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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10화 (110/963)

110화. 고개를 들어야 하늘이 보인다 (4)

놀라움에 몸이 굳는 와중에도, 모용우는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얕게 볼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가, 풍기는 기백이,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스스로가 일대종사(一代宗師)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모용우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이 아로새겨졌다.

‘왜 이걸 이제야 보았지?’

솔직한 의문이 떠올랐고, 동시에 그는 답을 찾았다.

‘벽산연가의 대공자이기 때문이다.’

광풍사, 벽산호장.

한때 천하제일가로 명성을 날렸던 구주명가를 단신으로 상대하려 했던 열혈의 청년고수.

불같은 협의지심과 범처럼 뛰어난 용맹으로 명가의 무력을 받아 낸 희대의 무사.

세상이 보는 연호정의 인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모용우는 그에 대한 소문을 접하며, 어느새 만나 본 적도 없는 그를 자신의 머리로 그려 낼 수 있었다.

‘틀렸다.’

그렇다.

틀렸고, 완전히 달랐다. 모용우는 자신이 상상하는 연호정과 실제 연호정이 천양지차임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비범한 자다. 지나치게 비범해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

어느 정도 비범한가?

천하제일이란 말을 진지하게 입 밖에 낼 정도로 비범한 위인이었다.

“백도 무림의 정점에 서라니?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백도무림맹. 무림맹의 맹주가 되어 천하를 휘어잡으란 말이오.”

모용우가 입을 뻐끔거렸다.

대뜸 찾아와서 경악스러운 말을 잘도 뱉어 대는 사람이다. 모용우는 자신의 인지 능력이 연호정의 말을 따라잡기 힘들어하는 걸 깨달았다.

충격으로 얼룩진 모용우의 얼굴을 보며,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순진하군.’

표정 한번 압권이다. 무재, 상재를 두루 갖추고 사람의 허실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녔음에도 순한 성품을 지녔다.

이런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절강지부장을 지내면서 속세의 어지러움을 충분히 접해 봤을 텐데도 솔직담백한 성품을 잘 유지하고 있다.

천성이 순하고 착하다. 과단성은 부족하지만, 그 하나가 부족하다고 눈을 돌리기엔 지나치게 매력적인 사람이라 하겠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하게 하여 미안하오. 농담이었소.”

모용우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말했다.

“과한 농담이었소. 무림맹주가 되어 볼 생각이 없냐니? 지나치게 위험한 발언이니, 행여나 다른 곳에 가서도…….”

“무슨 말을 하는 거요?”

“……?”

“내가 농담이라 한 건 모용군의 사죄를 당신을 통해 받겠다는 부분이오. 당신이 무림맹주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

모용우가 충격받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진심이었다고?”

“그렇소.”

처음에는 서서히 접근해 보려 했다.

친분을 쌓고, 이런저런 일을 헤쳐 나가 보려고 했다. 자연스레 우정을 만들고, 그의 호기를 부채질하여 무림맹주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생각을 접었다.

억지로 만든 우애 따위로 좌우될 사람이 아니다. 나아가 연호정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를 무림맹주의 재목으로 점찍었다면, 머리채를 잡고서라도 달려갈 뿐이다.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될 때, 득보다 실이 많을 거라는 판단이 들 때.

포기는 바로 그때 해도 상관없다.

‘이런저런 것들을 재 보다가는 좋은 인재를 놓칠 뿐이다. 지금은 과감해야 할 때야.’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마음에 들지 않소?”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오. 무림맹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분위기를 풀 요량으로 심한 장난을 쳤다고 생각하겠소.”

그때였다.

츠츠츠츠.

모용우가 움찔했다.

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서슬 퍼런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섭도록 강렬한 기세였다. 불처럼 뜨겁고, 폭풍처럼 위압적이며, 범람하는 홍수처럼 절망적인 기운이 그대로 모용우를 옭아맸다.

‘흡!’

모용우의 눈이 떨렸다.

연호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내가, 천 리 길을 달려와 장난이나 칠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

“당신 눈에 정녕 그리 보였다면, 더 할 말은 없군. 사람을 잘못 본 걸로 알겠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하며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말한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인 만큼, 차라리 이대로 돌아가게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모용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마주한 연호정의 눈빛에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서슬 퍼런 눈동자, 시퍼런 벼락이 치는 안광 속에 드리워진 실망의 기색 때문에.

사람이 사람에게 실망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에, 모용우는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거창한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이 아니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 그럼 왜?”

“지금은 그렇지.”

“……?!”

“자질구레한 얘기는 집어치우지. 난 당신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혈육의 잘못을 외면할 만큼 연약하지만, 그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혈육이기 때문에 참고 있는 그대라면 무림맹주의 자리에 더없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모용우의 얼굴엔 충격이 가득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한 가지 알려 주지. 시대의 흐름이 달라졌기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향후 이십 년 내로 중원에 환란이 일어난다.”

“환란……?”

“그렇다. 그 환란은 중원 전체를 휩쓸어 버릴 정도로 크다. 피가 강처럼 흐를 것이고, 죽음은 소나기처럼 쏟아질 것이다. 그들의 힘은 그 정도로 강하지.”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이십 년 내? 그들? 환란이라니?’

도통 이해하기 힘든 얘기뿐이었다.

연호정의 저 확신 어린 눈이 아니었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중 하나만 해도 그 정도다. 셋 모두가 작정하고 뛰쳐나오면, 그땐 아무도 못 막는다. 적어도 현 무림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셋?!”

“광신삼교(狂信三敎). 중원의 대적이 될 놈들은 그렇게 불리고 있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모용우는 일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믿을지 말지는 당신 자유다. 다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둬. 지금부터 대비하지 않으면, 내 장담컨대 절대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거다.”

“그건…….”

“더 쉽게 말해 줄까? 당신의 가족들도 죽을 거란 얘기다.”

“……!!”

모용우의 눈이 파랑을 일으켰다.

연호정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선인이 아니야. 내가 모르는 타인의 죽음에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내 가족의 생사가 걸린다면 얘기가 달라져.”

“…….”

“그래서 당신에게 온 것이다. 당신이 무림맹주직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릴 것을 알기 때문에.”

가족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이제 더 이상 이 대화를 장난으로 끝낼 수 없게 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모용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정리해 봅시다.”

“…….”

“당신이 내게 온 목적은 나를 무림맹주로 만들기 위해서요.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맹주감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훗날 중원을 침공할 적들을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하오. 맞소?”

“요약 잘했군.”

“그렇다면 이 요약된 말에, 내가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해해 줬으면 싶소.”

“이해한다. 그러나 난 진지해.”

“알고 있소. 당신이 이리 진지하게 나오지 않았다면 당장 이 대화를 파했을 것이오.”

세상 도처에는 귀가 있기 마련이다. 이곳 절강지부도 마찬가지다.

전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행여나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감각을 속일 만큼 뛰어난 고수가 지금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면?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모용우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도 예상했겠지만, 설령 내가 당신 말을 믿는다 해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사항이오.”

“바로 그거다.”

연호정이 자세를 고쳤다.

“내가 진지하다는 걸, 당신이 진심으로 이해했으면 그걸로 됐다. 나아가 내가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면 됐어.”

“……말이 험한 분이군.”

“어차피 마음에 우러나오지도 않는 일을 시킬 생각은 없다. 다만 당신에게 세상을 보여 주지.”

“세상을 보여 준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이 모르는 세상. 그리고 당신을 맹주로 만들어 줄 사람의 능력도 보여 줄 거다.”

“…….”

“선택은 나중에 해. 다만 진지하게만 생각했으면 한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대뜸 위험한 얘기를 꺼냈는지 고민해 봐.”

복잡한 눈으로 연호정을 주시하던 모용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야 원, 귀신에 홀린 것 같군.”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급히 만날 생각은 없었어. 만약 모용연화가 아니었다면 더 여유를 가졌을 것이다.”

순간 모용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화를 알고 있소?”

“당연한 거 아닌가. 같은 육대세가의 자손인데.”

“아니, 당신 말은…….”

“모용연화가 항주에 있더군. 호선대희루에서 만났다.”

“아!”

“그리고 생각했지. 모용연화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했어.”

“…….”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일에 차질을 빚게 놔둘 필요는 없지. 그래서 무리해서 빨리 온 거야.”

연호정은 모용우의 표정을 읽었다.

“당신 반응을 보니 잘 온 것 같군. 모용연화, 절강지부에 들르기로 했지? 당연히 놀러 오는 것은 아닐 테고. 모용군이 돌아가는 상황을 직접 보고 오라 시켰겠군.”

무서운 자다.

모용우는 연호정의 식견에 깜짝 놀랐다. 마치 자신의 지난날을 옆에서 본 것처럼, 흘러가는 상황을 귀신처럼 파악해 냈다.

무공, 지략, 안목.

젊은 나이에 얻을 수 없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자.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연호정이 담백하게 말했다.

“맹주 이전에, 가문을 바로잡고 싶은 생각은 있나?”

“……!”

“모용연화가 언제 올지 몰라. 고민하고 선택을 내릴 때까지 시간이 걸릴 거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묻는 말에 확실히 대답해.”

“……그렇소. 가문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소.”

“혈육과 싸워야 할지라도?”

“……!!”

“다시 묻겠어. 혈육과 싸우더라도 가문을 바로잡고 싶나?”

“그럴 수 있다면…….”

모용우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오.”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피눈물을 참아 가며 몰래 그들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것은 그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무섭다. 일신의 무공과 정의만으로 천하와 싸울 수는 없다.

모용우가 제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홀로 가문을 상대할 수는 없다. 혈육의 정을 떠나, 애초에 힘에서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연호정이 흡족한 듯 웃었다.

“의지는 있어 보이는군. 그나마 다행이야.”

“하지만 본가는…….”

“내가 명가를 어떻게 상대한 것 같나?”

“……?”

“설마하니, 내가 명가의 모든 힘을 감당할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하나? 그건 성천십삼좌(聖天十三座)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

“그, 그럼?”

“내 힘을 상대에 맞출 게 아니라, 상대가 내 힘에 맞추도록 만들어야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고 있는 힘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상황을 입맛대로 주도할 수도, 타인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

“주도…….”

“맹주 생각은 잠시 접어 둬. 어차피 모용가를 뒤엎지 못하면 맹주 자리에 앉아도 위험하니까.”

연호정이 손을 내밀었다.

여인의 그것처럼 길면서도 적당히 굵은 손가락엔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내 도움이 필요한가?”

물끄러미 그 손을 보던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은 필요 없소.”

“그래?”

“다만, 거래라면 하겠소.”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용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도움만 받고 살 수는 없소. 당신이 내게 도움을 준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그만한 도움을 주겠소.”

“가만히 있으면 공짜 밥 얻어먹을 걸, 굳이 그러고 싶나?”

“천성이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제야 모용우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소.”

“나 역시.”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무역 연합 때문에 골치라고 했지?”

“그렇소. 오늘 정오쯤 그들 대표가 찾아오기로…….”

“찾아오긴 뭘 찾아와? 오지 말라고 그래.”

“뭐, 뭐라고?”

“그들 사이를 조율해 주려는 거 아닌가?”

“……맞소만.”

“밥 내놓으라 따지러 오게 하지 말고, 미안하다며 싹싹 빌러 오게 만들어야지.”

연호정이 도끼를 들었다.

모용우는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기다리고 있어. 정오 전까지 사냥감을 몰아 줄 테니까. 기회라고 생각할 때, 바로 목줄을 물어뜯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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