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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08화 (108/963)

108화. 고개를 들어야 하늘이 보인다 (2)

“오랜만이오.”

“그러게요. 그때 하남에서 뵙고 처음이네요.”

“그렇군.”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 몰랐어요. 인연은 인연인 모양이에요.”

글쎄? 그 인연이 그냥 인연인지, 살벌한 악연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나저나 이분은?”

묵비가 당황하여 모용연화를 올려다보았다.

“아, 저는…….”

뭔가 자신을 소개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막막했다. 연가 사람들과는 친분을 맺었지만, 아직 타인과의 교류가 어색하기만 한 그녀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친구요.”

“친구요?”

모용연화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렇군요. 친구분.”

그녀는 연호정 성격상 친구가 많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호정이 당당하게 친구라 소개하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묘한 우연이네요. 연 공자께서도 절강에 볼일이 있으신가요?”

절강.

연호정은 모용연화의 말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항주가 아니라 절강. 그렇다면 이 녀석은 곧 항주를 뜬다는 말이군.’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라면 항주의 매력에서 쉬이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모용연화는 아니었다. 비록 강호 경험이 많지 않지만, 그녀는 똑똑했다. 모용군이 직접 가문의 일을 맡길 정도로.

과연 그녀의 목적은 무엇일까?

‘……푹 쉬려고 했더니만, 이거 안 되겠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할 겸 왔소.”

“호호, 구경이라…… 구경 좋죠. 절강은 이름난 명소가 많으니까요.”

흑백이 또렷한 모용연화의 눈 속에 탐색의 빛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연호정이 고작 구경하겠답시고 절강까지 올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상대를 인정하느냐와 별개의 문제였다.

연호정은 이유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그를 그렇게 보았다.

“그럼 즐거운 식사 시간 보내세요. 저도 일행이 있어서 말이죠.”

“그러시오.”

“연이 닿으면 또 뵈어요.”

모용연화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일행에게 돌아갔다. 연호정이 워낙 날카로운 사람인 걸 아니, 뭔가를 캐내기엔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옳았지만, 그 판단이 너무 느렸다.

“뭐 먹을래?”

“네? 아, 요리요? 글쎄요. 종류가 너무 많아서…….”

“그럼 서너 개 시켜 보도록 하지.”

“비싸지 않아요?”

“뭐 어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먹어 보겠냐. 그리고…….”

연호정이 모용연화를 보았다.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곱게 웃고 있던 모용연화도 문득 연호정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며 부딪쳤다.

“……지금 든든히 먹어 둬야 나중에 후회를 안 하지.”

“네?”

“다 먹고 쉬고 있어.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하루 정도 걸릴 거야.”

묵비는 당황했다.

“같이 안 가고요?”

“지금은 나 혼자가 나아. 그리고, 너도 좀 쉬어야 할 것 아냐?”

“그렇긴 한데…… 뭐, 혼자가 낫다면 어쩔 수 없죠.”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라.”

“나 애 아니에요.”

“차라리 애였으면 어디 맡기기라도 했겠다.”

“쳇.”

연호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공을 끌어 올려 안력을 집중하니, 저 멀리 서호 남쪽에서 어기적거리는 거지 몇 명이 보였다.

그날 밤.

거처로 돌아온 연호정은 제법 고급스러운 장포를 걸치곤 도끼를 들었다.

‘가 볼까.’

훅!

창틀에 발을 올린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부드럽고도 조용하다. 그런 와중에도 은근한 품격이 느껴졌다. 고요함 속에 피어오르는 군자의 향기, 천종운행비는 연가 무공의 특성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신법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서호 인근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붙었군.’

벽라진기가 그의 감각을 한층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나, 둘, 셋. 셋이군.’

은밀하고도 재빠른 신법이었다.

서호 옆, 큼직한 버드나무 옆에 선 연호정은 고요한 호수를 보며 감각을 극대화했다.

‘거리는 이십 장.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연호정의 동공이 점점 파랗게 물들었다.

가내 무사들과의 수련으로 잠잠해졌던 그의 기도 속, 흑암제의 광기 어린 살기가 풀려 나왔다.

‘모용연화…… 사람을 함부로 감시하면 안 되지.’

그가 버드나무 앞으로 돌아와 붙었다. 감시자들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각이었다.

잠시 후.

사박.

복면인 하나가 조심스레 나무에 접근했다.

순간 그의 눈이 흔들렸다.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그가 사방을 훑었다.

여전히 감시 대상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풍경 좋지?”

깜짝 놀란 복면인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주먹을 뻗었다.

팍!

연호정의 손이 복면인의 주먹을 잡아챘다.

우두두둑!

“큭!”

복면인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힘의 흐름을 이용, 역관절을 이용한 제압술이었다. 유연한 신체로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복면인이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헉!”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휘영청 뜬 보름달을 등지고 선 상대는 시커먼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 어두운 그림자 속,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귀신의 눈빛이었다.

“네 친구들은 먼저 삼도천으로 보냈다.”

“……!!”

“황풍정, 맞지?”

복면인의 눈이 흔들렸다.

이미 마음이 흐트러진 뒤였다. 흔들리는 눈빛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은밀한 기도에도 제 색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이들의 기도를 몇 번이나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계집애가 말 안 해 주더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

“……큭.”

“하긴, 아직 제 애비만큼의 눈은 없지. 그러니 이리 무모한 것이지.”

쿵!

버드나무에 광룡부를 기댄 연호정이 검지와 중지를 모아 들었다.

툭!

복면인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아문혈(瘂門穴)로 파고든 진기가 설본(舌本)과 이어진 기의 흐름을 끊어 버렸다.

주르륵.

복면의 입가 주변이 침으로 젖어 들었다. 갑작스레 대량의 침이 나오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침을 삼키기도 어려웠다.

극도로 섬세한 내공 운용이었다. 만일 진기를 강하게 쑤셔 넣었다면 그대로 백치가 되거나 죽었을 것이다.

퍼억!

복면인이 피를 토했다. 기해혈(氣海穴)이 박살 난 것이다.

극심한 내상에 정신이 혼미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연호정이 그의 등을 두들겼다.

“네 주인에게 가라.”

움찔!

복면인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머리가 차갑게 굳어졌다. 연호정의 말은 강제적인 명령이 되어 그의 이성을 삼켜 버렸다.

“쿨럭!”

답답함에 복면을 벗은 그가 연신 피를 토하며 호선대희루로 달렸다. 보행은 비틀거렸지만 필사적인 뜀박질이었다.

점점이 떨어지는 피.

그중 가장 많은 피를 쏟아 낸 곳에 있어야 할 연호정은 보이지 않았다.

* * *

“지부장님. 절강 무역 연합에 서신을 전했습니다.”

“잘했네.”

이건이 한숨을 쉬었다.

“내일 정오 중으로 대표 사절을 보낸다고 합니다.”

“알겠네. 자네도 이만 들어가서 쉬게.”

이건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건이 나가자 모용우가 붓을 놓았다.

쿵!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에 탁자를 치고 일어났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어떻게든 가다듬으려 했지만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저 멀리 흐르는 운하가 보였다. 고요하게 흐르는 운하는 모용우의 마음을 아는 듯 적적한 소리로 그의 기분을 달래 주었다.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공의 재능도, 상업의 재능도 있었지만, 그는 마음껏 제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모용세가의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가문이 자신을 짓누른다 한들, 어찌 가문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설령 반기를 든다 해도 위험했다. 그는 천하 어떤 후기지수보다 강했지만, 모용군의 무공은 차원을 달리했다.

게다가 모용군의 냉혹한 정치 아래 모인 가문의 힘은 막강했다. 당장 세가의 장로 두 명만 보내도 생사를 장담키 힘들 것이다.

‘형님…… 형님.’

모용우는 탄식했다.

‘어쩌다 그런 괴물이 되셨습니까.’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위해 주던 모용군을 떠올렸다.

하지만 열 살 무렵, 그가 가문의 기본공을 칠 성(七成)까지 익힌 걸 확인한 뒤부터 모용군의 호의는 사라졌다.

그리고 몇 년 뒤, 모용군은 형제들을 죽이거나 포섭한 후 모용세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모용군의 의도는 확실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와 권좌를 노릴 가능성이 있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살벌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도망치거나 그의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모용우는 그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 많은 형에게서 도망치지도, 그의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재능 덕분이었다.

모용군은 모용우의 상재(商材)를 알아보곤 그를 절강지부로 보내 버렸다. 절강에서 가문을 위해 봉사한다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뜻이었다.

모용우는 형을 막을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었다. 냉혹한 가풍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렸다.

그렇게 그는 젊은 나이에 절강지부장으로 발령받은 후, 몇 년 동안 가문의 사업을 크게 키웠다. 결국 모용군이 바라던 대로 살게 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본가가 이 패도를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큰 환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언제고 그렇게 될 것이다. 설령 모용세가는 괜찮더라도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사람이 피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모용씨로군.”

모용우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이런 지경이 되어서도, 천하의 안위보다 혈육을 걱정하는 못난 놈이라니.”

혈육을 위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였다. 하지만 그 혈육이 천하를 도탄에 빠트릴 수 있는 길을 선택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물을 머금고 맞서야 하는가, 아니면 순응하고 살아야 하는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숨어서 죄 없는 이들을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가.

그때, 문밖에서 이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부장님.”

모용우는 격해진 호흡을 다스렸다.

“무슨 일인가.”

“개방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개방? 내게?”

“그렇습니다.”

“들어오게.”

이건이 모용우에게 서신을 전해 주었다.

서신을 펼쳐 본 모용우의 표정에 의아함이 어렸다.

“왜 그러시는지요?”

“…….”

“지부장님?”

“음?”

모용우가 서신을 접었다.

“아닐세. 이만 나가 보게.”

“아, 예.”

이건이 나가자 모용우는 다시 서신을 펼쳐 보았다.

“사람을 보낼 테니 축객(逐客)은 말아 달라……?”

개방 항주지부장이 직접 보낸 서신이었다.

그는 개방의 항주지부장을 기억했다.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을 만큼의 친분은 없었다.

‘대체 누굴 보낸다는 것이지?’

새벽이 가기 전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된 서신.

말하자면 잠을 포기하란 말이었다. 하룻밤을 새우는 거야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요(要)는 굳이 이런 무례를 저지를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무리한 부탁을 할 사람은 아닐 텐데……?’

모용우는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다. 적어도 이 서신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모용우는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검토했다. 굳이 항주지부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정이 훌쩍 넘어, 어느새 인시(寅時)가 지날 무렵.

후우웅.

찬바람과 함께 전해지는 기묘한 기척에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구냐.”

우측 창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놀랍게도 젊은이의 그것이었다.

“손님이오.”

모용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거대한 용두대부(龍頭大斧)를 든 문사풍 청년이 있었다.

모용우는 애써 놀라움을 삼킨 채 말했다.

“항주지부장이 보낸 분이오?”

“그렇소.”

청년,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반갑소. 나 연호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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