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모욕의 대가 (5)
모용연화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지금 지부장이 자신에게 반항을 하고 있다. 숙부가 아닌 지부장이 자신을 질녀라고 부르고 있다.
모용연화의 눈이 서서히 충혈되었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
“정녕 가법에 따라 목이 달아나고 싶은 모양이구나!”
“가법이란 것이 존재는 하더냐?”
“뭐라고?!”
우우우웅.
모용우의 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었다.
모용연화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났다. 모용우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도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모용우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본가의 가법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애석하게도 네 아버지 때문이다.”
“뭐, 뭐라고!”
“본디 가법이란, 가문에 속한 자 누구에게라도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은 기실 가법만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법이 그러하다.”
모용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둘째 형님, 모용가의 가주, 냉혹한 패왕.
모용군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마음이 파랑을 일으켰다.
“하지만 본가의 가법은 그렇지 않다. 가주 형님의 눈에서 벗어나면 누구라도 즉결 처분을 당한다. 합당한 직언(直言)을 입에 담는 자도, 분명한 협의(俠義)를 걷는 자도 가주 형님이 걷는 길에 방해가 된다면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
“그것은 가법이 아니다. 처절한 독재일 뿐이다. 차라리 가주 형님께서 협의지도를 걷는다면 또 모르되, 형님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모용우가 탄식했다.
“형님이 원하는 것은 바른 세상이 아닌, 일신의 영화에 불과할 따름이다.”
모용연화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 본가의 가주님을 능멸하는 것인가!”
“어찌 능멸이라 하느냐?”
“뭐?”
“제대로 된 사상, 바르고도 합당한 가치관을 가진 자라면 내가 지금 형님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
“수장이란 그런 것이다. 능력이 있고 없음을 떠나, 아랫사람의 직언을 들으면 고민할 줄 알아야 하고, 스스로의 단점을 직시하며 그것을 고치려 노력해야 마땅하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형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그리고 지금 너의 귀에도 나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옳은 길이 아니야.”
모용연화가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로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동시에, 머리는 차가워졌다.
‘이자가 미쳤나?!’
자신은 가주의 딸이요, 모용세가의 큰 기둥이다.
모용세가의 절대권력자가 총애하는 자신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럴 수 없다.
“당신,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군. 무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잘도 뱉고 있어.”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거라.”
“오늘 당신이 한 발언들! 모두 가주님께 보고될 것이다! 당신은 죽은 목숨이야!”
“돌아가라 하였다.”
모용연화가 버럭 소리쳤다.
“닥쳐! 한낱 지부장 주제에 감히 가주의 장녀에게 명령하다니! 타지에 떨어져 살았다고 네 본적도 잊어버린 것인가!”
순간 모용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신 차리지 못하겠느냐!!”
찌이이이잉!
모용연화의 얼굴이 멍해졌다.
가히 사자후(獅子吼)와도 같은 외침이었다. 강렬한 내공과 그 내공을 압도하는 거센 감정이 그녀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큰 충격에 고개를 흔들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모용연화가 모용우를 보았다.
‘흡!’
모용우의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압도적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고 있다. 모용연화는 모든 것을 휩쓸고 꿰뚫는 그 강인한 눈빛에 숨도 못 쉴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내공이 강하다고, 무공의 경지가 높다고 보여 줄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릇이다.
모용우의 그릇이, 신념이 모용연화를 불사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상상 못 할 고뇌를 겪은, 그런데도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남자의 의지는 그렇게나 대단했다.
나아가 모용우도 점차 변화한다.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 버린 질녀를 보며 가문의 현주소를 직시할 수 있었다.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던 지옥 같은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이제야 비로소 세상을 보는 그였다. 모용연화의 일그러진 마음과 깨져 버린 자존심이, 반대로 모용우에겐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된 것이다.
“너는 어찌 검을 쥐었느냐! 글은 어찌 배울 수 있었느냐! 너의 육신이, 혼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냐!”
모용우의 목소리는 점차 과격해졌다. 점차 또렷해졌다.
그리고 점차 확신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네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용이라는 성씨가 세파를 이기고 두 발 당당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
“네가 정녕 가문을 위한다면, 가문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쓴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눈과 마음을 가꾸어야 해!”
모용우가 모용연화를 가리켰다.
공격적인 행동이었다. 모용연화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넌 그 좋은 재능을 갖고도 무엇이 옳은지 가늠하지 못한 채, 네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죄 없는 이들의 어깨에 천 근의 짐을 지우고 있다. 그것이 정녕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익!”
“말해 보아라! 너는 정녕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마땅한 네 삶을 살고 있느냔 말이다!”
순간 모용연화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용우의 마지막 말만큼은 그녀의 귀로 파고들어 머리를 뒤흔들었다.
‘마땅한 내 삶?’
모용연화는 저도 모르게 자문해 보았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는가?’
물론이다.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타인의 말에 휘둘려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당당했다. 스스로의 능력을 알았고,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용감하게 세상에 나섰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내 삶을 내 주도대로 살 것이다.
입술을 깨물던 모용연화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요언(妖言)을…….”
순간 모용연화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모용우의 강인한 눈빛이, 어느새 서글픔으로 가득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안쓰럽다.”
“……뭐?”
“너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데도 어느새 이렇게 커 버렸어. 가주 형님이 조종하는 괴뢰(傀儡)가 되어 버렸단 말이다.”
“다, 닥쳐! 나는 절대……!”
“한 번이라도 스스로를 되돌아본 적이 있느냐? 네 인생이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느냔 말이다.”
모용연화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던 모용우가 창가로 몸을 돌렸다.
“적풍대와 함께 돌아가거라.”
“…….”
“더는 너와 입씨름하고 싶지 않다.”
모용연화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가 씹어 뱉듯 말했다.
“패배자 주제에!”
그 말을 끝으로 모용연화는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모용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건은 조용히 천인상을 둘러메곤 집무실을 나섰다. 지금은 모용우를 건드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모용우는 홀로 남았다.
스으으.
심란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모용우는 문득 찻물이 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숨을 쉬며 물그릇을 들어 올린 그는, 갑작스레 치솟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손에 든 그릇을 그대로 던져 버렸다.
째애앵!
뜨거운 물과 깨진 사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집무실 문이 열리고 이건이 들어왔다. 계속 문밖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네. 짧으면 이삼일, 길면 나흘까지도 걸릴 것 같네.”
“…….”
“그때까지 지부를 잘 부탁하네.”
이건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모용우는 커다란 장포를 걸치곤 문을 나서다 걸음을 멈추었다.
“이보게, 이건.”
“말씀하십시오, 지부장님.”
“내가 과했다고 생각하는가.”
이건이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과하셨습니다.”
“그래?”
“예. 그러니 앞으로는 웅크리지 마시고 훨훨 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도 떡고물이라도 받아먹고 살지 않겠습니까?”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어. 나는 본가의 과격한 행보를 더는 지켜볼 수 없을 것 같네.”
이건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고개를 드시나 했습니다. 적어도 이놈이 선택한 주군이시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으셔야지요.”
“그런가?”
“그렇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을 한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옴세.”
“몸 조심히 다녀오시길.”
* * *
퍼어억!
“컥!”
묵비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연호정이 주먹을 흔들었다.
“이걸로 칠십이전 칠십이승 무패다.”
“콜록콜록!”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기냐. 신법 하나 봉쇄하니까 수련용 목각 인형이 따로 없네.”
묵비가 헐떡이며 말했다.
“치, 치사해요.”
“뭐가 치사해, 인마.”
“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수법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묵비는 연호정에게 치사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연호정의 박투술은 치사했다.
돌멩이를 걷어차 공격하거나 낙엽을 던져 시선을 교란하는 건 물론이요, 심지어 고간을 노리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말이 좋아 치사지, 이건 악랄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단순한 박투술이 아니라 막무가내식 싸움법에 가까웠다.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세상에 공평한 싸움은 없어. 도리? 예의? 그런 입에 발린 말에 현혹되지 마라.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자가 진리야. 싸움에 깨끗함과 더러움을 논하는 건 사치란 말이다.”
“쿨럭!”
“그래도 확실히 감각은 있군.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지만, 점점 길게 버티고 있어.”
연호정은 묵비의 감각에 감탄했다.
물론 무의식중에 반응할 정도로 몰아친 건 자신이었지만, 어지간한 무인은 그 독한 싸움을 반도 못 따라오고 지쳐 버릴 것이다.
묵비는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티더니, 처음엔 몇 합 만에 끝나던 승부가 지금은 삼십 합까지 늘어났다.
물로 연호정은 제 실력의 삼 할도 보이지 않았지만.
‘역시 이놈은 걸물이야.’
쓸 만한 장군을 얻은 군왕의 심정이 이러할까. 연호정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아, 하아. 오, 오늘은 더 못하겠어요.”
“벌써 뻗냐?”
“지금 며칠째인 줄 알아요? 사전 답사는 왜 안 하는 거예요?”
“너 작살내는 게 재미있어서.”
“으윽.”
연호정이 웃으며 묵비의 상체를 일으켰다.
“일어나기도 힘들 텐데 잘 됐어. 활궁강현법 말고 홍천기(洪天氣)를 수련할 기회야.”
“독하다, 독해.”
“독해야 강해져. 너도 강해지고 싶다며?”
한참 숨을 몰아쉬던 묵비는 이내 가부좌를 틀었다.
가부좌를 튼 모양새가 상당히 어색했다. 평생 동공으로 내력을 연마했으니 당연했다.
잠시 후.
우우우웅.
묵비의 몸에서 은은한 회색빛 기류가 일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이건 더 빠르군.’
싸움 감각도 좋지만, 심법 운용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가르쳐 준 지 얼마 안 된 홍천기를 벌써 이 정도로 익히고 있는 것이다.
‘더 강해져라. 높이 날아올라야 한다. 그래야 너도 살고, 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도 산다.’
한참 묵비의 호법을 서던 연호정은 일순 한 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 기도는?’
그가 몸을 돌렸다.
잠시 후, 저 멀리서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가 걸어왔다.
“거처에 안 계시더군. 겨우 찾았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오셨구먼.”
모용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간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