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벽산의 장자 (5)
“음, 됐군.”
연호정이 주먹을 쥐었다.
츠츠츠.
자연스레 백호기가 깃들었다.
꽉 쥔 주먹을 당장이라도 뻗어 내고 싶었다. 바위에 휘두르면 바위가 쪼개질 것이요, 나무에 휘두르면 나무가 박살 날 것이다.
물론 점차 성취가 깊어져 가는 벽라진결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벽라진기로 중심을 잡고 백호기를 운용해 가격하는 것은 공격력 자체에서 차이가 난다.
‘이제 제대로 운용이 돼.’
백호기는 사납다. 현무기처럼 묵직하고 정적인 기운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뛰쳐 나가려고 용을 썼다. 백호기를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면 무공까지도 제어하기 힘들어진다.
무공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럼 자멸이다. 희대의 보검도 써야 할 때 써야 가치가 빛나는 법이었다. 제어가 안 된 백호기를 남발하다가는 내공이 고갈되기 전에 육체가 먼저 무너질 것이다.
‘그래도.’
연호정의 얼굴에 뿌듯함이 일었다.
‘확실히 백호까지 있으니 든든해.’
백호기를 얻은 지 여드레가 지났다.
그동안 진기를 제어했고, 몸에 맞게 다듬었다.
도끼를 휘두르거나 보법을 수련하진 않았지만, 무공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느꼈다. 제아무리 극단적인 무도(武道)를 추구한다 한들, 최소한의 균형은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연호정이 도끼를 들고 일어났다. 며칠 동안 숲에서 지내느라 수염이 덥수룩했지만, 피부는 더 맑아진 것 같았다.
“그럼.”
그가 힘차게 일 보(一步)를 밟았다.
쿵!
대지를 진동하는 발걸음이 산의 주인을 알렸다.
연호정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퍼억!
사라졌다 싶은 순간 십 보(十步) 밖에 나타나 나무를 사선으로 쪼개 버렸다.
본래 연호정의 신법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지금도 신법의 성취는 백호기를 얻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보법은 달랐다.
원래부터 근거리를 파고드는 속도가 빨랐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더 빨라졌다. 가히 번개와도 같은 속도였다.
그것이 바로 백호군림보(白虎君臨步)였다.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戰場)을 군림하는 서방대제의 발걸음이었다.
영역 안에 들어오는 모든 적을 상대할 수 있는 보법. 전투에 특화가 된 보법이었다.
연호정이 재차 도끼를 휘둘렀다.
쐐애애액!
어찌나 힘차게 휘두르는지 창대가 휘어질 것만 같다.
야수창법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이제야 진정한 일격필살(一擊必殺)의 묘리가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공격이 들어가기도 전에 기세부터 박살 내는 극강의 무공, 호왕구벽세였다.
수십 번이나 도끼를 휘두르던 그가 오른손에 쥔 도끼로 바위의 밑동을 후려쳤다.
콰앙! 콰르르릉!
제법 큼직한 바위가 오 장 거리를 굴러가다가 거대한 나무에 막혀 전진을 멈추었다.
폭발적인 힘으로 바위를 쳐 날려 버린다. 괴력도 이런 괴력이 없었다.
쿵!
도끼를 놓은 연호정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氣)는 완전한데 몸이 받쳐 주질 않는군.’
백호기가 실린 도끼로 쳤으니, 마땅히 바위가 쪼개져야 한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파괴적인 기로 바위를 밀어 날려 버렸다.
진기의 수급이 자유자재라는 것이다. 백호기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러나 근육과 인대, 관절이 그 파괴적인 수법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은 괜찮아. 하지만 미리 풀어 두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파탄이 나겠어.’
연호정은 걱정하지 않았다.
백호기는 거칠다. 하지만 백호기로 인해 근골이 성장한다.
즉, 육체 단련 외적으로 백호기만 잘 운용하면 이 문제는 언젠가 없어질 것이다.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우웅.
벽라진기로 중심을 잡고 백호기로 진기를 회복한 후, 현무기로 삿된 기운을 날려 버렸다.
회복이 실로 빨랐다. 찌뿌드드했던 몸이 단숨에 활기로 가득해졌다.
“자, 그럼.”
도끼를 어깨에 걸친 그가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주루를 보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간만에 배에 기름칠이나 해 볼까.”
연호정이 도착한 곳은 하남의 성도 정주(鄭州)였다.
개봉도 개봉이지만 정주의 인파는 또 달랐다. 거리는 개봉보다 화려했고 전각들도 더 크고 높았다.
그중 유독 크고 화려한 주루에 들어선 연호정은 곧장 방을 잡았다.
며칠간 제대로 씻지를 못했다. 그는 반 시진이 넘도록 몸을 씻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미리 부탁해 두었던 옷은 무복이었다. 때가 잘 안 타는 검은색 무복이었다.
무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도끼를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왁자지껄.
주루는 시끄러웠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술자리를 벌인 사람이 많았다.
그는 최상층 구석진 곳에 앉아 요리를 시켰다. 물론 술은 덤이었다.
“냄새 좋구먼.”
주문한 요리 세 개가 나왔다. 연호정은 걸신들린 것처럼 음식을 해치웠다.
하지만 역시 그는 가득상이 아니었다. 요리 두 개를 해치우자 적당히 배가 불러 왔다.
‘딱 안주로 쓰면 되겠군.’
그는 팔자 좋게 술까지 한 잔 들이켰다.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남의 시선을 불편해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워낙 익숙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술 한 병을 비우고, 다시 한 병을 시킬 때였다.
“술 드시는 모습이 아주 호쾌하시네요.”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화사한 외모의 여인이 서 있었다. 제법 술을 마셨는지 양 볼이 발갛게 익었다.
매력적인 외모였다. 일부러 그런 옷을 입었는지, 굴곡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사내라면 쉬이 눈을 떼기 어려운 여인이었다.
“강호의 무사님이세요? 세상에, 저 큰 도끼를 들고 다니시나요? 굉장해요! 힘이 장사신가 봐요?”
연호정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힘이야 적당히 쓰지.”
“헤에, 딱딱하신 분이구나? 매력 있어요.”
대놓고 매력이 있단다. 어지간히 뻔뻔한 사람도 이러기는 쉽지 않았다.
여인이 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대담하고도 매혹적인 자세였다. 갈라진 앞섶으로 골이 진 가슴이 드러났다.
“어때요? 저도 마침 혼자인데, 같이 마실까요?”
“그래도 되나?”
“어머. 왜요? 남녀가 함께 술 마시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없지?”
“그럼 같이 마셔요.”
“싫다.”
여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왜요? 혼자 있고 싶으신가요?”
연호정이 턱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날 안 보고 있잖아.”
“네?”
“내가 워낙 흉악한 물건을 가지고 다녀서 말이지. 아닌 척하면서 다들 힐끔거리곤 하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날 보질 않네.”
“어머, 그럼 저를 보나요?”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이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 없는 동안 거치적대는 놈들 꽤 있었나 보지? 사람들이 너도 안 보는데?”
여인은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네? 날 안 보네? 왜일까?”
“왜긴 왜야. 네가 무서워서지.”
“제가 무섭다고요? 제가 뭘 했다고요?”
“나야 모르지. 네가 몇 놈 손을 봐 줬는지, 개지랄을 떨었는지는.”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도 참 어설프다. 상대를 속이려거든 남들도 속였어야지, 나만 속인다고 될 일이야?”
“흐음.”
“때 되면 알아서 놀아 줄 테니까, 오늘은 발 닦고 잠이나 자라.”
“어머, 그건 또 묘하게 기대되는 말이네.”
여인이 다시 연호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해사했다. 다만 그 눈빛은 조금 전과 달리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떻게 알았어, 동생?”
말투가 바뀌었다.
“방금 다 말했잖아?”
“아니, 그 이유 말고. 진짜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서.”
“할 말 다 했다. 가라.”
“……호오, 진짜였나 보네? 그렇게 간단하게 알아차릴 수 있단 말이지?”
물론이다.
다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이라는 것도 있었다. 상대를 속여 배에 칼을 박는 놈들을 하도 많이 봤더니, 접근할 때부터 냄새가 났다.
털썩.
여인이 넉살 좋게 맞은편에 앉았다.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나 밥 좀 먹자, 이것들아.”
“먹어. 안 건드려.”
진심이다. 연호정은 그녀의 말에서 진심을 읽었다.
언제나 진심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법. 여인은, 아니 그들은 연호정을 쉬이 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인이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턱을 괴었다.
여전히 매혹적인 자세지만 이전처럼 농염함이 묻어 나오진 않는다. 서늘하면서도 순수한 두 눈이 천진난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놀라워. 네가 제일 빨랐어. 보통 사내들은 내가 접근하면 헬렐레하거든.”
“바보들만 상대했나 보군.”
“그런가? 근데 우리가 잡은 애 중엔 제법 괜찮은 애도 있었거든. 형산검협(衡山劍俠)이라고 했었지, 아마?”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형산검협이란 별호는 그도 알고 있었다. 이유인즉, 그는 쇠락한 형산파(衡山派)의 마지막 고수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무력이었다.
형산검협은 구파일방 중 청성파(靑城派)의 장로와 동수를 이룬 희대의 고수였다. 그런 고수를 잡았다는 건 이들의 능력이 몹시 출중하다는 뜻이었다.
“몇이나 되냐, 너희는?”
“글쎄? 얼추 칠십? 신입 몇 번 들어오고 나서는 잘 세어 보지 않아서.”
“한 놈 잡는데 많이도 달려들었다.”
“에이, 설마? 우리 그렇게 경우 없지 않아. 형산검협 잡는 데엔 다섯만 갔어.”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청성파의 장로 정도나 되는 무인을 다섯이서 잡을 수 있는 조직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번엔 몇이나 왔냐?”
“전부 다.”
“호오?”
“그래서 궁금하더라니까. 설마 목표물이 성천십삼좌라도 되는 거 아닌가 싶었어. 호기심이 동해서 내가 먼저 나와 봤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내 장담하는데, 너희가 어떤 놈들이든 간에 성천십삼좌는 절대 못 잡는다.”
여인이 히죽 웃었다.
눈빛은 더더욱 서늘해졌다.
“왜 그리 자신해? 애들이 던진 비수에도 초일류가 죽는 동네가 강호라는 거 몰라?”
“알지. 근데 성천십삼좌는 아니야.”
“그 양반들 알아?”
“얼굴 안 봐도 아는 게 있지. 너희 정도로는 성천십삼좌는커녕, 우리 아버지한테도 안 돼.”
“판관검 연위. 대단한 실력자라고 들었지.”
“직접 뵈면 똥오줌을 지릴 거다.”
“제 애비라고 잘난 척은.”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가 봐. 아, 하긴 그건 안 되겠다. 그전에 나한테 다 죽어야지?”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동생이네.”
연호정이 손을 휘휘 저었다.
“볼일 다 봤으면 너도 가서 쉬어라. 오늘은 좀 취하고 싶어.”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여인이 웃으며 일어났다.
“많이 마셔 둬. 죽으면 술도 못 마시는데.”
“알았으니까 가라, 좀.”
“호호호.”
여인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상당하군.’
피 냄새가 짙다.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본 여자다. 아마 그가 속한 조직의 조직원들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런 놈들이 칠십이라고?’
이거 재미있는데?
저리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놈들은 절대 명문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애초에 명문이라면 그들을 받아 주지도 않는다.
한데 명가는 아닌 모양이었다.
“참 욕심도 많은 것들이야.”
그때였다.
[개방입니다. 모용가주가 정주에 도착했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드디어.’
왔다. 그가.
연호정이 작게 중얼거렸다.
“청소 한 번만 더 하고 가겠다고 전해.”
[예.]
모용가주 모용군.
검신(劍神)의 칭호를 받고 무림맹주가 된 희대의 고수이자, 자신과 함께 사음교주를 토벌하러 천주봉에 올랐던 전우(戰友)이자 적(敵).
드디어 그를 만나는 것이다.
흑제성주 흑암제로서가 아니라, 벽산연가의 장자 연호정으로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연호정이 손을 들었다.
“여기 한 병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