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15화 (115/963)

115화. 모욕의 대가 (3)

다음날.

“헉!”

한 줄기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모용연화가 숨을 헐떡였다.

“……뭐지?”

그때, 방문이 열렸다.

“억! 소공녀님!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적풍대주(赤風隊主)?”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모용연화를 수행했던 적풍대의 대주 천일상이었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아…… 괘, 괜찮아요.”

모용연화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디?’

순간 허벅지에서 강한 통증이 올라왔다.

“윽!”

“소공녀님?”

“……아니에요. 괜찮아요.”

날카롭게 올라오는 통증이 지난밤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었다.

‘연호정!’

모용연화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그녀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물었다.

“그놈은 어디에 있죠?”

“예? 누, 누구 말씀이십니까?”

“연호정 말이에요!”

순간 모용연화는 볼 수 있었다. 천일상의 표정에 드리워진 난색을.

“연호정…… 연가의 장남 말씀이시지요.”

“무슨 일이 있나요?”

“그, 그것이…….”

천일상이 떠듬떠듬 말했다.

“연가의 장남과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데요?”

“상황이 조금 묘합니다.”

모용연화가 눈을 치떴다.

“답답하군요. 어서 본론을 말해요.”

“혹, 소공녀님께서 연가 사람에게 살수(殺手)를 가하셨습니까?”

“……뭐라고요?!”

천일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가의 장남과 다툼이 있었다고 하여 소공녀님을 의방에 모신 연후에 직접 따지러 갔습니다만.”

“그, 그런데요?”

“이미 세간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호선루 최상층부에서, 상인 연합 자제들과 함께 연가의 사람을 모욕하신 것도 모자라 살수까지 가하셨다고…….”

쾅!

모용연화의 주먹에 벽이 움푹 들어갔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천일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역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미 기정사실이라도 된 양 소문 확산이 빠릅니다. 게다가 상인 연합의 자제들도…….”

모용연화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안개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 역시 사실을 인정하고는 먼저 무역 연합 본부로 떠났습니다.”

모용연화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 자식!’

뒤통수를 맞았다.

이제 보니 일부러 자신을 기절시킨 모양이었다. 소문에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든 후, 몇 마디 말로 상인 연합의 머저리들까지 포섭한 모양이었다.

‘죽일 놈들 같으니.’

연호정도 연호정이지만, 상인 연합 자제들에게 더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감히 나한테!’

훗날 절강 무역 사업을 휘어잡기 위해 그들과 접선한 그녀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발톱의 때만큼으로도 여기지 않았을 존재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상처 난 자존심에 기름을 붓고 불까지 붙인 격이었다.

“가요.”

“소, 소공녀님! 지금 연호정을 만나는 것은 다소…….”

“연호정 말고, 숙부를 만나야지요.”

모용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지금 따라잡으려 해도 늦었어요. 숙부한테 가서 그쪽 놈들을 완전히 휘어잡아야 합니다. 진실을 밝히는 건 그다음이에요.”

* * *

“일어났냐?”

“으…….”

묵비가 연신 비틀거렸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어제 그렇게 들이붓더니만. 인생 첫술이 미칠 듯이 매혹적이었나 보지?”

“말 시키지 말아요. 머리 울려요.”

“웃기는 놈일세. 그럼 내공으로 주기(酒氣)를 몰아내면 될 거 아냐.”

“……네?”

“술기운 몰아내라고, 인마. 내공 뒀다가 뭐 할래?”

묵비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돼요?”

“체내 탁기도 몰아내는데 술기운 하나 못 몰아내겠냐?”

우우우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묵비의 몸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독한 술 냄새는 덤이었다.

“어? 되네요.”

“안 되는 걸 시켰겠냐.”

연호정이 신기하다는 듯 묵비를 보았다.

“그나저나 내공 운용 방식이 독특하군. 동공(動功) 위주라 그런가?”

과거 오대신장의 수장 시절의 묵비는 좌공(坐功), 동공, 입공(立功)에 전부 능했다. 연호정이 자신의 무공 일부를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묵비는 단 한 번도 좌공으로 내공을 연마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움직였고, 그에 따라 활발한 내기 운용으로 몸을 보했다.

“활궁강현법(活弓鋼絃法)이라…….”

묵비의 눈이 커졌다.

“활궁강현법을 알아요?”

“엉? 아, 대충.”

당연히 안다. 활궁강현법은 묵비에게 신궁(神弓)이라는 별호를 안겨 준, 사병기(射兵器) 전반을 아우르는 데에 지극히 뛰어난 신공(神功)이었다.

하지만…….

‘보완이 필요했었지.’

활궁강현법은 천하에 비할 데 없는 위력을 발하는 신공이다.

그러나 깊게 익히면 익힐수록 신체에 문제를 일으킨다. 물론 그 정도가 되려면 대성(大成)에 이르러야겠지만.

“활궁강현법을 어떻게 알고 있어요?”

“아, 그거? 그게 그…….”

“혹시 오라버니가 알려 줬나요?”

“……뭐 그렇지.”

“그랬군요.”

묵비의 얼굴이 다소 어두워졌다.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백궁천을 떠올리며 슬퍼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야.”

“왜요.”

“오늘 하루는 푹 쉴 예정인데, 나한테 무공 하나 배울 생각 없냐?”

“쉬는데 무공을 배워요? 그럼 쉬는 게 아니잖아요?”

“쉴 때 수련해야 실력이 늘지. 강해지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죠.”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익히고 있는 무공만 해도 충분히 과해요. 다른 무공을 더 익힐 생각은 없어요.”

“만약 활이 없으면?”

“네?”

“활이 없는 상태에서 적과 조우했다고 치자. 어제처럼 젓가락 주워다 날릴 거야? 신법으로 단련된 그 다리로 뻥뻥 걷어차기만 할 건가?”

“음…….”

“언제, 어떤 순간이라도 자신의 기량을 온전히 뽐낼 수 있어야 진짜 무인이다. 강호는 험해.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날지 모르는 만큼 준비성이 철저해야 하지.”

“그, 그런가요?”

만약 어제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다면 끝까지 사양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제 그들이, 묵비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무공의 소유자였다면?

그들이 작정하고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묵비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신법이 뛰어나니 도주는 가능했을지라도,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무(武)의 시작은 맨손이다. 너도 권박(拳撲)을 익힐 필요가 있어.”

“……좋아요.”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 후원에서 신명 나게 팔다리 휘둘러 보자고.”

“아, 알았어요.”

“그리고 안정적인 내공심법도 하나 알려 주지. 활궁강현법의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놈인데, 내공 생성에 아주 그만이야.”

“활궁강현법의 약점이라니요?”

“있어, 그런 게. 그것도 백궁천한테 들었으니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지 말고.”

“……그렇단 말이죠.”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배워 둘게요.”

배워 보고,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버리겠다는 뜻이다.

연호정은 그런 묵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그릇을 아는 자, 어지간해선 틀린 선택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릇을 깨기 전까지는 자신의 그릇부터 다 채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묵비는 세상 물정엔 다소 어두울지라도 본질을 볼 줄 알았다.

무인으로서든, 사람으로서든.

“밥 먹고 바로 시작하지.”

“네.”

적당히 배를 채운 두 사람이 후원 옆 숲으로 들어갔다.

“제법 널찍하군. 여기서 하면 되겠어.”

광룡부를 내려놓은 연호정이 슬쩍 몸을 풀었다.

“일단 실력부터 볼까?”

“실력이요?”

그때였다.

파아앙!

연호정의 몸이 순식간에 묵비의 전면으로 쏘아졌다.

묵비는 깜짝 놀랐다. 기척도 없었는데 벌써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터엉!

묵비의 신형이 후방으로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그럴 줄 알았다.’

그때, 연호정의 몸에서 붉은 화기가 빛났다.

번쩍!

묵비가 눈을 부릅떴다.

‘저 보법!’

공기가 달아오른다 싶은 순간 연호정이 묵비의 후측방에서 다가왔다.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만한 속도였다. 신법의 대가인 묵비조차 한순간 시야에서 놓쳐 버렸을 정도였다.

연호정의 주먹이 묵비의 옆구리를 노렸다.

터어어엉!

묵비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일권을 흘렸다.

확실히 몸놀림이 좋다. 사량발천근(四量發千斤)이나 이화접목(梨花接木) 같은 태극권(太極拳)류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공격을 흘려 낸다.

감탄할 만한 한 수였지만, 연호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흘러가는 주먹에 무게를 실은 그가 그대로 몸을 휘돌렸다.

이어지는 공격은 도끼처럼 내려치는 각법이었다. 부월각(斧鉞脚)이었다.

묵비의 표정이 돌변했다.

수직으로 내리치는 각법은 그 위력이 강맹했다. 흘릴 만한 일격도, 막을 만한 위력도 아니었다.

‘익!’

터어엉!

묵비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쾅!

연호정의 발뒤꿈치가 그대로 땅을 찍었다.

그러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부월(斧鉞)이란 큰 도끼와 작은 도끼를 뜻하는 것, 초반 큰 도끼 일격을 피했으니 후속타의 작은 도끼가 남았다.

축이 바뀐 다리, 우측 다리가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퍽!

“큭!”

묵비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아프다!’

양팔을 교차해 겨우 막았다.

힘으로 찍는 각법이 아니라 빠르게 후려치는 각법이었다. 막은 팔이 급소가 되어 버린 듯 극심한 통증에 눈앞이 아찔했다.

“피하기만 할 거야?”

파파팡!

연호정이 갈지(之)자로 이동하며 접근했다.

고통에 허덕일 새가 없다. 묵비가 후방으로 몸을 날려 연호정의 움직임을 파악하려 했다.

후욱!

적이 자신을 파악하게 내버려 두는 건 바보짓이다. 어지럽게 움직이던 연호정이 순식간에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헉!’

불처럼 화려한 기세를 품은 중앙 돌파의 직선형 보법이었다.

‘이번엔 안 돼.’

쿵!

묵비는 연호정의 공격에 대비해 몸을 바로 세웠다. 그저 피하기만 해서는 연호정의 쾌공(快功)을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일 장 거리까지 좁혀 들었다.

잔뜩 긴장한 묵비가 자세를 잡을 때.

콰앙!

엄청난 진각에 숲 전체가 뒤흔들렸다.

휘이이이잉!

불꽃 같은 기파에 새하얀 바람이 담겼다. 뜨겁고 살벌한 기파가 순식간에 웅혼하고 전투적인 기파로 돌변했다.

묵비의 눈이 커졌다.

연호정의 주먹이 태산의 힘을 담은 채 내질러졌다.

콰아앙!

“컥!”

상상을 초월한 권법이었다. 막강한 권경(拳勁)에 맞은 묵비가 훨훨 날아가 나무에 부딪혀 떨어졌다.

“콜록콜록!”

내상은 없었지만 눈앞이 핑 돌고 호흡이 격해졌다.

묵비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엄청나구나!’

물러나니 기다렸다는 듯 퇴로를 점해 공격했고, 부드럽게 흘려 내니 대응조차 힘든 쾌공으로 공략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휘몰아치는 연환격(連環擊)을 막아 낼 요량으로 탄력을 주어 버텼더니, 이번엔 막을 수 없는 강공(强攻)으로 자신을 날려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있었어.’

상대의 변화에 따라 이쪽 역시 변화한다.

신중함이 미덕인 궁사(弓師)에게서 볼 수 없는 감각적인 실전 박투술이었다. 딱히 대단한 초식을 펼친 것도 아닌데 몇 합 버티지도 못하고 패배해 버렸다.

“네 단점을 알겠냐?”

묵비가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수풀 사이를 헤치고 떨어지는 햇빛을 등진 연호정의 모습은 거인처럼 커 보였다.

“근접전에서 신중함을 발휘하려면 상대의 공격을 다 받아 낼 정도의 기예를 기본으로 갖춰야 해. 하지만 네게는 그게 없지.”

“……!”

“짐승처럼 예민하고 감각적인 체술. 그걸 체득할 수 있으면 너는 괴물 같은 연환 사격으로 적을 섬멸할 힘을 얻게 될 거다.”

연호정이 싱긋 웃었다.

“운 좋은 줄 알아. 어디 가서 이런 거 못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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