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우연이 만들어 낸 필연 (5)
연호정이 절을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거라.”
“예.”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매무시를 바로 했다.
여전히 험한 외양이었다. 오면서도 수련을 지속한 듯, 의복 곳곳이 찢어지고 때가 탔다.
손님이 옆에 있지만, 정말이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면서 또 수련한 것이냐?”
“예.”
당연하다는 투였다.
연위는 아들의 그 특별한 것 없는 대답이 흡족했다.
무인은 언제 어디서나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법이다. 동시에, 최고점의 위치를 높일 수 있도록 하루하루 연마해야 함이 마땅했다.
무림인 대다수가 그 당연한 수련과 인내를 등한시하곤 한다. 하지만 아들은 달랐다.
기본을 지키고 진리를 따른다. 아들은 필시 크게 될 것이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큰 사람이 되었다.
‘굉장하구나.’
사람들이 보고 있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
연호정을 보는 연위의 눈에 솔직한 놀라움이 일었다.
‘대체 언제 이리 컸단 말인가?’
거친 수련으로 진기가 불안정했다. 내공을 극한까지 쥐어짠 모양이었다.
그러고도 이 정도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보행으로 다가올 때 느꼈지만, 속까지 꽉 찬 바위를 보는 것 같았다. 진기는 불안정할지언정 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기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언뜻 이전과 다를 것이 없는 듯했으나, 연위는 연호정의 육체가 발하는 무시무시한 폭발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눈.
가문을 나서기 전에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지만, 지금은 가히 강철을 연상케 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길에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뜻이었다.
‘심(心), 기(氣), 체(體).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잘 가꾸었구나.’
연위가 입을 열었다.
“사내는 세상에 나가야 어른이 된다더니, 이번 중원행이 네게 큰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돌려 말하는 칭찬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습니다.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되지요.”
다른 건 몰라도 저 성격은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더 독해진 것 같았다.
연호정의 무공은 이제 연배 운운할 것이 아니었다.
절정고수에도 급이 있는 법이다. 연호정이 뿜어내는 외기(外氣)만 보면, 놀랍게도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장로급 못지않은 듯싶었다.
제 아들이지만 이해하기 힘든 성장 속도였다. 유례가 없었다.
‘한데 저 기(氣)는?’
벽라진결의 화후가 벌써 구 성(九成)이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벽라진기가 감싸고 있는 독특한 기운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셋이나 되었다.
하나하나가 특색 넘치는, 그러면서도 서로를 해하지 않는 일맥(一脈)의 내공들.
가만히 아들의 몸을 살펴본 연위가 물었다.
“기연을 얻었느냐?”
연호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과의 만남, 부딪침 하나하나가 기연입니다. 그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지요.”
“말은 좋구나.”
연호정의 내공, 무공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눈여겨볼 것이 많았다. 연위는 그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해 보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연위가 묵비를 바라보았다.
여인치고는 키가 상당히 컸다. 신체는 호리호리했고 팔다리가 길었다. 언뜻 봐도 유연하기 그지없는 신체였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했지만,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었다. 건강미 넘치는 외양에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하게 뻗은 미녀였다.
하지만 외양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연위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고수?’
놀랍게도 아들이 데려온 처자 역시 고수였다.
고수도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품고 있는 내공은 오히려 연호정 이상, 거의 초절정고수의 내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어떻게 저런 엄청난 내공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지닌 내력의 절반 이상이 전신 세맥에 흩어져 있어, 당장 활용할 수는 없는 듯했다.
‘뛰어난 내공. 하지만 실력은…….’
아들 못지않게 불안정한 진기를 보니 비슷한 수련을 하면서 온 듯한데, 전체적으로 무디다는 인상을 받았다.
‘호정보다는 아래구나.’
내공은 연호정을 넘어서지만, 실제 실력은 아래다.
연위 정도가 되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이 처자는 무인으로서의 칼 같은 예기가 상당히 부족했다.
‘그래도 대단하다. 연배를 생각하면 더더욱.’
연호정이 팔꿈치로 묵비를 툭 건드렸다.
묵비가 아차 싶어 고개를 숙였다.
“백…… 아니, 묵비라고 합니다.”
“묵비?”
“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한 이름이군.’
뭐, 어떤가? 세상엔 희한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다. 무림이라면 더더욱.
“호정의 친구 되시오?”
묵비가 머뭇거렸다.
연호정이 냉큼 대답했다.
“친구입니다.”
“그래?”
이전처럼 목소리에 고저는 없었지만, 약간 힘이 빠진 듯도 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반갑소, 묵 소저. 호정의 아비라오.”
“바, 반갑습니다.”
묵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엄청나다!’
그녀는 연위와 같은 고수를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기파도 내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태산의 산봉우리만큼이나 거대한 신검(神劍)이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일 만큼 대단한 고수였다. 상대의 엄청난 기도를 엿본 순간, 몸 전체가 얼어 버린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궁천 오라버니도, 곡주도 십초지적이 안 될 거야!’
그 정도가 아니다.
예신합전에 참여했던 모든 귀궁수가 덤벼들어도 이길 수 없다. 구룡파천궁을 대성하기 전까지는 그 앞에서 활시위도 당기기 힘들 듯했다.
연위가 묵비의 허리춤에 걸린 활과 화살통을 보았다.
“궁술(弓術)을 쓰시는 모양이오.”
“……네? 아, 네! 그렇습니다!”
묵비답지 않은 우렁찬 대답이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이 왜 이러나 싶었던 것이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한 실력자로군. 아들의 친구라 하니, 내 편히 대함세.”
“네!”
“……?”
“…….”
“커험.”
헛기침으로 묘한 분위기를 날려 버린 연위가 연호정에게 물었다.
“어인 일로 네가 친구를 다 데려왔느냐?”
“아버지께 부탁 하나만 드리려고요.”
“부탁?”
연호정이 묵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 앞으로 본가에서 지내게 해도 됩니까?”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동시에 묵비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연위의 눈빛이 변한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 것이다.
“그 말은, 식구로 받아들이자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게 부담스러우시다면 객당에서라도 지낼 수 있게 좀…….”
“허튼소리.”
연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친구라는데 당연히 빈객(賓客)으로 예우해야 마땅하다.”
“아, 예.”
연위가 묵비에게 말했다.
“소저는 달리 연고가 없는가?”
“네? 아, 넵!”
묵비 입장에선 꽤 우울해질 수 있는 얘기지만 그것도 연위가 하니 당연하게 넘겨 버릴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연위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달리 갈 곳이 없다면, 연가를 내 집이라 생각하고 지내도 되네.”
“……네?”
“호정이 벗을 데려온 건 자네가 처음이야. 저 무심한 놈이 오죽 마음에 들었으면 식구로 받아들이자는 소리를 할까.”
“……?!”
“편히 지내게. 의식주 걱정은 하지 말고.”
묵비가 놀라서 연위를 보았다.
여전히 무서운 눈빛이었다. 초자처럼 투명한 눈빛 속에 천하 명검의 예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인의 예기만 담겨 있지 않았다. 항상 눈치만 보며 살아오던 묵비는 연위의 눈빛에서 솔직한 호감을 읽을 수 있었다.
대가 없는 호의였다. 아들의 친구이니 당연히 한 식구라고 생각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묵비도 놀랄 만큼의 순수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묵비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주책없이 저도 모르게 울컥하게 된다. 묵비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관.”
“예, 가주님.”
“호정 거처 옆, 연려원(燕麗院)이 저 아이의 거처일세. 안내해 주게.”
“알겠습니다.”
이백현이 웃으며 묵비에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네.”
이백현을 따라가기 전, 묵비가 연위에게 한 번 더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편히 쉬시게.”
“네.”
그렇게 묵비가 이백현을 따라 거처로 갔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놀라운 무공을 쌓았거늘, 마음은 도자기처럼 여리구나.”
“그게 문제입니다. 좀 독해져야지요.”
“너처럼 되기도 쉽지 않다. 강요할 문제가 아니야.”
“그런 게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독해지겠지요.”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보아하니 심상(心傷),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아이 같구나.”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예. 그럴 만도 하지요.”
“몸에 난 상처는 치료하면 낫지만, 심상은 누가 돕는다고 낫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옆에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이니, 시간이 날 때마다 잘 다독여 주어라.”
“예.”
연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연호정을 보는 연위의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
한순간 사람이 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만약 묵비가 지금의 연위를 봤으면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던하기로는 천하제일인 연호정도 아버지의 변화에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괜스레 험해지는 분위기에 애써 주제를 돌려 보았다.
“아! 그나저나 지평 이 녀석은 어디로 갔지? 형이 왔는데 어째 머리카락 한 올…….”
“네 녀석이 무심한 줄은 내 알고 있었다만, 가히 상상을 초월하더구나.”
목이 칼칼하다. 연호정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연위가 냉혹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릇 천륜(天倫)이란 부모와 자식, 혈육지간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는 것이다. 그 도리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쉽지만 당연히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를 뜻하는 바다.”
“콜록!”
“나는 지금껏 내 자식을 천륜도 모르는 몹쓸 놈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세상에 나가 천하를 배우는 아들에게 매일 안부 서신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만, 잘 지낸다는 간단한 서신 한 장 보내지 못할 만큼 바빴단 말이더냐.”
“그게요, 아버지. 어떻게 된 일이냐면…….”
“시끄럽다!”
귀가 우웅 하고 울리는 것 같다. 연호정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연위가 몸을 돌렸다.
“여로에 지쳤다는 변명은 듣지 않겠다. 따라오너라.”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 나이에 아버지께 혼이 나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웠고, 돌이켜 보면 마땅히 잘못한 게 자신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그를 울적하게 했다.
결국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은 심정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야 했다.
그날, 연호정은 언제 읽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명심보감(明心寶鑑) 효행편(孝行篇)을 달달 외도록 읽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