몰라서 의원도 불렀는데, 돈 왕창 깨지게 생겼구먼.”
가득상은 임시로 작은 장원을 마련했다. 그리고 사로잡은 암사대원들을 몽땅 그곳에 결박해 두었다.
명온지를 옮기는 걸 본 연호정은 장원과 가까운 숲 입구로 와서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두근두근.
거세졌던 심박이 가라앉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명온지의 무공을 보고 치솟은 분노 역시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 외적으로 머리는 차가워졌다.
‘본격적이로군.’
명온지는 명가 첩보 조직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조직의 수장이라도 첩보는 첩보일 뿐이었다. 명씨이니 명가의 핏줄이겠지만, 직계 혈통을 첩보 조직으로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명온지는 가주의 자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사검(死劍)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사검이나 그년이나 결국 쓰다 버릴 장기의 말에 불과할 터. 그렇다면 일단 실험 삼아 익히게 만든 거라 보면 되겠군.’
정확한 판단이었다.
백도 무림의 생리를 알아서가 아니라, 욕심 많은 권력자들의 생태를 알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권력자들의 욕심은 흑백을 가리지 않는다.
그 말인즉.
‘준비 중이군.’
명가는 연가를 공격할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번 생에선 모용세가의 세작들을 모조리 뽑아냈다. 그렇다면 모용세가 측에선 세상이 알기 전에 연가를 묻어 버리려 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강소성의 정보가 통제되었고, 자신이 하남에 나타났다.
그리고 명가의 첩보 조직 하나를 통째로 사로잡았다.
“더 모아야지.”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가득상이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큰일을 하나 치렀으니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고생은 했소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소. 소문 하나로 명가를 제지하기엔 상대가 너무 강해.”
“후개 생각은 어떻소?”
가득상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글쎄. 아마 늦어도 닷새 안쪽으로 알아차릴 것이오. 자기들 앞마당인 것까지 생각하면 대충 사흘 정도의 시간이 있을 거요.”
“그렇겠지.”
“안 그래도 연락을 받았는데, 연가주께서 개방에 조사를 부탁하셨소. 강소와 절강 일대에 명가와 관련된 조직이 있는지.”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 지역에 아무런 기반도 없이 연가를 무너트리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무너트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 그곳에 자리를 잡는 것도 중요하다.
분명 강소에 명가를 따르는 세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늦어.”
“그렇소. 조사하는 데에만 한 달은 걸릴 것이오. 그것도 최소로 잡은 거요.”
잠시 고민하던 가득상이 물었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건 어떻소?”
“무엇을?”
“사부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오. 그렇다면 사부님께 부탁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가득상의 사부라고 한다면, 당대 용두방주를 뜻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당장 터트릴 생각은 없었잖소? 명가 측도 함부로 우릴 도발할 수 없을 테니, 저들의 악행을 알음알음 조사해서 터트리자고 사전에 얘기했소.”
“그랬었지.”
“기실, 상구에 도착한 날부터 명가와 관련된 사업체, 정보단 등을 탈탈 털어 봤지만 아직 쓸 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소.”
“얼마나 걸릴 것 같소?”
“모르겠소. 근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난번에 조사했을 때와는 다르더이다. 철통같이 정보를 억제하더군.”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사부님께 나서 달라 부탁드리려 하오. 반쯤 강호를 떠난 분이고, 슬슬 방주 이양을 준비 중이시지만 이번 일에 나서 달라 하면 거절하지 않으실 분이오.”
그럴 것이다. 개방의 협의는 소림사의 자비만큼이나 유명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가?’
가득상의 사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방주라는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그게 문제지.’
‘훌륭’이라는 수식어가 마음에 걸렸다. 백도 무림에서 훌륭하다는 칭찬은, 다른 말로 하자면 과격하지 않다는 뜻과도 상통한다.
이번 일은 그런 식으로 처리해선 안 된다.
공격적으로, 상대가 두 번 다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확실하게 처리해야만 한다.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불쑥 물었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어떻소?”
“응? 뭐가?”
“구주명가와 모용세가.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너트리기 힘들 것 같냔 말이오.”
가득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요?”
“말해 보시오.”
“흠, 호랑이와 사자 둘 중 누가 상대하기 어렵냐고 한들…….”
“그렇다면 둘 중 누가 더 위태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느냐를 생각해 보면 되겠군.”
“거참.”
투덜거리면서도 가득상은 생각에 잠겼다. 그간 봐 온 연호정은 쓸데없이 이런 질문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둘 중 누가 더 무너트리기 힘드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가득상.
이내 그가 답을 내놓았다.
“그냥 내 생각에는…….”
“후개 생각에는?”
“음, 아무래도 모용세가이지 싶소.”
뜻밖의 말이었다. 구주명가는 세력 면에서 모용세가를 웃돌고 있는데도 모용세가가 더 쓰러트리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유는?”
“역사, 그리고 여론이오.”
“나도 같은 생각이오.”
구주명가는 삼백 년 전 혈교지란 때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공을 세웠다 하여 가문이 크게 성장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세력을 형성했고, 무학의 수준 역시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딱 거기까지가 이백 년이었다. 이후, 구주명가는 중원을 대표하는 무림세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 역사가 백 년이었다.
“연가와 명가는 다른 오대세가에 비해 역사가 짧소. 역사란 곧 기반이오. 세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역사가 짧은 세력은 상대적으로 위험에 더 취약하기 마련이오.”
“맞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상대하기는 구주명가가 더 쉽소. 게다가 구주명가에 대한 소문도 썩 좋은 편이 아니고.”
구주명가는 끊임없이 세력 확장을 꾀했다.
무림 문파이니 세력을 키우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들은 정도를 넘어섰다. 게다가 그들은 흑도가 아닌 백도였다.
백도 무림이 보기에 명가의 세력 확장은 지나치게 세속적인 행보였다.
소림사에 크게 뒤지지 않는 세력을 갖고도, 칠대세가 중 가장 안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명가였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당장 명가와 모용가를 한꺼번에 무너트리는 것은 무리다.’
당연하다. 그것은 그가 흑암제 시절의 무위를 되찾아도 어렵다. 흑제성이란 기반을 갖추고 있다면 또 모를까.
‘게다가…….’
설령 방법이 있다 한들, 미래를 위한다면 둘을 동시에 묻어 버리는 건 악수다.
‘삼교!’
그렇다.
광신삼교(狂信三敎)는 언젠가 중원을 침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막기 위해선 모용우라는 걸출한 지배자가 필요하다.
물론 모용우와 손을 잡고 난 이후에도 모용세가를 봐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다만 모용우와 만나지도 않은 지금, 방법이 있어도 모용세가를 날려 버리는 것은 악수가 될 것이다.
‘삼교 중 사음교의 힘만으로도 중원의 절반이 피바다가 되었다. 남은 둘까지 막으려면 모용우란 존재가 절실히 필요해.’
당장 코앞의 복수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닥칠 환란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연호정의 얼굴에 살기가 깃들었다.
‘명가부터 작살을 내 놔야겠군.’
차라리 잘 됐다.
연가에 세작을 보낸 건 모용세가지만, 실질적으로 가문을 무너트린 건 명가다. 똑같이 죽일 놈들이라도, 가족을 죽인 흉수를 직접 본 그에겐 명가야말로 최우선 순위의 적이었다.
개인의 분노로도, 미래를 따져 봐도 이게 맞다.
그렇다면?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였지.”
“엉? 갑자기 그게 뭔 소리요?”
연호정이 서늘한 눈으로 가득상을 바라보았다.
가득상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 양반 눈빛 하나는 진짜…….’
직접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눈빛이었다. 마치 사람의 마음속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듯했다.
“나는 명가를 무너트릴 거요.”
“알고 있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도와주면 할 수 있소.”
“뭐, 뭐라고?”
“당신에게도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거요. 명분도 확실하고, 개방의 명성을 높이는 데에도 좋은 일이오.”
가득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울컥 화가 난 것이다.
“날 그런 놈으로 보고 있었던 거요? 명성 따위에 연연하는?”
“명성에 연연하는 게 나쁜 거요?”
“……?”
“사람은 다 욕심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이오. 산중 수행자도 아니고, 명성에 욕심을 부리는 게 죄인가?”
“어…… 그건 아니지만…… 여하튼 난 그런 사람 아니오.”
“알고 있소.”
“아는데도 그런 말을!”
“알지만, 앞으로를 위해서 명성은 필요할 거요. 더 악랄한 놈들을 잡기 위해서라도.”
“……!”
가득상의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일단 전서부터 날립시다.”
“전서? 누구한테?”
“모용군.”
“……!!”
“지급으로 날려야 할 거요.”
이용해 줄 수 있는 건 다 이용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