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백도무림맹(白道武林盟) (4)
외성에서 내성 입구까지 가는 시간만 거의 반 시진이 걸렸다. 절정고수가 쉬지 않고 최대 속도를 발휘하면 일각 정도 걸릴까.
외성만큼은 아니지만 내성 역시 넓었다. 무림맹의 중지(重地)인 만큼 건물 배치가 전략적으로 더 촘촘해졌고, 동시에 화려했다.
“여기가 우리가 머물 곳이다.”
내성에서 연가가 머무는 곳은 파군각(破軍閣)이었다. 건물들의 외관이 유독 고풍스럽고 단단해 보였다.
짐을 푼 연위가 말했다.
“애비는 바로 무성전(武聖殿)으로 갈 것이다. 쉬고 있거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사고 치지 말고.”
“안 칩니다.”
연위가 가득상을 힐끔거렸다.
그는 건물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입맛을 다시며 여기저기 빙빙 도는 모습이 제법 초조해 보였다.
연호정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잘 붙들어 매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연위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도 좋겠다.”
혹시라도 미쳐서 난동을 부리면 즉각 제압하라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알았다. 하면 믿고 다녀오겠다.”
“예.”
연위가 파군각을 나섰다.
연위를 배웅하던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돌겠네. 정신 사납게 왜 자꾸 그러는 거요?”
가득상이 후다닥 다가왔다.
“술 마시자, 술. 나 반년 동안 술 한 방울 입에 못 대고 살았어.”
“술이야 뭐 마시면 마시는 거지만…….”
연호정이 가득상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나저나 반년 새에 엄청나게 달라졌는데?”
좀 모자란 사람처럼 굴고 있긴 하지만 가득상의 기도는 지난여름에 봤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내공이 폭증했군.’
적게 잡아도 마지막 봤을 때보다 족히 서너 배는 늘었다.
실로 엄청난 내공량이다. 묵비의 잠재된 내공량에 필적할 정도, 내공만 보면 초절정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중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가득상의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격체전력. 용두방주가 내공 일부를 전수했나?’
그럴 확률이 높다. 수습하지 못한 기운은 굉장히 사나웠지만, 그만큼 수준 높게 정제되어 있었다. 영약으로는 얻을 수 없는 힘이었다.
‘내공만 는 게 아니야.’
결정적으로 가득상의 발하는 기도의 두께감이 달라졌다.
반년에 불과하지만,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냈을 것이다. 연호정은 문득 호승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술 마시기 전에 한판?”
가득상이 버럭 소리쳤다.
“미친놈아! 수련하기 싫어서 뛰쳐나왔는데 붙기는 뭘 붙어! 술상부터 차려 줘!”
“자기 집도 아니면서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술 내놔! 술!”
“한판 붙어 주면.”
가득상이 연호정의 주먹을 잡더니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퍽퍽 때렸다.
“아이고, 졌다! 내가 졌네! 연호정 이 시벌 놈 너무 강하네! 못 이기겠다!”
가득상은 벌러덩 눕더니 얼굴을 움켜쥐곤 데굴데굴 굴렀다.
연호정은 김이 새는 걸 느꼈다. 상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힘이 빠졌다.
“젠장, 들어갑시다.”
“헤헤헤.”
가득상은 연호정보다 먼저 거처로 들어가 버렸다. 완전히 제집이 따로 없었다.
한옆에서 그 광경을 보던 묵비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강호에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 많군요?”
“저 인간은 그중에서도 백미야. 저런 또라이는 찾아보기 힘들어.”
“가족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정상이네요.”
“그러게. 너도 정상은 아니잖아?”
“내가 뭘요!”
“됐고, 너도 한잔할 거냐?”
묵비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끔찍한 숙취를 감당하라고요? 저는 됐어요. 쉴래요.”
“적당히 마시면 되는 걸, 뭐.”
“됐거든요.”
“알았다. 쉬어라.”
“나중에 봐요.”
“쉬기 전에 씻는 거 잊지 말고.”
“당신보다 훨씬 깨끗해요!”
묵비가 씨근덕거리며 자기 숙소로 들어갔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쟤는 역시 놀리는 맛이 있어.
잠시 후, 연호정의 거처에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칠대세가, 아니 이제는 육대세가의 거처가 된 칠성각(七星閣)의 숙수와 하인들이 술상을 방 안에까지 옮겨 준 덕이었다.
“자, 한잔 받…….”
잔을 채워 주려고 했더니만 가득상은 냅다 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발을……?’
제법 독한 술인데? 저러다가 위장 상하는 거 아닐까?
하긴 돼지고기 열두 근을 소화한 괴물 같은 위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연호정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원래 그렇게 술을 좋아했소?”
“꺼어억! 세상에 술 안 좋아하는 거지가 어딨소?”
“그래도 좀 심한걸.”
“됐소. 어우, 한 병을 날름 마셨더니 술이 훅 오르네.”
가득상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서서히 목이 붉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내공을 억누른 게 분명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건강히 잘 지낸 것 같군.”
“몸만 건강하면 다요? 정신이 아파, 정신이.”
“그러게 말이오. 이렇게까지 미친 거지 놈은 아니었잖소?”
“…….”
“왜 그러시오?”
“안 본 새에 꽤 변했네?”
“그렇소?”
“옛날에는 칼 들고 쑤시더니만 지금은 웃으면서 뺨 때리네.”
“지금이 더 낫다는 뜻으로 알겠소.”
“둘 다 나빠!”
가득상이 투덜거렸다.
“여하간 댁도 건강한 것 같군. 고새 위험천만한 짓을 잘도 벌였더만?”
“음?”
“명허림 잡고, 모용연화 조지고, 살수들 쑤시고, 절강 무역상 작살 내고, 또 뭐가 있더라?”
“역시 다 알고 있었구먼?”
“당연한 거 아뇨? 내가 댁한테 오정패를 왜 줬는데? 우리 애들 잘 써 먹었더만.”
“덕분에 일이 꽤 쉬워졌지.”
가득상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지난 얘기나 좀 해 봅시다.”
술 먹자고 그 난리를 치더니, 결국은 연호정과 대화할 게 많았던 모양이다.
“일단 가장 먼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시오.”
“함께 온 처자, 안휘혈궁이오?”
어지간해서는 가득상에게 진실을 숨기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안휘혈궁은 아니오. 다만 관일곡 소속이긴 하지.”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연호정은 묵비, 아니 백향의 과거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했다. 관일곡이 어떤 집단인지, 안휘혈궁이란 악명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가득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살신교라? 과연 강호에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 문파가 아직도 꽤 많군.”
“문파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깝다고 들었소.”
“그래서? 그놈들 막으려고 남궁세가라는 칼을 빌려 관일곡이란 곳을 작살내 놓은 거고?”
“그렇소.”
가득상은 혀를 내둘렀다.
“목숨 몇 개요? 세상에 남궁세가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하다니, 그거 걸렸으면 당신 큰일 났어!”
“안 걸렸잖소.”
“……시벌, 그리 말하니 할 말은 없다만.”
“그리고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오. 안휘혈궁은 오 년 전 벌어졌던 예신합전의 누군가요. 금검문도 그 괴상한 생사전에 휘말려 멸문한 것이고.”
“쩝.”
“결국 남궁세가에게도 좋은 일이었지. 안휘혈궁을 잡은 거니까.”
가득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의문은 풀렸소. 그쪽 지부 애들 죽인 것도 관일곡 소속 궁수였던 거군.”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저 녀석을 포기할 순 없었소.”
“괜찮소. 같은 소속원이었단 이유로 원망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오. 게다가 그 처자가 직접 범인을 죽였다고 하니, 오히려 고맙고 미안하지.”
이럴 때 보면 확실히 가득상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을 지녔음에도 은원은 철저하게 가리는 것,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뭐, 그 부분이 제일 걸렸소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하지.”
그제야 가득상이 잔에 술을 따랐다.
“살수는 어떻게 된 거요? 애들한테 따로 조사해 보라고 말하긴 했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인지 가늠이 안 되더이다.”
“나도 잘 모르겠소. 아마 호북 쪽에서 활동하는 살수들인 것 같은데, 확실한 건 없소.”
“호북? 어떻게 알았소?”
“그냥 감이 왔소. 어차피 지금 조사해도 늦었으니까 의미 없지.”
“그건 그렇다만…….”
잔을 비운 가득상이 눈을 번뜩였다.
“모용세가요?”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는 보고 있소. 다만 확신은 못 하겠소.”
“그렇겠지. 시벌, 성격이 워낙 지랄맞으니 적이 한둘이겠어?”
“대가리 깬다.”
“난 적이 아니오. 오해하지 마시오.”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심각한 얘기를 하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모용세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말씀하시오.”
가득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조금 전까지 술 달라고 발광하던 거지가 아니었다.
“연가주께 모용세가를 조심하라고 말해 주시오.”
“새삼스럽게 뭘.”
“무림맹 뇌옥에 갇힌 명가의 고수 중 몇몇이 사라졌다고 하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 확신은 못 하지만 구파와 육대세가 중 극히 일부에서 그중 몇을 빼낸 것 같소.”
“아군으로?”
“그렇겠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량이 된다면 그것도 좋겠지.”
가득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구주명가의 소속원은 이유를 불문하고 모조리 뇌옥행은 물론, 맹법(盟法)에 따라 모두가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오. 아무리 백도의 기둥이라도 몰래 죄인을 빼 오는 것은 중죄란 말이오.”
“그래, 중죄는 맞는데 그 죄를 누가 고발할 거요?”
“…….”
“게다가 지금의 무림맹은 임시요. 분위기를 보니 무림맹이 재건될 것 같긴 하지만, 증거도 없이 몰아붙이면 피 보는 건 이쪽이외다.”
가득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답답해서 그렇소. 제아무리 인재 욕심이 많기로서니 절차도 거치지 않고 몰래 빼돌리는 것은…….”
“사람의 욕심은 법과 질서를 초월하지. 세상에 완벽한 법이 없는 이유요. 수천 년이 지난다 한들 법은 끊임없이 변할 거요.”
“허어.”
“그리고 덕분에 나도 이득 좀 봤으니까.”
“잉? 이득?”
연호정이 재차 잔을 채우며 말했다.
“살수들의 습격을 받은 날, 꽤 강한 고수의 습격도 있었소.”
“고수라? 연 공자가 그리 말할 정도면…….”
“점창파의 사일검법을 구사하더군.”
“……!!”
가득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진짜요?”
“진짜요. 묵비가 있어서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당시의 내 무공을 생각하면 정면 승부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어려웠을 수 있소.”
“……!”
“나이는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 피 냄새가 짙은 자였소. 아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몽의.”
“음?”
쿵!
가득상이 탁자를 내려쳤다.
“몽의가 분명하오. 점창파 전대 장문인의 대제자이자 소실되었다는 사일검법을 얻은 자. 전대 장문인을 죽이고 종적을 감춘 자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명가 소속이오?”
“확실하진 않소만, 본방에선 그렇다고 보고 있소.”
“흠, 입이 엄청 무겁더니만. 아직 본가 뇌옥에 갇혀 있소이다.”
가득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럼 몽의를 누가 데려갔는지를 추적하면 연 공자를 죽이려 한 범인도 알 수 있소.”
“그렇겠지.”
“오늘부터 당장 알아보도록…….”
“됐소.”
“으잉?”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만약 모용군이 몽의를 보낸 사람이라면 모든 흔적을 지웠을 것이오. 쓸데없이 쑤셨다간 괜히 모용군만 더 긴장케 할 거요.”
“모용군이 아닐 수도 있잖소? 새로운 적이라면 어떻게 할 거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혹시 아오? 써먹을 데가 따로 있을지.”
가득상이 가슴을 두들겼다.
“막 나가는 기질 여전히 못 버렸구만. 이 사람아! 모용군은 얼마 전에 강력한 보검 하나를 또 얻었다고! 호랑이 등에 날개까지 달린 격이라니까? 최소한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하게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날개?”
“모용우! 모용세가의 숨겨진 천재요! 절강지부장으로 있던 괴물까지 모용군의 휘하로 들어갔소이다!”
“그으래?”
“당신, 모용우 모르지? 그 양반은 세상이 모르는 천재 중의 천재야. 모용군이 둘이 된 거나 다름이 없다고! 물론 천성을 생각하면 그럴…….”
“…….”
“……뭐야? 알아?”
“내가 묻고 싶소. 몰랐소이까? 귀방의 항주지부장 덕에 일이 편했는데?”
“그,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진짜 모용우랑 손잡은 거여?”
연호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앞으로는 걱정 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