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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0화 (90/963)

90화. 동상이몽(同床異夢) (2)

연호정과 거지, 소청이 거지 소굴 밖으로 뛰어나왔다.

두 사람의 눈에 저 멀리 산길을 내려오는 세 명의 거지가 보였다.

소청의 눈이 커졌다.

“저것들이 갑자기 왜……?”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다시 가지러 올 때까지 보관 좀 해 주시오.”

쾅!

도끼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연호정이 즉시 움직였다.

후우웅! 화르륵!

백호기로 폐를 활짝 열고, 주작기로 심장을 후끈하게 데웠다. 동시에 두 다리로 벽라진기를 퍼부었다.

터어어어엉!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간 연호정.

그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살기!’

번쩍!

산길을 타 내려오는 거지들의 후방, 한 줄기 날카로운 살기가 일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위험!”

퍼어어억!

거지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몸통이 아니었다. 머리였다. 정확하게 뒤통수에 적중한 무언가가 미간을 뚫고 나와 바닥에 꽂혔다.

‘화살?!’

“으아아아!”

남은 두 거지가 더더욱 속력을 올렸다. 겁에 잔뜩 질린 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더더욱 속도를 올렸다.

터엉! 터어엉!

빨랐지만, 동시에 느렸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예전보다는 빨랐지만, 한순간에 거리를 좁힐 능력이 부족했다.

‘이런 젠장!’

퍼어억!

또 한 명의 거지가 고꾸라졌다. 이번에도 머리가 뚫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커다란 대궁(大弓)을 들고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두 눈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저기서?’

엄청나다.

직선거리만 해도 칠십 장은 족히 넘겠다. 그 먼 거리를 격하고 정확하게 머리를 맞추는 것이다.

번쩍!

또 한 번 날카로운 살기가 일었다.

거리가 훅 좁혀졌다. 거지와의 거리는 이제 십 장이 조금 넘었다.

일순 연호정의 두 눈에 붉은 화광이 일렁였다.

화르르륵! 쾅!

혈익휘천의 삼 보(三步)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그때, 시위가 당겨졌다.

쐐애애애액!

무시무시한 속도.

회전하며 쏘아지는 화살 주변의 대기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엄청나게 빠른 직사(直射)였다.

‘빨라. 놓친다.’

손을 뻗어 거지를 잡아끄는 시간보다 화살이 머리를 관통하는 시간이 더 빠를 것이다.

찰나지간 판단을 내렸다. 내뻗은 손에 현무기를 담았다.

쾅!

“커억!”

거지가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북천십이벽의 반탄력 때문이었다.

사악! 퍼억!

거지의 이마를 스친 화살이 연호정의 팔을 스치고 날아가 땅에 박혔다.

연호정이 재빨리 바닥에 꽂힌 화살을 잡아 뽑고 그대로 산길을 뛰어 올라갔다.

거지는 살았을 것이다. 내상은 피할 수 없겠지만 목숨을 건진 게 어딘가.

이제 중요한 것은 저 이름 모를 궁사(弓師)였다. 저 궁사만 잡으면 된다.

화살이 빗나간 게 놀라웠던 걸까.

잠시 서서 이쪽을 주시하던 궁사가 대궁에 시위를 걸었다.

까가가각!

시위 당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엄청난 장력이 필요한 활인 것 같았다.

‘설마…….’

연호정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묵비?!’

정말 저놈이 묵비라고? 묵비를 이렇게 빨리, 그것도 우연히 만날 수가 있다고?

오만 생각이 다 들었지만, 지금은 머리를 비워야 할 때였다. 저 궁사의 화살이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궁사가 시위를 놓았다.

티이이이잉!

동시에 연호정의 몸이 좌측 대각선으로 이동했다.

퍼억!

화살이 나무 한 그루를 뚫고 땅에 박혔다.

개방도가 죽을 때도 깨달았지만, 정말 엄청난 위력이었다. 아름드리나무를 무슨 두부 뚫듯 뚫더니만 화살의 깃대까지 땅에 박혔다.

이 정도 관통력이면 연호정이라도 정면에서 막을 수 없다. 중간에서 잡아채거나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쉽게 잡아챌 속도가 아니었다.

터어엉! 터어엉!

연호정이 빠르게 접근했다.

‘뭐지?’

궁사는 도망가지 않았다. 허리춤에 달린 화살 세 대를 꺼내 그중 하나를 다시 시위에 걸었다.

선명한 위협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첨예한 살기에 이마가 따끔거렸다.

‘저놈…….’

다급한 상황에서도 연호정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체격이 달라.’

묵비보다 체격이 더 컸다.

즉, 저자는 묵비가 아니다. 묵비보다 기골이 장대했고, 팔다리도 더 길었다.

결정적으로 묵비는 대궁(大弓)이 아닌 각궁(角弓)을 썼다. 특수하게 제작된 각궁을 이용한 연환사격(連環射擊)이 묵비의 주특기였다.

연호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상대가 묵비가 아님을 알았다. 굳이 봐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심장에서 뻗어 나온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콰앙!

극속의 혈익휘천이 단숨에 바위 세 개를 뛰어넘었다.

갑작스레 빨라진 속도였다. 궁사가 당황한 듯 나머지 두 대의 화살도 날렸다.

퍼억! 퍼억!

맞지 않는다.

궁사와의 전투는 거리 싸움이었다. 혈익휘천은 내공 소모가 심한 보법이라 연달아서 쓰기엔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까가가각!

다시 한번 시위가 당겨졌다.

후우우웅!

주작기를 풀고 혈익휘천을 놓았다. 벽라진결을 이용한 신법은 혈익휘천보단 느렸지만, 더 부드럽고 자유로웠다.

‘이십 장!’

이 정도 거리면 도망쳐도 어떻게든 꽁지는 잡을 수 있겠다.

끝까지 궁사에게 시선을 집중하던 연호정은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후우우우웅!

고작 한 대의 화살일 뿐이었다. 그것도 특수하게 제작된 철전(鐵箭)이 아니라 흔한 목전(木箭)이었다.

한데 이 위압감은 무엇인가?

‘전사력(轉絲力)?’

화살 끝에 집약된 기가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몽땅 빨려 들어갈 정도로 고차원적인 전사였다.

문제는 저 화살, 아니 저 무공이 무엇인지를 연호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쩍 벌렸다.

‘용아포(龍牙砲)!!’

궁사가 시위를 놓았다.

부아아아아앙!!

대기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저것이 용아포임을 알아본 순간 연호정은 공격을 잡아내길 포기했다. 그가 단숨에 나무 뒤로 몸을 날렸다.

소용돌이치는 화살이 그대로 나무에 작렬했다.

콰아앙!

굵직한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갈아 버린 화살이 바위 하나를 뭉개고 땅을 터트렸다.

쿠구구구궁.

나무가 쓰러지고 박살 난 바위가 사방으로 튀었다.

콰직! 콰지지직! 쿠구궁!

바위와 바위가 부딪치고, 튕겨 나간 바위가 또 나무 몇 그루를 부수곤 또 다른 바위를 밀어 냈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화살 한 방에 소규모 산사태가 일어났다. 애초에 지반이 약한 야산이었던 듯, 나무가 쓰러지고 바위가 굴러가자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되었다.

콰콰콰쾅!

궁사의 십오 장 거리 전면이 초토화되었다.

쿠구구궁!

비로소 지진이 멈추었다. 자욱한 먼지가 사방에서 올라왔다.

궁사가 죽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두 눈에 섬광이 스쳤다.

“……잡았군.”

십오 장 거리라면 충분히 인기척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것이 확실했다.

‘더 잡아야 하나?’

거지 하나를 놓쳤다. 세 거지 중 자신의 얼굴을 본 놈이 있었다. 안전을 위해선 다 잡아야 했다.

그때였다.

타다닥.

한참 멀리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개중에는 무림인들도 끼어 있었다.

‘별수 없군.’

하긴, 지금에 와서는 봤다고 해도 상관없다. 혹시나 해 다 잡아 죽이려 했을 뿐, 어차피 마차는 이미 굴러가기 시작했으니까.

다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끝까지 자신에게 돌진하던 청년이었다.

‘대단한 실력자였다.’

설마 용아포까지 꺼내 들게 될 줄은 몰랐다. 용아포가 아니었다면 잡혔을지도 모르겠다.

사락.

궁사가 몸을 돌렸다. 볼일이 끝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꼼꼼할 필요가 있었다.

번쩍.

어느새 산등성이 위로 올라온 그림자 하나가 궁사가 달려 나가는 곳을 노려보았다.

* * *

“그래서, 다 잡았는가?”

“그렇소.”

“잘했네. 자, 이것 먹게나.”

“고맙소.”

“고맙기는. 자네나 나나, 벼랑 끝에 몰린 목숨 어떻게든 부여잡고 사는 인생일세. 매번 그리 감사해할 것 없네.”

노인이 건넨 단약을 집어 든 백궁천은 일순 허리를 숙였다.

“쿨럭! 쿨럭! 우웨에엑!”

밭은기침을 뱉던 백궁천이 피를 토했다.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 만인가?”

“……사흘 만이오.”

“이 사람아, 발작 주기가 짧아졌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고.”

약재 몇 개를 뒤적이던 노인이 시커먼 단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도 같이 드시게.”

“고맙소.”

단약 두 개를 삼킨 백궁천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약효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다. 순식간에 몸이 편해졌다.

하지만 백궁천은 이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약효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약이 독하다는 것이고, 독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건 이미 몸이 망가졌다는 뜻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소.”

“뭔가?”

“얼마나 남았소?”

“…….”

“움직임이 예전보다 굼떠졌소. 교룡대궁(交龍大弓)의 시위를 당기는 힘도 줄었소. 어느 순간부터는 내공도 미세하게 소실되는 것 같소.”

“……내공 소실이라.”

노인이 탄식을 머금었다.

“벌써 그 단계까지 갔단 말이지.”

“……많이 안 좋은 거요?”

“전에 말했듯, 착심홍(着心紅)은 독이되 독이 아니네. 중독되는 즉시 독기가 심장으로 모여들지. 바로 해독하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네. 심장에 머문 독기가 생명력을 무한히 빨아들이지.”

“알고 있소. 전에 말해 줬잖소.”

“자네의 의지와 내공 공부가 대단하여 아직 생을 유지하고 있는 걸세. 하지만 착심홍은 독해. 자네의 원정(原精)을 쉬이 뽑아먹지 못하자, 그 대체로 내공을 건드리고 있는 게야.”

“…….”

“어느 정도 기를 빨아들이면 그걸로 끝일세. 심맥이 터져 그 자리에서 즉사를 면치 못할 걸세.”

“그러니까 묻잖소. 얼마나 남았는지.”

“보름.”

“…….”

“길어야 보름일세. 짧으면 닷새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네.”

충격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백궁천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령(茄玲)의 시술이 내일이라고 했소?”

“그렇다네. 전에 말했듯 칠 주야는 걸릴 걸세.”

“닷새…… 칠 주야라…….”

백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바로 시작하겠소.”

노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안 되네. 각혈을 했으니 오늘 하루는 안정을 취해야 해.”

“시간이 없소. 그놈이 언제 또 나올지 모르오. 지금부터 대기해야 하오.”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안 쓰러질 수 있도록 단약이나 독한 놈으로 챙겨 주시오.”

“후우.”

결국 한숨을 쉰 노인이 탁자 밑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혹시 몰라서 만들어 둔 것일세. 조석으로 두 알씩 자시게.”

“고생하셨소.”

“고생은 자네가 다했지.”

“그리고 앞으로도 고생해 주시오.”

상자를 받은 백궁천이 문을 향해 걸었다.

그때였다.

“언제부터 착심홍이 죽을병으로 둔갑했어?”

파아악!

재빨리 몸을 돌린 백궁천이 시위를 당겼다. 그야말로 번개 같은 속도였다.

백궁천이 눈이 번뜩였다. 한 줄기 그림자가 창가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포착한 것이다.

피슉! 쐐애애애앵!

백궁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빗맞힌 것이다.

터엉! 까가가각!

재차 시위를 걸었지만 늦었다. 엄청난 속도로 들어온 그림자는 부드러운 물결처럼 움직이더니, 단숨에 노인을 제압했다.

“끄아악!”

노인이 허리가 꼿꼿해졌다.

등 뒤에서 그의 팔을 꺾고 목을 조른 청년이 눈을 빛냈다.

“인사는 아까 했지?”

백궁천의 눈이 흔들렸다.

“넌……?!”

“반응 속도 예술이네. 자세도 그렇고, 그 녀석이랑 판박이야.”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활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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