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5)
“그런 일이 있었더냐?”
“네.”
중년 사내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 큰 키는 아니었다. 체격도 평범했다.
하지만 사내의 분위기는 평범해 보이는 외관과는 완전히 달랐다. 구름처럼 허허로운 듯하면서도 묘한 강단이 느껴지는 기도였다.
무인이라기보다는 문사, 학자의 기도였다. 쌓아 올린 지식을 활용하여 지혜를 연마하고, 연마한 지혜로 의(義)를 추구하는 이였다.
그는 바로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문호(諸葛文湖)였다.
제갈아연이 담담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가주세요. 아무리 딸이라도 주제넘은 짓을 해선 안 되지요.”
“…….”
“하지만 이번에는 여쭤보고 싶어요.”
“…….”
“이 혼사,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갈문호가 제갈아연을 돌아보았다.
심유한 눈빛 속에 씁쓸함이 드리워졌다.
“세상천지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이 원치 않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는 걸 바라겠느냐.”
“…….”
“다만 가문의 기둥 몇 개가 썩어 버렸다. 낌새를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쉬이 넘겨 버렸어. 그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한이 된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래, 지나가 버린 일이지. 다만…….”
제갈문호가 눈을 감았다.
선이 부드러운 얼굴 위로 자책의 기미가 엿보였다.
“다만, 나의 욕심이 과했을 뿐이다.”
“…….”
“무너진 것은 다시 쌓아 올리면 그뿐이다. 하나, 다시 쌓기까지의 시간이 문제지. 당금 무림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피와 죽음을 요구하는 강호의 인과율이 언제라도 뛰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인과율…….”
“나는 내 대(代)에서 가문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핑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이번 명가의 일을 보며, 과한 욕심은 필연코 파멸을 부른다는 당연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제갈아연이 물었다.
“아버지께서도 야망이 있으신가요?”
제갈문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렇군요.”
“나는 야망을 품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야망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제갈문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내가 어리석었다. 내 욕심 때문에 딸을 불행하게 만들 뻔했어.”
“아니에요, 아버지.”
“용두방주의 말씀이 맞다. 남궁가에서 들어온 청혼을 거절할 생각이다.”
제갈아연의 눈이 흔들렸다.
“당분간은 남궁가도 우리를 적대하지 못할 것이다. 워낙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그쪽도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겠지.”
“…….”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배움에 힘쓰거라.”
제갈아연이 웃으며 일어났다.
“아버지.”
“말하거라.”
“홀로 모든 짐을 지려 하지 마세요.”
제갈문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십 년은 멀었다. 정진하고 또 정진하도록 해라.”
“네!”
“아! 그나저나…….”
제갈문호의 얼굴에 솔직한 호기심이 일었다.
“연호정이란 청년에게 소천기단은 건넸느냐?”
제갈아연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줬죠.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려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제갈아연은 연호정이 보여 준 반응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해 주었다.
“만행도 그런 만행이 없었어요. 성질 같아선 진짜 한 대 쥐어패고 싶었다니까요.”
제갈문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아연아.”
“네?”
“너 혹시, 연가의 장남에게 마음이 있느냐?”
불의의 일격과도 같은 말이었다.
제갈아연이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없어요! 누가 그런 교양도 없는 놈한테!”
“교양이야 너도 부족하지 않으냐?”
“아버지!”
제갈문호가 피식 웃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그 녀석 얘기를 꺼낼 때마다 네 반응이 워낙 심상치 않아서 말이다.”
“제 반응이 어때서요? 어때서요!”
“네 어미도 지금의 너와 비슷했다. 지금도 내 욕을 그렇게 하고 있을 거다.”
“전혀 아니거든요?!”
“그럼 네게 있어 연호정이란 청년은 무엇이냐?”
제갈아연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뜨였다.
“으음…… 주는 거 없이 미운 놈……이자 탐구심을 자극하는 애늙은이…… 같은? 그냥 친구예요.”
제갈문호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인상적인 평가구나.”
“한마디로 정의가 안 돼요. 워낙 독특한 녀석이라서요. 뭐, 안 보면 한 번씩 생각나더라고요.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있을지 궁금하던데요?”
“그러냐?”
“네.”
“알았다.”
“왜 웃으세요?”
“그냥 웃어 봤다.”
“……의미심장하잖아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마세요!”
제갈문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이 몹시 평화롭게 보였다.
‘아연이도 다 컸구나.’
제갈아연이 발악했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아니거든요!”
* * *
의방에서 나온 연호정 일행은 산길을 탔다.
어디로 이동하든 편한 관도가 낫겠지만, 문제는 연호정의 유명세였다.
소문이라는 게 금방 타올랐다가 삽시간에 번지기 마련이다. 물론 식는 것도 그만큼 빨랐다.
하지만 당장이 문제였다. 하남에서 워낙 뜨거운 명성을 휘날리고 있는 터라, 말이라도 한 번 섞어 보고자 접근하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택한 것이 산길이었다. 시간은 좀 걸리지만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기도 했다.
푸스스스.
가부좌를 튼 연호정의 몸에서 희뿌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제야 되는군.’
현무기가 왕성하게 일어나며 손상된 혈도에서 올라온 모든 탁기를 제거했다. 코를 통해 받아들인 산 공기는 단숨에 머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었다. 이지(理智)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레 백호기가 개방되어 골육에 남은 충격을 회복해 주었다. 불처럼 타오르는 주작기는 온몸에 깨끗한 피를 돌게 해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다. 명천의 검에 맞은 흉부의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다.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생각보다 늦은 회복에 초조했는데, 며칠 사이에 급속도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왜 이러는 거지?’
회복한 건 좋은 일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예전 몸과 지금 몸의 차이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 그걸 감안해도 회복이 느렸다. 다만 어느 정도 몸이 괜찮아지니, 그때부터는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됐어.’
연호정의 얼굴에 찝찝함이 드리워졌다.
‘이거 안 좋은데.’
좋은 현상이든 나쁜 현상이든, 이유를 알아야 그에 맞춰 대비하는 법이었다.
‘청룡기(靑龍氣)가 없어서 그런가?’
짧은 순간, 사신무 중 세 개의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막연히 예정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빠른 소환이었다. 덕분에 전투 능력과 무력의 증강이 급속도로 일어났다.
그래서 불안정한 상태이기도 했다. 기운 하나하나를 다듬긴 했지만, 아직 조화를 시키진 못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청룡기를 얻지 못한 이상 사신기의 완전한 조화는 이뤄 낼 수 없다.
다만 워낙 해석이 안 되는 현상이다 보니 청룡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후우.”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계속 연마해 보자. 그럼 언젠가 답을 찾겠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장 파고들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찝찝하지만 머리에서 떨쳐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좋겠다.
‘무공도 다듬어야 해.’
연호정은 명가의 고수들을 상대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어지간한 수준이면 압도할 수 있었어. 주작기를 소환하기 전에도 명천을 상대로 수십 합을 견뎌 낼 수 있었다.’
명가의 무공은 사신무를 억지로 뒤튼 것이었다. 그래서 강했지만, 심각한 폐단을 안고 있었다.
‘허점이 많았지.’
그들을 상대할 때, 연호정은 가짜 사신무를 철저하게 파훼해 버렸다.
기실, 사신무는 마땅히 파훼할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세상에 절대(絶對)는 없다지만, 초식의 투로 면에서 거의 상극을 타지 않는 것이 사신무이기 때문이다.
다만 황룡기(黃龍氣)를 끌어내지 못했을 뿐, 거의 사신무를 통달하다시피 한 그였기에 미세한 허점들을 공략하여 완전히 분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기의 변화 덕도 컸다. 종가의 원조, 사신무의 진정한 후계자가 익힌 기운 앞에, 가짜의 기운은 속수무책으로 해체되거나 소멸되었다.
즉, 연호정이 명가의 수많은 고수를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익히고 있는 무공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강해졌지만 아직 한참 부족해.’
더 강해져야 한다. 더 성장해야 한다.
적어도 흑암제라 불리었던 그 시절의 무력 정도는 되찾아야 했다.
가부좌를 푼 연호정이 도끼를 들었다.
“양흠.”
“예, 대공자님!”
“신 대주 어디 있어?”
“아, 대주님은 잠시 현에 들르러 내려가셨습니다.”
“마을에? 왜?”
“그것은 저희도 잘…….”
그때였다.
산 아래에서 신모가 걸어 올라왔다.
“신 대주.”
“아, 운공은 끝나셨습니까?”
“응.”
“몸은 어떠신지요?”
“완벽해. 다 나았어.”
“다행입니다.”
“지금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때? 날도 좀 서늘해졌겠다, 한판 뛸까?”
신모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저, 대공자님.”
“엉?”
“일단은 전에 말했던 부분에 대해 한 번 더 논의했으면 합니다.”
“논의? 어떤 부분?”
“대공자님을 모시는 것 말입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저 세상을 경험하러 가는 거야. 더는 창응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대공자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강호행은 위험합니다. 어떤 위험이 들이닥칠지 모르지요.”
“피 보는 게 무서워서 칼 못 뽑으면 무사라 할 수 없지.”
“그래도…….”
“게다가 자네들은 본가 소속이야. 본가의 무력 조직이니 대공자인 날 호위해 줄 수 있지만, 임무를 마쳤으면 돌아가서 제 할 일을 해야지.”
“…….”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본가 사정도 썩 좋지는 않아. 많이 바쁠 거라고. 그러니 가서 아버지를 도와드려. 그게 자네들이 할 일이야.”
신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두 개조만이라도…….”
“불가(不可). 내 걱정은 그만하고 제 위치에서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문의 대공자를 지키는 것도 그들이 할 일은 맞다.
그러나 연호정은 단호히 거부했다.
어느 환경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가문이 피해를 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신모가 이내 결심을 굳혔다.
“알겠습니다. 하면 저희는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아버지한테는 내가 따로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
연호정이 도끼날을 툭툭 쳤다.
“다 됐지? 그럼 한판 붙어 볼까?”
“다만, 이번 일까지는 대공자님을 따르게 해 주십시오.”
“이번 일이라니?”
신모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연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서신을 보았다.
“개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리 줘 봐.”
서신을 펼친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신모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마는, 굳이 떠나는 대공자님을 지금에야 붙잡은 데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왠지 좋은 의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용가주.”
그렇다. 서신을 보낸 사람은 바로 모용군이었다.
서신을 접은 연호정의 얼굴에 무심함이 깃들었다.
‘하긴, 말끔하게 마무리되지는 않았지.’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했다. 차라리 먼저 연락을 주니 마음이 편했다.
‘기다리면 알아서 목을 졸라 줄 것을.’
연호정이 견봉에 도끼를 걸쳤다.
“하산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