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싸움의 명분 (4)
후웅. 쩌어어엉!
시퍼런 검풍(劍風)이 바위를 반으로 쪼갰다.
쪼개진 바위의 단면을 본 모용군의 얼굴에, 그제야 흡족한 빛이 감돌았다.
“이제 좀 봐 줄 만하군.”
바위의 절단면은 소름 끼치게 매끈했다. 그 위에 물을 떨어트리면 조금도 흩어지지 않은 채 미끄러질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몇 년은 더 앞당길 수 있겠어.’
모용세가의 절기는 많다.
검이 주력이긴 하지만 그 못지않은 무공도 무수히 겸비한 가문이 모용이었다. 실제로 역대 가주 중 검객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용세가 역시 명가처럼 선조가 숨겨 놓은 절학이 하나 있었다.
지금껏 누구도 대성하지 못했던 절대검공. 전전대 가주가 발견했고, 전대에 해석을 끝마쳤으며, 당대 가주인 모용군이 익히고 있는 검공이었다.
무정천뢰식(無情天雷式).
뇌정공(雷霆功)이라는 상고의 신공을 이용하여 펼치는 무적의 검공(劍功)이었다. 그 예기와 위력은 형언 불가다. 구결을 읽는 것만으로도 등허리가 축축해질 만큼 큰 충격을 주는 무공이었다.
이 무공이라면.
이 정도 고차원적인 무공이라면 곧 성천십삼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잡아야 십 년 안팎일 것이다.
“후우. 그나저나 내공을 보통 많이 잡아먹는 것이 아니로군. 기의 밀도를 더 높여야겠는데…….”
갈라진 바위를 내려다보며 한참 고민에 빠진 모용군.
그런 그의 고민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가주님.”
모용군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지금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별수 없는 노릇이지.’
어차피 한 번 깨진 집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모용군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일이신가?”
“개방에서 지급으로 서신이 왔습니다.”
순간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개방?!’
개방에서 자신에게 서신을 보낼 일이 무엇이 있을까?
‘있군.’
그렇다. 있다.
바로 연가와 관련된 일이다. 그게 아니면 이 시국에 개방에서 지급으로 올 서신이 없다.
‘역시 연가를 도운 건 개방이었어.’
지급으로 서신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내용은 안 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확신이었다.
‘허! 이렇게 되면 예정했던 시기보다 더 빨라야 할 텐데.’
모용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차라리 서신을 보내지나 말 것을. 연가주, 쓸데없이 죽음을 재촉했소이다.’
어쨌든 서신이 왔으니 보긴 봐야 한다.
“이리 주게.”
“예.”
모용군이 서신을 폈다.
평온함으로 가득했던 마음.
잔잔하던 그 마음이, 서신을 읽으면 읽을수록 파랑을 일으켰다.
파바바박!
모용군이 선 자리 주변 땅 곳곳에 검흔(劍痕)이 생겨났다.
지잉. 지잉.
그의 몸에서 싯누런 전광이 명멸을 반복했다.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뇌정지기(雷霆之氣)였다. 그만큼 모용군이 큰 충격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그는 크게 당황했다.
서신에는 많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문제는 내용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모용군조차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그는 서신의 마지막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연호정?!”
충격적이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 설마설마했거늘, 연가주도 아니고 연가의 대공자가 보낸 서신인 줄은 몰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잡은 그는 서신 내용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애써 보내 주신 세작, 잘근잘근 잘 씹어 먹었소이다. 그나저나 애들 독단이라도 입에 물려서 보낼 것이지, 무슨 자신감으로 그냥 보냈소? 다음에도 세작을 보낼 생각이라면, 입이라도 무거운 놈들을 보내시구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세작을 잡은 것까지는 예상했다. 한데 그다음 말이 걸렸다.
입이 무거운 놈을 보내라니? 대체 그놈들이 무슨 말을 했기에?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명가의 첩보 조직을 다 보냈소이다. 물론 가주께서 콕 집어 요청한 건 아닌 것 같소. 한데 말이오, 나를 통해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리 급했소?
여기서부터다. 여기서부터 모용군은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명가와 연수했다는 걸 알고 있어? 어떻게?’
세작들에게도 그건 알려 주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으니까.
한데 이놈은 어디서 들었을까? 어떻게 알았을까?
어찌 이리 확신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가장 압권은 이 부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가주께선 욕심이 지나치신 것 같소. 본가도 본가지만, 명가까지 묻어 버릴 생각이신 것 같은데.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는 당연하고, 무림맹주라도 되고 싶으신 게요?
투둑.
저도 모르게 엄지에 힘이 들어갔다. 엄지에 닿은 서신 끄트머리가 살짝 뜯어졌다.
천하제일가. 무림맹주.
이 말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는, 실제로 그것이 그의 꿈이요, 목표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누구라도 목표 삼을 수 있는 꿈이었다. 문제는 그가 정상을 향해 달리기 위해 예전부터 온갖 전략을 세워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신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다 들통났어, 이 사람아.
뭐, 괜찮소. 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나는 존중하오. 나 역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오. 하니 내 제안 하나 하리다.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나이라고 들었다. 그런 놈이 오십이 다 된 무림의 선배에게 이따위 말투라니, 참으로 건방진 놈 아닌가.
하지만 모용군은 그의 말투엔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서신의 내용이 훨씬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측에서 세작을 보냈지만, 난 이해하오. 그러나 실제로 칼을 갈고 있는 놈들은 다르지. 난 명가를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이다. 보아하니 가주께 결정적인 한 수가 있는 모양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명가나 묻어 봅시다.
명가를 묻어 버리자.
실로 도발적이고도 짜릿한 한마디였다.
연호정의 건방을 떠나, 그 한마디가 주는 짜릿함이 대단했다. 실제로 천하제일가를 노리는 그로선 명가가 최대의 걸림돌이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무력이 아닌 악소문으로 묻어 버릴 생각을 했겠는가. 전략적으로 가장 좋은 선택지였지만, 힘이 있었다면 굳이 그런 전략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연호정의 서신은, 충격적인 만큼 매혹적이기도 했다.
명가를 매장해 버리자. 당대 천하제일가를 날려 버리자.
기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서신 한 장에 날 믿을 것 같진 않소이다. 나 역시 가주를 전적으로 믿기 힘들기도 하오. 그래서 지급으로 보냈소. 만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다른 걸 떠나서 참으로 대단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신으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상대를 몰랐다면 강호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노강호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직접 만나자는 걸 보니 자신도 있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을 사칭한 누군가가 아니라, 진짜 연호정 본인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남으로 오시오. 난 명가를 상대로 악업(惡業)을 쌓고 있을 테니. 그 지모(智謀)가 대단하다고 정평이 난 분인 만큼, 결정이 늦어 봐야 모두에게 손해라는 걸 아시리라 믿소.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명가를 상대로 악업을 쌓겠다…….’
명가를 상대로 악업을 쌓겠다.
그 말 한마디로 그는, 세간에 들리는 연호정에 대한 평판을 급격하게 상향 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놈이 있나.’
얼마 만인가? 후배에게 이 정도로 감탄한 것이.
딸에게도 이만큼 감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기특했을 뿐, 애비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찾자면 형제 중 막내인 모용우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모용우는 경계의 대상이었지, 동등한 자리에서의 역량을 견줄 만한 아이는 아니었다.
‘연가주…… 기가 막히는군. 그 딱딱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언제 이런 괴물을 키워 놨단 말인가?’
누군가에겐 ‘고작’ 서신 한 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용군은 이 서신에서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연호정을 고평가한 이유였다.
‘연가주도 만만히 볼 사람은 아니었단 말이지? 허! 세상에는 인물이 많기도 하다.’
모용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상대할 만한 자가 많은 것은 피곤한 일임과 동시에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어쩌면 연가주에 대한 소문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관과 연화를 불러라.”
잠시 후, 모용연화와 능적소(凌籍昭)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용군이 웃으며 두 사람에게 서신을 건넸다.
“연호정이란 녀석에게 온 서신이다. 읽어 보도록.”
서신을 읽은 두 사람.
잠시 후, 둘의 얼굴이 확연히 굳어졌다.
“어떻게……?!”
능적소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체 연가의 대공자는 어떻게 이것을 알았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는 그였다. 평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만큼 충격이 큰 것이다.
반면 모용연화는 말이 없었다.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니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다.
모용군이 물었다.
“연화, 네 생각은 어떠냐?”
“제 생각 이전에, 아버지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제 생각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든지 물어보거라.”
“함정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모용군은 딱 잘라 말했다.
“전무(全無)하다.”
“역시 그렇군요.”
“네 생각은 달랐느냐?”
“전무하거나 아니면 확실한 함정이거나. 중간 확률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해서 네 생각은 어떠하냐?”
“가셔요.”
능적소가 깜짝 놀라 모용연화를 바라보았다.
모용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저희를 부르기 전에 마음을 정하신 것 같은데요?”
“허허.”
“이 서신, 필치에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요. 자신감이 과하거나 오만한가? 그것도 아니에요. 이 서신의 이면에는, 이 계약이 무산되어도 상관없다는 의사가 내포되어 있어요.”
“잘 보았다.”
모용군이 뒷짐을 지었다.
“그 녀석은 본가를 상대할 패도 쥐고 있음이 분명해. 하기야, 세작 건만 해도 그러하지. 개방이 도와주고 있으니 작정하고 터트린다면 본가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흔들리진 않을 겁니다. 흠집은 나겠지만요.”
“본가는 무림 정점으로 올라서야 한다. 굳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다. 적어도 당장은.”
“옳으신 말씀이에요. 아! 그리고 하나가 걸려요.”
“무엇이?”
모용연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명가를 상대로 악업을 쌓는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닌가.’
하긴, 지금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성장 속도를 볼 때, 딸은 앞으로 오 년 안에 자신의 지모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호정 이 녀석은 이미 나에 견줄 만하다는 뜻인가?’
그건 모르는 일이다. 옆에 방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찌 되었든 오래간만에 무척 놀랐고, 동시에 흥미로웠다.
사람들은 모용군더러 얼굴 보기가 힘든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니었다. 모용군은 가주 자리에 앉아서 아랫사람만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직접 만 리 길을 건너는 추진력과 배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추진력과 배포가, 실로 오랜만에 발휘되려 한다.
“하남이라…… 나들이 삼아 가기에 적당한 거리지.”
* * *
“오늘부로 사흘이오.”
“그렇군.”
“명가에서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할 거요.”
“그렇겠지.”
“……정녕 혼자 그럴 생각이오?”
“마침 내 무공이 과도기에 있소.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생각하오.”
“대체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요?”
“경험.”
“나이도 어린 양반이 참.”
“암사대나 잘 보고 계시오.”
“걱정 마쇼. 죽었다 깨나도 탈출 못 하니까. 허! 생각해 보니 나도 범죄자가 다 됐네. 납치, 억류나 다를 바 없잖아, 이거?”
쿵.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겠소.”
“연 공자.”
“말씀하시오.”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가득상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부디 몸조심하시오.”
“당신도.”
덜컹!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온 연호정.
도끼를 쥔 그의 손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어떤 놈부터 올까?”
명가멸문지계(明家滅門之計)의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