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천적(天敵) (2)
“진정 그리 생각하느냐?”
“네.”
“…….”
“미리 말씀드리지만, 생명의 구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알고 있다. 네가 천둥벌거숭이 같긴 해도 나름의 사리 판단은 할 줄 아는 녀석 아니더냐.”
“……칭찬이죠?”
“기실, 어지간한 일이면 이렇게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식들이 목숨의 은(恩)을 입었어. 은인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거늘 도움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그럼 어서 도와주세요.”
“어지간한 일이어야 말이지.”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그 녀석, 절대 그런 녀석이 아니에요.”
“네 안목을 믿는다. 하지만 일이 너무 커졌어.”
“명가의 행동은 너무 과해요. 설령 녀석이 정말 그랬다고 해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고수를 보내 호송하려 하다니요?”
“과하지. 게다가 칠대세가의 자제이니. 하지만 명가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명가의 섣부름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나, 명가를 어찌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일단 명가에게 과격한 행동에 대한 자제를 촉구해야 해요. 아버지 말마따나 칠대세가의 자제잖아요. 이런 식이어선 곤란해요.”
“곤란하지. 하지만 알고 있잖느냐? 이 애비가 왜 공격적으로 나서지 못하는지.”
“…….”
“연호정이란 청년은…… 너무 멀리 나가 버렸다. 차라리 명가에게 잡히는 게 나았어. 하지만 그 녀석은 명가의 고수들에게 상해를 입혔다.”
“무고한 사람을 잡겠다고 창칼을 뽑아 들었으니 당연히 싸워야죠!”
“이제 와선 이유가 중요하지 않아. 서로 죽이자고 칼을 겨누는 형국이다. 연가와 명가의 전쟁이 되어 버렸단 말이다.”
“……!”
“그나마 아직 전력(全力)을 퍼부을 명분이 없는 상황이다.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한 첨예한 대립이지. 하지만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제대로 된 명분을 들고나오는 순간, 두 가문 중 하나는 멸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멸문…….”
“그리고 멸문하는 쪽은 십중팔구 연가가 되겠지.”
“……!”
“나는 가주다. 애비로서 은인을 도와야 함이 마땅하지만,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 섣불리 움직여선 안 돼. 그렇지 않아도 본가의 힘이 약해진 상황이다.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
“그러니 네가 가라.”
“네?!”
“네 동생은 뛰어나지만, 아직 너만큼의 유연함은 없다. 애비는 대회의에도 참석해야 해. 그러니 네가 가서 직접 은인을 돕거라.”
“그, 그래도 되나요?!”
“안 되지.”
“그런데 왜……?”
“가주로서도, 애비로서도 말리고 싶다. 하지만 의(義)와 협(俠)을 따르는 백도 무림의 한 사람으로서, 너의 마음을 이해한다.”
“…….”
“가라.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거라. 그것이 옳은 길이라 믿는다면, 그 선택에 목숨을 걸어 백도인(白道人)의 의기를 보여 주어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 말하지 마라. 난 딸의 행복 하나 챙겨 주지 못한 못난 아비다.”
“…….”
“이번 대회의에서 남궁가주를 보게 될 것이다. 지금껏 미뤄 왔지만, 더는 힘들 것 같다.”
“아버지를 이해해요.”
“미안하다. 내, 달리 할 말이 없다.”
“괜찮아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은학림(隱學林)에는 말해 두었다. 함께 가거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 * *
휘이이잉!
바람이 차다.
이제 곧 여름인데도 오늘은 유독 날씨가 쌀쌀했다. 며칠 동안의 쌀쌀함이 지나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리라.
관도를 따라 걷던 가득상은 생각했다.
‘참 빨리도 달려왔네.’
그의 눈에 둥글게 진을 친 창응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우뚝 솟은 한 자루 큼직한 도끼도.
‘사실 좀 불안하기도 했지. 그 부탁을 들어줄 때부터 말이야.’
연호정은 자신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새외 무림의 동태.
둘째, 모용가주의 막냇동생인 모용우에 관한 모든 정보.
셋째, 명가가 키우고 있는 사검(死劍)의 존재.
정보를 만지고 사람을 캐내다 보면 어느 순간 얻게 되는 능력이 있다.
바로 중요함의 순서를 알아채는 능력이다. 쉬운 말로, 대국을 읽는 안목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눈치가 빨라진다는 뜻과도 상통한다.
연호정이 조사해 달란 목록을 들었을 때, 가득상은 즉시 확신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부탁도 중요해. 하지만 여유가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부탁은 달라.’
명가가 암중에 키우고 있는 사검의 존재.
연호정이 당장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알려 주자, 예상대로 연호정의 반응은 엄청나게 격렬했다.
‘그때부터였지. 저 미친 작자와는 왠지 지독하게 엮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게.’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미친놈이니, 죽일 놈이니 욕은 했지만 사실 연호정과 함께하며 그도 즐거웠다.
즐거워할 상황이 아닌데도 즐거웠다. 이유인즉, 누군가와 함께 이리 날뛰어 본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협(義俠)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더더욱 좋았다.
아마 연호정에겐 의협이 아니라 복수였겠지만.
스릉.
“누구시오.”
창응대원 하나가 검을 반쯤 뽑으며 물어왔다.
자신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상한 사람을 대하듯 묻는다. 그만큼 창응대도 날이 서 있다는 뜻이리라.
“개방의 후개, 가득상이라 하오. 귀가의 대공자를 만나러 왔소.”
그때였다.
“길을 열어라.”
탁!
곧장 납검한 창응대원이 한옆으로 몸을 비켰다. 그러자 동그랗게 진을 친 창응대 한쪽으로 길이 열렸다.
가득상은 묵묵히 열린 길을 걸었다.
‘날카롭군.’
양옆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검객들의 눈빛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수백 자루의 검에 몸 곳곳이 베이는 듯했다.
자극해선 안 된다. 지금 창응대는 소림의 고승이 와도 벨 기세였다.
“오셨소?”
가득상이 도끼를 바라보았다.
땅에 창대 끝을 두 자나 박아 넣은 도끼는 용케도 똑바로 세워져 있었다. 팔십 근 무게의 중병이라지만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었기에 고정이 가능한 것이다.
가득상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의 안색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이틀이 넘도록 한 자리에서 적과 교전을 벌인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멀쩡했다.
가득상이 콧방귀를 뀌었다.
“도끼에 피 묻은 거 봐라. 아주 그냥 살판났지?”
“몸이 찌뿌드드하오.”
“지랄도 풍년이네. 그러니까 왜 싸웠소? 우리가 세웠던 작전, 다 까먹었소?”
“안 까먹었소.”
“대가리 깨려거든 미리 연락부터 하든가. 이게 뭐요? 나만 바보 됐잖아.”
“미안하오. 연락할 새가 없었소.”
“변명 잘 들었고.”
“하하.”
가득상도 결국 피식 웃어 버렸다. 그답지 않게 난처한 웃음을 짓는 연호정을 보니, 쌓인 감정이 싹 날아가 버렸다.
“으자차차! 나도 좀 앉아 볼까!”
연호정 옆에 털썩 주저앉은 가득상이 명가 쪽을 바라보았다.
오십여 장 밖에 삼백의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명가의 백룡군이었다.
“거지들한테 시켜 놨소. 명가 쪽 정보를 싹 모아 놓으라고.”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믿고 있었소.”
“지랄. 앞으로 또 무슨 일로 엮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이런 식이면 국물도 없을 줄 아쇼. 그냥 나 몰라라 튀어 버릴 거야.”
“알겠소.”
“그나저나, 피 튀기면서 싸우고 있을 줄 알았더니만 소강상태네?”
“저쪽에서도 병력을 무한정 파견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백룡군은 언제부터 있었소?”
“백룡군?”
“저기서 진을 치고 있는 놈들 말요. 몰랐소?”
“몰랐소. 엊그제 저녁부터 도착해 있었소.”
“덤비진 않았고?”
“몇몇 고수들을 계속 보내오더이다. 하지만 저들은 움직이지 않았소.”
가득상의 눈이 번뜩였다.
“위험하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가득상의 안목은 비범하다. 돌아가는 상황만 대충 듣고도 이번 싸움의 본질을 볼 줄 알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만큼, 백룡군 같은 전투 부대를 움직이긴 힘들지. 일대일 대무(對武)는 괜찮아도, 저들까지 움직이면 전쟁이 되니까.”
“그렇소.”
백룡군의 진군을 창응대라고 두고 볼 리 없었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며, 그리되면 서로의 명분은 공중분해 된다.
“즉, 저들이 움직이는 순간이야말로 총력전이 된다는 뜻이오.”
“잘 보셨소.”
“어지간해선 움직이기 쉽지 않을 거요. 지금의 대치는 살얼음판에 가깝소. 결정적인 이유,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명분을 들고 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그렇겠지.”
“그렇다고 가문의 중진을 파견하지도 않을 것이오.”
“격(格)의 문제겠지.”
“그렇소.”
연호정은 연가의 장자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시선이 집중된 곳에서 장로급 고수가 튀어나오면 격이 맞지 않는다.
“즉, 써먹을 만한 패는 다 써먹었다는 것이로군.”
가득상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가문의 중진을 제외하고 남은 패를 다 썼다? 그 말은, 연호정이 단신으로 명가의 중진 바로 아래의 고수들을 전부 감당해 냈다는 뜻이다.
대단했다. 백도인으로서가 아니라 무인으로서 감탄이 나왔다.
“그 나이에 어쩌다 괴물이 됐소?”
“멀어도 한참 멀었소.”
“아, 재수 없어.”
“하하.”
가득상이 벌러덩 누워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동향이나 살피면서 푹 쉽시다.”
“근데 왜 굳이 여기서 쉬려고 하오?”
“우리야 운명 공동체 아뇨? 나 하나 온 것만으로도 명가는 더 신중하게 움직일 거요.”
“그건 그렇지.”
가득상은 이철경의 존재와 호북 융중산(隆中山)에서부터 올라오는 또 다른 존재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백룡군 너머 우뚝 솟은 건각들을 바라보았다.
‘보인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보인다.
기본 안력(眼力)이 상승한 것이다. 굳이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아도 시력이 좋아졌다.
‘선명하게 보여.’
백호기와 현무기가 이틀 전보다 훨씬 더 단련되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다.
연호정은 이틀 동안 벌였던 몇 번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들 모두 가짜 사신무를 익혔다.’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흑암제의 깨달음을 이용, 그들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홀로 명가의 고수들을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익힌 무공, 그리고 상대가 익힌 무공 자체에 있었다.
‘청백무병이라고 했었나?’
명치산.
대숲에서 맞붙었던 그는 가짜 사신무를 익히지 않았다. 아직 명가에는 그런 고수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아.’
그 정도 고수라면 누가 와도 괜찮다.
현무기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백호기도 알아서 자체 성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틀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대상이 사신무에서 파생된 무공을 익힌 자라면, 설령 초절정 고수라도 상대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의 연호정이었다.
명가는 연호정을 잡으려 고수를 파견했지만, 그 고수들은 오히려 연호정의 무공을 성장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누가 와도 무섭지 않다. 적어도 명가에서는.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귓가를 살랑이고 있었다.
“바람 좋군.”
사흘 뒤.
“오늘이 대회의 날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소?”
“그러게 말요. 시간 참 빠르다, 빨라.”
두두두.
“엉? 뭐야, 저것들?”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철수하지?”
연호정 역시 의아했다. 현재 상황에서 백룡군이 철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응?”
가득상이 귀를 쫑긋거렸다. 전음을 듣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가득상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오?”
가득상이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연가주께서 폭탄을 터트리셨소.”
“아버지가?!”
“명가주를 협박했단 말이오! 당신을 지키려고!”
가득상이 연호정에게 서신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그의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제길, 판이 흔들렸소! 명가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게 되었단 말이오!”
“알겠군.”
“잉? 뭐라구?!”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난 알겠어. 명가, 아니 ‘명가주’가 어떻게 움직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