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3)
초면에 하는 말이 상당히 거칠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백정이라고 소문이 났습니까?”
넉살 좋게 받는 그였다. 화진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소문 안 날 줄 알았더냐? 도끼 다루는 솜씨가 예술이라더만. 명가 놈들 대가리를 장작 대신 썼다며?”
“불쏘시개로도 못 쓰겠더군요.”
“대가리에 똥만 가득 찼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명천도 죽이려 했다면서?”
“놀랄 일입니까?”
“놀랄 일은 아니지. 자신을 죽이려 드는 적을 살려 준다? 듣기에는 좋은 소리일 수 있다만, 실제 싸움터 안에 있는 사람에겐 꿈 같은 개소리야.”
화진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는 이것이지. 이미 승부가 다 난 상황에서 사지를 자르겠다 날뛰었던 것.”
제갈아연이 깜짝 놀라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랬지요. 가다가 쓰러져서 목표를 완수하진 못했지만.”
“왜 그랬나? 이미 승부가 났고 상황도 정리되는 판에, 굳이 그런 모욕을 줄 필요가 있겠는가?”
“농담이 심하십니다.”
“농담?”
“필요할 때가 아니면 전 상대를 모욕하지 않습니다.”
“사람 토막 내는 게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제 사지를 자르고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아버지 앞에 던져 두겠다고 하더이다.”
“…….”
“어지간하면 참아 넘길 수 있지만, 그때는 못 참겠더군요.”
모호한 눈으로 연호정을 주시하던 화진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지간하면 자네는 건드리면 안 되겠군.”
연호정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다 보셨습니까?”
화진천의 눈이 번뜩였다.
“알고 있었나?”
“제자는 스승을 닮는 법입니다. 후개를 처음 만났을 때가 딱 이랬지요.”
“그 빈대 같은 놈과 닮았다니, 나도 아직 멀었구먼.”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화진천은 내심 놀랐다.
‘똑똑하군.’
정보를 다루는 자는 사건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기에 앞서 그 사건의 주축이 된 사람의 성향을 보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제자 놈에게 항상 강조했던 바였다. 결국 사건 사고도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니, 사람만 제대로 볼 줄 알면 일의 맥을 짚을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걸 이 젊은 후기지수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보통 놈이 아니야. 내가 왔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어. 예측한 건 아니겠지만, 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지.’
화진철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개방이 어찌 될지 모르겠구먼.”
“예?”
“범이 사람처럼 생각할 줄 알게 되면 일대가 지옥이 되는 법일세. 내 제자 놈이 사람의 지능을 갖춘 호랑이와 친분을 나누었으니, 그놈도 제 명에 죽진 못하겠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나 물어 죽이는 미친놈은 아닙니다.”
“아무나 물어 죽이는 미친놈이었으면 그리 친분을 나누지도 못했겠지.”
“하긴, 그렇습니다.”
피식 웃던 화진천이 제갈아연을 돌아보았다.
“제갈가의 장녀인가?”
제갈아연이 허리를 숙였다.
“대화 중에 끼어들기 민망하여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갈세가의 제갈아연이 용두방주를 뵈어요.”
화진철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제자보다는 비듬이 덜 튀는 것 같았다.
“자네, 여기 있어도 되나?”
“네? 저, 저요?”
“그래, 자네.”
제갈아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화진천이 피식 웃었다.
“남궁가에서 매파를 보냈다면서?”
“……!”
“혼사가 이뤄질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 전까지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약관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사내는 사내인데, 남궁 쪽에서 좋아할 것 같지 않구먼.”
제갈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느닷없는 곳에서 가문끼리의 중대사를 언급할 줄은 몰랐다. 너무 당황해서 입이 열리지 않았다.
화진천이 껄껄껄 웃었다.
“허허, 내가 괜한 말을 꺼낸 것인가?”
“…….”
“미안하네. 내 이 나이 먹도록 주둥이 관리가 잘 안 된다네. 괜스레 의아해 던진 말이니, 자네가 한 번만 이해해 주게나.”
“괜찮……습니다.”
화진천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늙은 거지가 와서 분위기만 망쳤군. 이만 가 보겠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미안하게 되었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살펴 가십시오.”
“나중에 연이 닿으면 또 보세.”
휘적휘적 걸어가던 화진천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 한데 이건 알고 있는가?”
화진천의 눈이 제갈아연에게 향했다.
제갈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 아버지가 이걸 몰랐을까?”
“……네?”
“딸내미를 연가의 장남에게 보냈는데, 그 행위가 남궁가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몰랐을까 싶어서 말이네.”
“……!!”
“알다시피 자네 아버지, 강호에서 머리 좋기로는 첫손에 꼽히는 위인 아닌가? 신기제갈(神機諸葛)의 주인장이니 말일세.”
제갈아연의 얼굴에 충격이 깃들었다.
화진천이 씨익 웃었다.
“부모와 자식 간이란 참 좋은 거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말을 끝으로 화진천이 자리를 떴다.
연호정이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좀 피곤하게 됐구먼.”
신모가 의아해 물었다.
“용두방주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어찌하여……?”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됐다. 내 걱정이 지나친 것이겠지.”
자신을 보는 화진천의 눈빛이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
일선에서 물러난 지 꽤 되었고, 곧 제자에게 방주직을 물려줄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렇다고 용두방주의 신안(神眼)이 죽은 건 아니었다. 그는 몇 번의 대화로 연호정이 어떤 인물인지를 순식간에 간파해 냈다.
가득상이 수개월에 걸쳐 하나씩 알아봤던 연호정의 진면목을, 고작 잠깐의 대화로 꿰뚫어 본 것이다.
‘과연.’
그는 화진천의 모습에서 가득상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흑암제 시절의 가득상은 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그보다 더 화통했고 진솔한 면이 있었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개방이라는 단체를 운영하기에는 화진천의 조심성이 더 나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좋은 물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당분간은 그 덕 보기가 어려우려나?’
가득상에게 자신과 엮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릴지도 모르겠다.
‘별수 없지. 하긴,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폐를 끼치기도 했어.’
한숨을 푹 내쉰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보며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
“어이.”
“헉! 나, 나?”
“그럼 너지 누구야.”
제갈아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두방주님의 말씀이 사실일까?”
“뭐가? 혼약?”
“응.”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확률이 높지. 굳이 칠대세가 정도가 아니더라도 한 가문의 수장이라면, 딸을 전쟁터로 보내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잖아.”
“……!”
“뭐, 그렇게 생각하면 제갈가주께서 날 이용하신 거군. 어쩌면 소천기단도 말이 은혜를 갚는 거지, 미안함을 대신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제갈아연이 입을 쩍 벌렸다.
연호정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붕대 갈고 나올 테니까 뭐 먹을지 미리 생각해 놔. 신 대주, 나 붕대 가는 것 좀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그때, 제갈아연이 외쳤다.
“잠깐!”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게…….”
제갈아연이 우물쭈물 말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뭘?”
“남궁세가에서 매파를 보내온 거 말이야.”
“뭘 어떻게 생각해.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다…….”
“이공자 아니야? 매파 보낸 쪽?”
“맞아.”
“남궁세가는 검가(劍家)로 최고의 명성을 날리는 가문이야. 하지만 구주명가나 근래 힘을 얻기 시작한 모용세가 때문에 영 기를 못 펴고 있는 실정이지.”
“…….”
“칠대세가의 일익과 사돈 관계를 맺어 세력 기반을 불린다. 게다가 마침 아들놈이 호감을 느끼고 있는 처자가 있다니, 명분으로는 그만이지.”
“음.”
연호정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남궁가주의 생각이 어떤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혼인이 성사되는 순간, 주변 세력들이 긴장하기 시작할 거야. 거기서 넋 놓고 있다가는 견제만 받게 될 테지?”
“그렇겠지.”
“남궁가주 정도 되는 사람이 당하고만 있을 리 없어. 모를 리도 없고. 즉, 그도 제법 거창한 야망은 품고 있는 셈이다.”
제갈아연이 툭 던지듯 물었다.
“연가는 어때?”
“우리 집?”
“……되게 친근하게 말하네.”
“우리 집 뭐?”
“연가도 혼인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는 전략을 염두에 두고 있냐는 말이야.”
민감하다면 민감한 질문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 가라사대, 평생을 함께 살아갈 사람이니 그 사람의 집안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라고 하셨다.”
“……!”
“멋지지? 이 난세 아닌 난세에 그런 낭만으로 살아가는 사람 얼마 없어. 그래서 내가 우리 아버지를 좋아해.”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멋진 분이네, 너희 아버님은.”
연호정이 다시 몸을 돌렸다.
“기다려. 붕대 갈고 나온다.”
그렇게 연호정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히죽히죽 웃던 제갈아연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괜히 무리하시는 거 아닐까.”
* * *
“왈!”
퍼어억!
“크아악! 왜 또 때려요!”
“아, 너였냐? 나는 또 웬 미친개가 짖나 싶었지.”
가득상이 머리를 매만졌다.
“혹 나겠네, 젠장.”
“젠장?”
“……헤헤, 잘못 들으셨겠지요. 설마 사부한테 그랬을까요.”
“지랄한다.”
화진천이 휘적휘적 관도를 걸었다.
가득상이 입맛을 다시며 그 뒤를 따랐다.
“어떠셨습니까?”
“연호정?”
“예.”
“소문 이상이던데?”
가득상의 눈이 빛났다.
“역시 사부님이 봐도 좀 비범하죠?”
“그래, 소문이 오히려 축소된 감이 있었어. 너무 비범해서 위험할 지경이다.”
가득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화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녀석에게 어떤 인상을 받은 줄 아느냐?”
“…….”
“마인(魔人).”
“……!”
“신비로운 기도 속, 풀뿌리 하나 자라나기 힘든 황량한 땅을 키우는 놈이다. 그 땅을 비옥게 하고자 세상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 놈이야. 내 일찍이 수많은 무림인을 봐 왔지만, 그처럼 위험한 놈은 본 적이 없었다.”
가득상의 얼굴에 괜히 언짢은 기색이 어렸다.
“그럴 인간은 아닙니다.”
뜻밖에도 화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예?”
“본성은 그리 황량한 놈인데, 달리 보면 또 사람 냄새가 나더구나. 연가주가 잘 보듬은 건지, 스스로 수양을 쌓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가득상의 얼굴이 밝아졌다.
화진천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왜? 친구 칭찬하니까 좋냐?”
“그 친구 제 친구 아닌데요? 제가 열 살은 많을 겁니다.”
“벗을 나이 따져 가며 사귀는 시대는 지났다, 제자야.”
“헤헤.”
“잘 지켜봐. 내 그래도 네가 악(惡)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 교육 하나는 제대로 했다고 생각한다. 옆에서 보다가, 정 사도(邪道)로 빠지는 것 같으면 머리통을 부숴 버려.”
“힘이 있어야 말이지요.”
“킁, 그러니까 쏘다니지 말고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연성 시작하라고.”
“때가 되면요.”
“너, 그러다 진짜 후개 자리에서 잘라 버린다.”
“그래도 좋고요.”
“어휴, 이런 놈을 제자라고.”
가득상이 은근슬쩍 물었다.
“제갈아연 쪽도 잘 해결해 주셨죠?”
“내가 이 나이 먹고 제자 대신 원망의 눈초리를 받아야겠냐? 앞으로 이런 건 네가 해라.”
“하하! 생각해 보고요.”
제자의 넉살에 결국 화진천도 피식 웃어 버렸다.
관도를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본 화진천은 문득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천기(天機)라…….’
슬슬 점쟁이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