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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1화 (91/963)

91화. 동상이몽(同床異夢) (3)

까드드득.

시위를 당긴 팔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두둑.

노인의 목을 조른 팔뚝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첨예한 대치였다. 백궁천의 실력이라면 노인 뒤에 드러난 연호정의 신체 어느 곳이라도 노릴 수 있었다.

문제는 연호정 역시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빗맞히면 그 즉시 노인의 목이 부러질 것이다.

“…….”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매서운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백궁천이 서서히 활을 내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네.”

“인질을 풀어 줘라.”

“역시 인질로서의 효용 가치가 있었군. 절대 놔주면 안 되겠어.”

백궁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냐?”

“너에게 알려 줄 이름 따위 없다.”

“그럴 줄 알았지. 그럼 하나만 묻자.”

“…….”

“묵비와 동문이냐?”

백궁천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팔에 힘을 주었다.

두둑.

“끄르륵.”

노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백궁천의 눈매가 떨렸다.

“묵비가 누구냐.”

“묵비를 모른다고?”

“모른다.”

“탄법, 신법(身法), 조준 사격 전 자세를 반 치에서 한 치 사이로 하강하는 것까지.”

“……!”

“거기에 넌 용아포까지 썼어. 그런데 묵비를 모른다고?”

백궁천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용아포를 알다니, 네놈은 누구냐?!”

연호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어제 선보인 파괴력 넘치는 궁술은 실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 정도 궁술에 낭비 없는 신법은 천하의 고수 소리 듣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솔직하다. 천성적으로 무뚝뚝할 뿐, 솔직한 성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자였다.

“질문한 건 나야.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묵비를 모르나?”

“……모른다. 그런 이름의 귀궁수(鬼弓手)는 없다.”

저도 모르게 귀궁수라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스스로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가명이었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기야 강호에 본명으로 활동하는 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귀궁수는 뭐지?”

백궁천이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너는 개방도를 죽였어. 사태는 충분히 커졌다. 판을 더 키울 생각이 아니라면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아.”

“……그 사람을 놔줘라.”

“놔줄 거면 사로잡지도 않았다.”

“자존심도 없나? 그 실력으로 힘없는 노인을 인질로 잡다니, 수치스러운 줄 알아라.”

“씨도 안 먹힐 도발은 거기까지 해. 이건 비무가 아닌 싸움이다.”

연호정이 노인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힘없는 노인이라니?”

“……?”

“쓸 만한 내공을 봉인해 두고 있군. 피부는 늘어졌어도 근육은 제법 탄탄해. 이 정도 몸과 내공을 유지하려면 수련이 꽤 필요하지.”

“뭐……?”

“제대로 확인도 안 한 모양이군.”

툭.

연호정이 노인의 마혈을 짚었다. 노인의 몸이 마비되어 뻣뻣해졌다.

“마혈을 짚을 때도 반탄력이 상당해. 진기를 이 할 이상 쓰지 않았다면 짚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백궁천의 눈이 흔들렸다.

마혈을 짚는 과정을 직접 보았다. 분명 상대의 손가락이 주춤했다. 혈(穴)에서 강한 저항을 느낀 것이다.

무의식중에 저 정도 저항을 일으키려면 일류의 내력이 필요하다.

‘저 정도 내공을? 어떻게?’

백궁천이 노인, 고평(高坪)의 눈을 보았다.

고평의 눈빛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마혈이 짚이면서 아혈(啞穴)까지 짚인 듯, 입도 뻥긋 못 하고 있는 채였다.

“……고 노인?”

그가 아는 고평은 내공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익히지 않은 범인(凡人)이었다. 평생을 의술에 힘을 쏟은, 세상이 모르는 명의(名醫)였다.

“착심홍도 그렇다.”

백궁천이 다시 연호정을 보았다.

인질의 마혈을 짚고 아혈까지 봉했다. 그런데도 빈틈이 없었다. 팔뚝으로 고평의 목을 둘렀는데, 조금만 힘을 줘도 경동맥이 눌릴 것이다.

“착심홍이 언제부터 사람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독이 된 거지? 그런 독은 고독(蠱毒) 계열에서도 극히 드물어.”

“……아니라는 것인가?”

“당연하지.”

고평을 힐끔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눈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착심홍은 침착독(沈着毒)의 일종이다. 신체 내부 장기에 들러붙어 변성을 일으키지. 그중 유독 심장에 강한 작용을 하는데, 이는 광물에서 얻은 독을 한 차례 개량했기 때문에 나오는 특성이다.”

“……!”

“하지만 신체가 강건하고 내력 수발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 자에게는 통하지 않아. 장기에 침착되기도 전에 진기(眞氣)가 독을 배출해 내기 때문이다. 즉, 일정 수준 이상 내공을 연마한 고수에게는 어지간해선 통하지 않는 중하품(中下品)이란 말이다.”

착심홍은 흑도 뒷골목에서도 소수의 아는 사람만 쓰는 독이었다.

즉, 알아보려 해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더하여 그것을 알아보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착심홍보다 강한 독이 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삼류 건달패나 흔해 빠진 흑도 문파의 전력에는 통할지 몰라도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연호정은 착심홍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적도 있었다.

그래도 멀쩡했다. 흡입하자마자 홍천기(洪天氣)가 독기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작기(朱雀氣) 때문에 심장 쪽은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소멸했다.

그런 중하품의 독에 백궁천 정도 되는 고수가 중독되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즉, 이놈이 의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약자도 아니며, 당신은 착심홍에 중독된 것도 아니야.”

백궁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고평에게 물었다.

“저 청년의 말이 맞소?”

아혈이 짚여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백궁천이 연호정에게 말했다.

“고 노인의 아혈을 풀어라.”

“싫다.”

“뭐?”

연호정이 냉혹한 말을 쏟아 냈다.

“허상을 벗겨 주고 진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난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야.”

“……?!”

“귀궁수가 뭐냐? 그것부터 설명해라.”

츠츠츠.

백궁천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살기가 아니었다. 그 살기에는 솔직한 다급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한시를 아까워하는 것이다.

“말장난할 때가 아니다! 어서 그를 풀어 줘!”

“내게 명령할 입장 아니다. 시간 더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 내 질문에나 대답해.”

“이익!”

“당장.”

서둘러 말하라지만 정작 연호정의 얼굴엔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냉혹한 표정과 답을 종용하는 언행이 상대에게 강한 압박감을 주었다. 비슷한 상황이라도 백궁천과는 보여 주는 모습이 전혀 다른 것이다.

결국 백궁천이 입을 열었다.

“귀궁수는 관일곡(貫日谷)의 새로운 예신(羿神) 후보를 말하는 것이다.”

“관일곡? 그게 뭐지? 너 같은 궁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이냐?”

관일곡은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이름이었다.

하지만 백궁천은 마음이 급했다. 만일 고평이 정말 자신이 아는 의원이 아니라면, 한시라도 빨리 다른 의원을 구해야만 했다.

“그렇다.”

“들어 본 적 없는 문파군.”

“관일곡은 강호의 문파 따위가 아니야. 태양신(太陽神)을 모시고, 동시에 그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살신교(殺神敎)다.”

살신교, 즉 신을 죽이는 종교란 뜻이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살신교……?’

그는 과거 묵비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의 신은 저열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음교가 싫습니다.’

말수도 많지 않고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던 묵비가 드물게 분노를 내보이던 순간이었다.

“무림 문파가 아니라면서 굉장한 궁술을 가르치는 모양이군.”

“당연하다. 태양신을 죽일 방법은 오로지 궁술뿐이야. 신화 속 후예(后羿)가 활을 쏘아 아홉 태양을 떨어트렸듯, 우리 역시 궁술로서 하늘에 닿으려는 이들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도통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

묵비는 이에 관한 얘기는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저들 역시 종교 집단의 일종인 것 같았다.

‘음?’

문득 든 생각에 연호정이 재차 물었다.

“수가 적은 모양이지?”

“무슨 말이냐?”

“네가 속한 집단, 관일곡의 궁수들 말이다. 그리고 예신이라는 건 또 뭐야?”

백궁천의 얼굴에 드리워진 다급함이 점점 짙어졌다.

“충분히 알려 주지 않았는가! 당장 그를……!”

두둑.

고평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백궁천이 이를 악물었다.

“……관일곡의 예신이 되기 위해선 귀궁수들끼리 경합을 벌여야 한다.”

“경합?”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말하는 거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살아남은 한 사람이 그 예신인지 뭔지가 되는 건가?”

“그렇다.”

“설마하니 지금도 그 경합 중인 건 아니겠지?”

“맞다! 그러니 당장 그를 풀어 줘!”

예신이 되기 위한 살육전.

‘그럼 묵비가?’

살아남은 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한데 왜 돌아가서 예신인지 뭔지가 되지 않았지? 뭔가 이유가 있었나?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

연호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다급한 와중에도 백궁천은 깨달았다. 지금의 질문이야말로 저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는 걸.

“현재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중반쯤 됐겠군. 키는 육 척이 조금 안 되는 장신에 너처럼 대궁이 아닌 각궁(角弓)을 주로 쓴다. 주 무공은…….”

“백향(白享)?!”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백향이라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던 백궁천이 떠듬떠듬 말했다.

“너, 향이와 아는 사이냐?”

친근한 어조다. 마치 형제나 사촌, 친한 친구를 부르는 듯하다.

“아는 사이까지는 아니고…… 뭐, 들어 보니 맞는 것 같다만.”

“네가 말한 나이와 키라면 향뿐이다. 이번 경합에 참여한 귀궁수 중 이십 대 중반의 연배는 향이밖에 없어. 그리고 향이는 각궁을 쓴다.”

“……좋아. 그럼 백향은 어디에 있지?”

“모른다.”

“모른다고?”

“정확한 위치는 몰라. 하지만 팔공산 인근에 있을 확률이 높다. 녀석은 경합이 벌어진 후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가만히 백궁천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고평을 놓아주었다.

백궁천의 눈이 번뜩였다.

투웅!

“커헉!”

고평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허공을 격한 지풍(指風)이 아혈을 푼 것이다.

수준 높은 내공 조예였다. 단순히 화살만 잘 쏘는 게 아니라 무공 전반에 대한 지식과 단련이 초일류 수준이었다.

백궁천이 고평을 들어 올렸다. 거의 멱살을 잡은 것에 가까운 행태였다.

“저 청년이 말한 게 사실인가?”

“쿨럭! 어, 어찌 그러시는가! 설마하니 내가 자네를 속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됐어, 다른 건 필요치 않아. 이것 하나만 묻겠다.”

백궁천의 눈이 불을 뿜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마주하는 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고평의 얼굴이 굳을 대로 굳어졌다.

“가령의 몸을 고칠 수 있는 거겠지?”

“…….”

“왜 말을 못 해! 칠음절맥(七陰絶脈)을 고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칠음절맥?”

백궁천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칠음절맥이라니? 구음절맥(九陰絶脈)이 아니라?”

“……뭐?”

“칠음절맥이라는 게 어디 있어? 과다한 음기(陰氣)가 축적되어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다 얼어붙고, 나중엔 생명마저 끊어진다고 해서 구음절맥이 아니었나?”

“……?!”

“기경팔맥 중 일곱 개만 골라서 얼어붙는다고? 그따위 섬세한 병도 있나?”

백궁천이 고평을 노려보았다.

연호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거 순 사기꾼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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