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결심의 순간 (2)
“음?”
“왜 그래요?”
“…….”
“연 공자?”
“어?”
“왜 그러냐고요. 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어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갑자기 목 뒤가 시큰해서.”
“자객?”
“그럴 리가 있냐.”
“왜요? 사람들 얘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연가라면 강호에서 최고로 유명한 가문 중 하나라면서요.”
“최고까지는 아니고, 유명하긴 하지.”
“그런 가문의 장자라면 노리는 사람도 많을 거 아니에요?”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틀린 말은 아닌데…… 네가 어떻게 거기까지 생각했냐?”
묵비가 툴툴거렸다.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무시하는 거 아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잖아.”
“내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그 정도는 아니에요.”
사람이 셋만 모여도 파가 갈린다. 그리고 서로 우위에 서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다.
그걸 수천만 배로 확장한 세상이 강호였다. 명성이 높고 세력이 강한 문파라면 견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묵비는 그것을 예신합전에서 배웠다.
“그나저나 벌써 한 달이 지나 버렸네요.”
“그러게.”
호선대희루에서 머무른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이제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낙엽이 휘날리고 바람은 찼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점점 두꺼워졌다.
이십 일 전에 찾아온 모용우는 그날 바로 돌아갔다. 그 후 연호정은 절강 해상을 둘러보며 시장 조사를 마쳤다.
이제는 슬슬 돌아갈 때였다.
“그나저나, 그분하고는 더 안 만나 봐도 돼요?”
“누구?”
“모용우라는 사람이요.”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얘기는 끝났어. 이제는 그 사람이 움직일 차례다. 내 제안을 따른다면, 그때 또 연락이 오겠지.”
그는 모용우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 역시 결심한 이상, 미적지근하게 움직이고 싶진 않아.’
이제 막 만난 사이일 뿐이다. 손발도 맞춰 보지 않은 사람끼리 초반부터 붙어 다닐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는 법. 언제나 인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모용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아서 잘 뚫어 봐. 그 정도 능력은 보여 주리라 믿는다.’
묵비가 물었다.
“그럼 바로 돌아가면 되겠네요?”
“그렇지.”
“막간산엔 안 들를 거예요?”
“막간산? 아, 지평?”
“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그곳에 있을까? 게다가 막간산도 산이야. 그 넓은 곳 어디에 지평이 있는 줄 알고.”
“어차피 당분간 할 일이 없다면 신법 수련도 할 겸 산 전체를 누벼 보는 셈 치면 되죠.”
“오?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히히.”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지평이 보고 싶냐?”
묵비가 볼을 긁적였다.
“처음이에요.”
“뭐가?”
“연 공자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사심 없이 다가와 준 사람이요.”
“아버지가 들으면 서운해하실 말이야, 그거.”
“아, 아버님하고는 달라요. 그러니까 음…….”
“뭐, 어쨌든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돌아가도 수련 외엔 할 일도 없으니까 막간산이나 둘러보…… 헉!”
“왜요?”
연호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묵비는 절로 긴장했다. 그녀는 연호정의 얼굴이 이렇게 심각한 걸 본 적이 없었다.
우우웅.
활궁강현진기를 끌어 올린 묵비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설마 적이라도……?”
“서신을 안 보냈어.”
“네?”
연호정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아버지께 안부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한 번도.”
“…….”
“비, 빌어먹을.”
묵비는 김이 새서 말했다.
“가끔 진짜 황당한 거 알아요?”
“야! 네가 아버지를 몰라서 그래! 내가 그날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람은 말이 많을 때보다 침묵할 때 더 무서운 법이다. 아버지는 그날, 명심보감 효행 편을 큰소리로 달달 외울 때까지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기만 했다.
거의 첫 살인의 충격에 비할 만한 순간이었다. 심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은 연호정은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묵비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이 뭐야?’
그녀는 연호정과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붉고도 푸른, 하야면서도 어두운 기운을 마구 뿜어내며 자신을 내려다보던 장수의 안광.
단숨에 자신을 제압한 후, 백소경을 몰아치던 연호정의 무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자비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흉장(凶將)의 위엄에 등골이 서늘했다. 이후, 자신을 다독이던 모습에선 무뚝뚝한 현자(賢者)의 그림자가 보였다.
시간이 흘러 친분을 나누자 나름의 장난기 있는 청년의 짓궂음을 보았고, 모용우와 대화할 때는 강단 넘치는 지략가의 면모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바보 아냐?’
대체 몇 개의 모습을 숨겨 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진짜 솔직담백한 거 알아요, 당신?”
“뭔 소리야?”
“아니에요.”
묵비가 고개를 돌렸다.
연호정이 보여 주는 모습들은 하나같이 충격적이었지만, 적어도 거짓은 없다. 그는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가면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연호정의 가장 큰 매력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머저리처럼 서 있지 말고 슬슬 출발하자고요.”
“머저리라니!”
“먼저 출발합니다.”
파아아앙!
묵비가 빠른 속도로 산길을 내달렸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냉정한 것 같으니.
터어엉!
연호정이 순식간에 묵비의 뒤를 따랐다.
뒤를 따른다 싶더니, 어느새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묵비가 혀를 내둘렀다.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네요?”
“하루마다 달라지도록 노력하니까.”
“몇 성이나 익힌 거예요?”
“그런 거 의미 없더라고.”
“네?”
“다른 무공은 몰라도, 신법에서만큼은 몇 성이니 따지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연호정이 생각하는 신법은 그저 한없이 깊어지는 공부였다.
어떤 의미로는 내공심법과도 비슷했다. 내공이 깊어지는 걸 두고 몇 성이니, 몇 단계니 하며 성취를 보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내 몸에 맞게, 내 깨달음에 맞게 몸을 실으면 그뿐.’
후욱!
연호정의 몸이 더 빨라졌다.
빨라졌는데도 자세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고고한 학과 같은 자세지만, 언제라도 도끼를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 임전(臨戰)의 투기가 엿보였다.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야.’
여러 공부를 습득하면서 과거에 배웠던 것을 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연호정은 달랐다. 그는 그간 배우고 익혔던 모든 것들을 잊지 않고 챙기며 연마했다.
‘단순히 머리가 좋거나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야.’
이제야 묵비는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의 저 탄탄한 성장 기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삶의 자세가 달라.’
머리로 깨달은 것, 몸으로 습득한 것 모두를 안고 간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지를 떠나, 일단은 부딪치고 본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부딪친다.
이상에 불과하다고 추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훅!
“그래도 아직 느리네요.”
“네가 너무 빠른 거야.”
“흥.”
파파파팡!
묵비가 엄청난 탄보(彈步)를 밟더니 쭉쭉 나아갔다.
무시무시한 신법이었다. 멍하니 묵비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은 내심 웃었다.
‘잘 바뀌었군.’
처음 묵비를 봤을 때, 그녀는 무너지기 직전의 담벼락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연가의 울타리 안에서 사람 사는 정(情)을 느끼고, 절강으로 나와 강호의 일면을 보았다.
혼란스러울 만한데도 묵비는 정심(貞心)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호정은 그것이 기특했다.
“야! 같이 가! 속도 좀 줄여!”
“빨리 좀 와요!”
“저 망할 것이!”
그렇게 산길을 타 넘은 두 사람은 무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막간산의 산자락에 도착했다.
한 사람은 지지 않기 위해, 한 사람은 뛰어넘기 위해 미친 듯이 신법을 전개한 결과였다. 둘은 서로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줄 알았다.
“후우, 배고프지 않아요?”
“죽을 것 같다.”
“자, 이거요.”
“오? 주먹밥이냐?”
“네. 안에 돼지고기 다진 게 들어갔어요. 간이 잘 되어 있더라고요.”
“……난 주먹밥과 멀어질 수 없는 운명인가 보구먼.”
“네?”
“아니야. 그나저나 크네. 하나만 먹어도 배 차겠다.”
두 사람은 열심히 주먹밥을 씹었다.
“좀 쉰 것 같다.”
“안 죽어요.”
“죽지야 않겠지만.”
연호정이나 묵비나 워낙 거칠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쥐나 뱀을 잡아먹는 건 예삿일이고 나무뿌리를 캐다 먹은 적도 허다했다.
강철 같은 소화력을 지닌 두 사람은 쉰내 나는 주먹밥도 금세 소화시켰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슬슬 지평이나 찾아볼까?”
“그럴까요?”
이리저리 몸을 푼 연호정이 견봉에 도끼를 걸치고 달려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묵비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래요?”
“…….”
“안부 서신 말고 또 놓친 거 있어요?”
“쉿.”
연호정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다.
묵비의 얼굴도 자연 진지해졌다.
연호정은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뭐지?’
벽라진결이 치솟고, 사신의 삼신기(三神氣)가 고요하게 타올랐다.
‘기감에 걸리는 게 없는데?’
그저 나무와 흙, 풀과 낙엽만 보일 뿐이었다. 흐르는 산세는 고고했고,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하다 못해 차가웠다.
가을 산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걸 느낀다.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공기…….’
상쾌한 공기 속 바늘처럼 뾰족하고 면도(面刀)처럼 날카로운 불쾌한 연기가 느껴졌다.
한참이나 주변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말했다.
“몇 발 있어?”
“네?”
“화살.”
묵비가 화살통을 내려다보았다.
“스물네 발이요.”
“스물네 발이라…….”
우우웅.
견봉에서 광룡부를 뗀 그가 벽라진결을 운용했다.
신체의 중심이 강건해지고 전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혹시 모르니 화살 아껴라.”
홍련궁을 쥔 묵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적인가요?”
“살수다.”
“살수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이 불쾌한 공기는…… 아마 살수일 거다.”
흑도가 백도보다 뛰어난 것 중 하나가 바로 암살자, 살수의 존재다.
흑도에서 작정하고 키운 살수는 살기를 일절 흘리지 않는다. 그들의 기예는 절정고수조차 속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싸우느냐?
방법 따위는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해치워야 한다. 알아채지 못하면 그대로 죽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나중에는 살기가 아닌 다른 것을 포착하게 된다.
바로 대기의 변화였다.
‘이상해.’
연호정은 점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을, 정확히는 자신을 노리는 살수들이 있다. 점점 텁텁해지는 공기가 그것을 증명했다.
‘살수 말고 뭔가 하나가 더……?’
그때였다.
묵비의 눈이 번뜩였다.
“봤어요.”
“뭐?”
“산 아래, 고목(古木) 색깔의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있어요.”
지금의 연호정도 보기 어려울 만큼 떨어진 거리를 포착했다.
궁사의 안력(眼力)은 어떤 무인보다도 뛰어나다. 전문적인 안법(眼法)을 따로 배울 정도였다.
매처럼 날카로운 묵비의 안력이 살수의 존재를 포착했다.
‘그렇다면……?’
주변 지형을 살핀 연호정이 외쳤다.
“위로 올라가!”
“네?!”
“공성살진(攻城殺陣)이다!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거야!”
파라라라락!
그 순간, 산 밑에서 이백여 명의 살수들이 돌진했다.
암살이 아니다. 진을 짜서 일거에 쓸어 버리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살수들의 전법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공격법. 연호정과 묵비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걸 깨닫곤 곧장 공격에 나선 것이다.
파바바박!
대놓고 인기척을 드러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살기는 덤이었다.
명백한 암살자들임에도 도무지 암살자답지 않은 행태에 연호정이 이를 갈았다.
“뭐 하자는 거야, 이 개새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