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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03화 (103/963)

103화. 발상의 전환 (3)

“허허, 오셨는가?”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연호정입니다.”

“남사스럽게, 그런 인사는 되었네.”

편일강은 여전했다.

비록 한 번 본 게 전부였지만 특유의 넉넉한 분위기와 선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일까? 꽤 오랜만에 보는데도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하고 편안했다.

“한데 옆에 처자는 누구신고? 혹시 미래를 약속한 사이신가?”

연호정의 얼굴이 구겨진 놋그릇처럼 찌그러졌다.

왜들 자꾸 오해하고 난리야? 이러면 재밌냐고.

“아닙니다. 친구입니다.”

“어허, 그래?”

묵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묵비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편일강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순한 처자로구먼. 반갑네. 편하게 편 노인이라 불러 주시게.”

“아, 네.”

“한데…….”

편일강의 눈이 반짝였다.

“어허, 독특하구먼?”

“네?”

“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인을 만나 봤네만, 이리 잘 연마된 궁사(弓師)는 또 오랜만에 보는군.”

묵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활도, 화살통도 다 놓고 오는 길이었다. 그전에 무공을 익힌 티도 내지 않았다. 한데 편일강은 한눈에 자신의 주력 병기를 알아본 것이다.

‘굉장하시구나.’

범상치 않은 노인이다. 느껴지는 내력은 일천하지만, 평생을 쇠와 불을 다루고 산 노인의 눈은 어떤 고수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한데 어인 일로 오셨는가?”

연호정이 견봉에 걸치고 있던 도끼를 건넸다.

“이게 이 지경이 되어 버려서요.”

“음?”

편일강이 도끼날과 창대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허! 이 대부(大斧)가 벌써 이리 상했단 말인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할 게 무에 있나. 병기야 쓰다 보면 흠이 가고 깨지는 게 당연한 일인 것을. 다만, 이 대부는 그저 무겁기만 한 병기가 아니라네. 좋은 철을, 좋은 장인이 열정을 다해 만든 것이지.”

편일강이 혀를 찼다.

“내 세상사에 어둡지만, 근래 자네의 이름을 심심찮게 들었다네. 저 구주명가를 상대로 큰 싸움을 벌였다고?”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들으셨습니까.”

“구주명가라면 공적으로 몰리기 전까지 천하제일의 무가라 불리던 가문이 아닌가. 놀라운 고수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겠지. 하나, 그러한 고수들과 부딪쳤다 한들 벌써 이리 상할 건 아닌데.”

편일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내공이 몹시 거친 모양일세.”

보면 볼수록 범상치가 않다.

좋은 장인은 무인의 벗이라지만, 경지에 오른 장인이라도 무인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무인만이 아는 지식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한데 편일강은 달랐다. 병기에 난 흔적을 보곤 한눈에 사용자의 내공 특성까지 유추해 내고 있었다.

‘굉장한 분이야.’

방대한 지식, 극에 이른 안목, 철저한 장인 정신.

모든 것을 궁극에 이르도록 단련한 진짜 장인이다. 아버지께서 왜 신공(神工)이라 높여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팔십 근 중병을 이리 손상케 할 만큼 거친 내공의 소유자라…….”

잠시 고민하던 편일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 자네를 위한 멋들어진 도끼를 제작해 주겠네.”

기실, 이 대부는 기존에 있던 것을 편일강이 손본 것이었다.

원체 잘 만들어진 병기였기에 그것만으로도 보병(寶兵)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이 쓰기에는 다소 약하다. 편일강은 이 기회에 새로운 병기를 만들어 볼 작정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면, 시일은 얼마나 걸릴는지요?”

편일강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또 세상으로 나갈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명성 높은 무인에게는 만인의 찬사 외에, 명성을 노리는 적도 생기는 법이지. 출도하기 전에 반드시 받아야겠구먼?”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가 없지요.”

“많이 급하신가?”

“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할 일이 생겨서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만 조급해하진 않으려 합니다.”

“좋은 마음가짐일세. 내 자네에게 꼭 어울리는 병기를 만들어 줌세. 얼추 두 달은 걸릴 걸세.”

두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다만 편일강 정도의 장인이 두 달이나 공을 들일 정도라면 보통 물건은 아니리라.

연호정이 묵비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혹시 이 친구에게 어울릴 만한 각궁(角弓)이 있을까요?”

“각궁이라?”

“예. 장력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습니다. 파괴력 넘치는 궁술이 일품이라서요.”

편일강이 고개를 저었다.

“활이 있기는 하네만, 이 처자가 쓸 만한 활은 없을 듯싶네.”

“그렇습니까.”

“다만 아는 사람에게 수소문해 보겠네. 도끼 제작이 끝날 즈음에는 받아 볼 수 있도록 하겠네.”

묵비가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허허허.”

할아버지라?

처음 본 처자에게 신공이 아닌 할아버지라 불렸다.

모두가 그를 어려워했지만, 이 처자는 아닌 것 같았다. 친근한 호칭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따로 주문할 것은 없는가?”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도끼 창대 끝부분에 고리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고리?”

“예, 무게 중심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거야 큰 문제가 아니네만, 따로 쓸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겐가?”

“쇠사슬을 걸어 볼 생각입니다.”

편일각의 눈이 커졌다.

“쇠사슬을? 무거운 도끼 끝에?”

“예.”

“……허허, 자네가 어떤 무공을 구사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군.”

“제가 워낙 상식 없는 놈이라서요.”

“하면 자네, 쇠사슬도 다룰 줄 안다는 얘기인데.”

“그렇습니다.”

“쇠사슬…… 쇠사슬이라. 팔십 근 거병조차 손상시키는 내공에도 버틸 수 있는 철삭(鐵索)…….”

편일강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알겠네. 염두에 두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얼추 완성될 때 즈음 사람을 보내겠네. 오늘부터 바빠지겠군.”

그렇게 편일강의 대장간에서 나온 두 사람이 거리를 걸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어때? 우리 집은.”

“네? 뭐가요?”

“지낼 만한가 묻는 거야.”

“아, 네. 좋아요. 다만 좀…….”

“누가 괴롭히나?”

묵비는 목뼈가 부러져라 고개를 저었다.

“절대,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다들 잘해 주시는걸요.”

“그럼 뭐가 문제야?”

“다만…… 제가 할 일을 하인분들께서 해 주시니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인분들이라? 호칭 한번 걸작이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야. 마땅히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지. 그들에게는 그것이 직업이다.”

“그래도요.”

“물론 나도 어지간한 일은 직접 해. 다만, 그들이 제 일을 할 시간에 너 역시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중할 무언가…….”

묵비의 눈이 반짝였다.

“무공이군요.”

“이를테면, 그런 것이지.”

연호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아직 네 실력을 직접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다. 네 무공은 아직 완성에서 한없이 멀다는 것.”

묵비가 담백하게 인정했다.

“멀어도 많이 멀었죠.”

연호정은 흑암제 시절, 묵비가 무공을 완성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기(神技)에 이른 절대궁술. 눈에 보이는 모든 영역을 격살하는 무적의 사격술과 초근접전의 맨손 박투로 오대신장과 동수를 이룬, 약점 하나 없는 환상적인 무(武).

연호정의 눈이 밝아졌다.

“정 그러면 내 수련 시간에 함께하지.”

“그래도 돼요?”

“서로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묵비가 움찔했다.

연호정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왜 그래?”

“음…….”

“뭐야, 그 떨떠름한 표정은?”

묵비가 떠듬떠듬 말했다.

“저는…… 그러니까, 연 공자와 가정을 이룰 생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묵비도 이 난리다.

“이 자식이 장난하나. 미쳤어? 내가 언제 너랑 혼인하자고 했냐!”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아, 혈압 쓰벌.”

“그리고 들어 보니까…….”

“들어 보니까 뭐!”

묵비가 우물쭈물 말했다.

“나이도 내가 많은 것 같은데.”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요.”

연호정은 코웃음을 쳤다.

“놓고 싶으면 놔. 누가 뭐래?”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말 놓으라고 하면 누가 놓을 수 있겠어요.”

“내가 언제 노려봤어? 내 눈깔은 원래 이래.”

“도끼 쓴다고 도끼눈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너 원래 그렇게 달변이었냐?”

“말할 기회가 적었으니까요.”

“씻을 기회는 많으니까 자주 씻고 다녀라.”

“아, 제발!”

티격태격하며 가문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연인 같지는 않아도 친구처럼 보이긴 했다.

* * *

“가주님.”

“음.”

“아무래도 확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위가 서늘한 눈으로 이백현을 바라보았다.

이백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지만, 이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현재 강소의 분가들은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쏟아지는 물량을 막지 못할 겁니다.”

“강소성은 넓다네. 굳이 본가가 무역 사업을 독식할 필요는 없어.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는 것. 공생(共生)이야말로 평화의 지름길이네.”

“저 역시 가주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이 문서를 보십시오. 벌써 여기저기서 다툼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조율과 합당한 나눔이 필요하지요. 가주님께서 이 일을 조율하실 필요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본가는 강소성 무역 사업의 칠 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음.”

“워낙에 거친 이들입니다. 특히나 절강 쪽은 중간에서 조율을 해 줄 대표 문파도 없는 실정입니다. 차라리 그곳까지 손을 뻗어서, 동해 전체의 무역 사업에 관여하는 것이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참 고민하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은 합당하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으니.”

이백현이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상황이 급하다고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입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정을 부르게.”

이백현이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큰아들을 부른다. 그만큼 연호정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리라.

부자간의 신뢰가 보기가 좋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연호정이 들어왔다. 땀에 흠뻑 젖은 걸 보니 한참 수련 중이었던 모양이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앉도록 해라.”

“예.”

연위는 연호정에게 돌아가는 사정을 설명했다.

“……해서, 본가의 사업을 절강까지 늘리자는 제안이 나왔다. 정확히는 공생을 위한 사전 작업이지만 말이다.”

“오호.”

“네 생각은 어떠하냐?”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절강이라.’

절강까지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유사시에는 군자금(軍資金)으로 운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은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

“그래.”

“아시겠지만, 절강에는 모용세가의 지부가 하나 있습니다. 해상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지요.”

연위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는 모용세가가 가문에 세작을 파견한 걸 잊지 않았다. 아들이 모용가주와 손을 잡고 명가를 무너트렸지만, 기실 모용세가 역시 적이라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부분이 걸리는구나. 내, 모용세가가 한 짓을 잊지는 않았으나 지금 당장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무리입니다. 지금은요.”

“따로 생각이 있는 것이냐?”

연호정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도.

‘모용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찬성입니다. 이 부장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단 말이지.”

“다만,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 조사가 필수 아니겠습니까?”

연호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두 달 뒤, 제가 직접 절강으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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