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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32화 (132/963)

132화. 욕심의 대가 (2)

타아아앙!

“후욱.”

홍련궁의 장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대체 어떤 재질로 만들어진 건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힘으로 당기면 안 되는데.’

내공량이 풍부하여 홍련궁을 이용, 비기를 제외한 구룡파천궁술을 칠십여 회 발사할 수 있다.

하지만 묵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내공 운용이 부족해서 칠십 발‘밖에’ 못 쓰는 것임을.

훨씬 더 섬세한 운용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시위를 당기는 힘도 줄어들 것이고, 발사 횟수도 늘어날 것이다.

“으, 점점 팔 아프네.”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생이 많구나.”

“컥!”

깜짝 놀란 묵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연위가 있었다.

“아, 아버님?”

“그래.”

“안 주무셨어요? 날 새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괜찮다. 하룻밤을 새운 정도야.”

“아…… 네.”

묵비의 표정이 대번에 어색해졌다.

그녀는 연위를 어른으로서 존경했다. 실제로 자신에게도 잘 대해 주시는 분이며,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란 것도 알았다.

그래도 무섭다.

연위의 무표정한 얼굴은, 과거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던 형제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 안에 실린 마음이 다르다는 걸 알아도 표정이 비슷하니 자꾸만 위축됐다.

연위가 묵비에게 다가갔다.

“전에도 봤지만 보통 활이 아니다. 시위의 장력도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네.”

“왼팔을 내놓아 보거라.”

“네?”

“…….”

“아, 넵!”

묵비가 불쑥 왼팔을 내밀었다.

연위가 그녀의 팔뚝을 잡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왼팔 전체에 아름다운 연녹색 기운이 명멸을 반복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기운이었다.

묵비의 눈이 커졌다.

잔뜩 굳었던 왼팔 근육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저도 모르게 아이고 좋다, 소리를 뱉을 뻔했다.

물론 그녀는 연위 앞에서 그런 실수를 하진 않았다.

“품고 있는 힘은 태산이거늘, 그중 삼분지 일도 제대로 못 쓰고 있구나. 기의 활용력은 그보다 훨씬 더 못하다.”

“콜록! 네, 네에…….”

“네 안에 잠재된 힘을 모두 폭발시키고, 진기 조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다면 나조차도 넘어서겠다.”

묵비는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님. 저는 절대로…….”

연위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러느냐? 네가 무림인으로 살 거라면 오히려 나를 넘어설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

“나는 너와 호정이 나를 넘어, 성천십삼좌의 경지에 올라 천하에 족적을 남겼으면 좋겠다.”

순간 묵비는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너의 재능이 출중하고 기본기도 뛰어나며 품고 있는 힘도 능히 역발산기개세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네.”

가만히 묵비를 보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나와 함께 네 무공을 살펴보도록 하자. 조금만 손보면 예전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게다.”

“헉! 저, 정말이요?”

“연가의 가주가 하는 말이다. 믿어도 된다.”

“감사합니다!”

연위는 묵비의 순박한 모습이 좋았다.

문득 큰아들이 떠올랐다. 첫째가 묵비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성품이라면 아들의 벗이 아니라 며느리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인력으로 되는 일이라던가. 연위는 흐르는 인간사가 만들어 내는 인과의 법칙을 거스르려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호정은 잘하고 있을까?’

연위가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모용세가의 탐랑각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어쩔 셈이냐, 호정아.’

* * *

모용군은 생각했다.

‘내가 이놈을 잘못 보고 있었군.’

몽의가 사일검법을 익혔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상대를 너무 띄엄띄엄 봤다는 것이었다.

연호정은 충분히 괴물이다. 그것을 모르진 않았다.

다만, 이놈이 똑똑하고 욕심도 많으며 지략에도 일가견이 있는 천재라고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몽의를 뇌옥에 가둬 두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놈이 꽤 많이 망가졌단다.

‘살아 돌아간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지. 한데 생포까지 했다고?’

생포해서 고문까지 불사했다는 뜻이 된다.

‘이놈, 백도가 아니야.’

사소한 차이, 그러나 그 사소함으로 인해 정국(政局)이 뒤흔들릴 수도 있다.

‘이놈은 필요하다면 어떤 끔찍한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놈이다.’

자신과 닮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이놈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가 아니었다.

모용군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악랄한 짓을 위해 수하를 이용했고, 자연스레 인재 등용에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은 그러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놈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할 마음을 먹은 놈이다.

“주판을 튕겨 보자…… 허허.”

물끄러미 연호정을 바라보던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해 보고 싶네.”

“무엇을 말이오?”

모용군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에게 맹법(盟法)에서 자유로운 독립유군의 수장을 맡겨도 될지, 그 실력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말일세.”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비무를 하자는 거요?”

“그렇다네.”

“주판은 어디로 갔소?”

“판돈을 그리 큰놈으로 가져왔는데, 주판을 튕기고 말고 할 것이 어디에 있겠나.”

“으흠?”

“가볍게 손을 섞어 보자는 것일세. 거창하게 비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

흐음…….

가만히 모용군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성 자자한 모용가주님과 손속을 섞어 볼 기회라니, 내 마다할 이유가 없지.”

“허허.”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이 또한 공부라면 공부다. 연호정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탐랑각을 나왔다.

후원에서 가볍게 손속을 나눌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모용군은 내성 중앙, 연무장으로 쓸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광장으로 연호정을 안내했다.

“여기서 붙어 보세.”

연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법 많은 사람이 오가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워낙 유명인들이라 대놓고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도끼는 가져오지 않았나?”

“거처에 두고 왔소.”

“허허, 도끼를 들지 않았다고 자네 실력이 크게 떨어지진 않을 것 같네.”

스르륵.

왼손으로 뒷짐을 지고, 오른손을 중단으로 내민 모용군이 말했다.

“자, 한번 와 보게나.”

연호정이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모용세가의 가주와 벽산연가의 장자가 비무를 벌이는데, 그만한 구경거리가 또 없을 테니까.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

이제야 모용군이 원하는 걸 알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원하는 걸 얻기 직전이거늘, 이 정도 양보는 해 줄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자신에게도 좋을 일이었다.

스륵.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모용군의 미소가 짙어졌다.

“신체 중심이 낮군. 무척이나 안정적이야.”

“가겠소.”

“오게.”

쿵!

연호정이 일 보(一步)를 밟았다.

동시에 모용군의 눈빛이 변했다. 그 한 걸음에서 연호정의 강력한 패력(覇力)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터어엉!

일 보를 내디뎠을 땐 산악조차 허물 것 같더니,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신법에서는 군자의 자태가 묻어난다.

연가의 신법이 분명했다. 무척이나 빠르면서도 안정적인 자세였다. 숨이 넘어가는 지경이 되어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졌다.

투우웅!

무서운 속도로 접근한 연호정이 일순간 우측 사각으로 진입했다.

‘빠르다.’

신법보다 더 빠른 속도. 인간의 반사 신경을 아득히 뛰어넘는 움직임이었다.

연호정의 주먹이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부우웅!

모용군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파아악!

아무런 기운을 담지 않은 것 같은데, 주먹을 쳐 낸 손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연호정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파바바박!

찰나지간 대지를 몇 번이나 밟아 가며 전진한다. 휘몰아치는 연호정의 쌍권(雙拳)에 백색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백호무, 호왕구벽세의 권형(拳形)이었다.

퍼퍼펑!

무서운 힘으로 몰아친 권박을 오른손 하나로 전부 쳐 내는 모용군의 무공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속도가 뛰어나진 않지만 흐름을 읽고 쳐 낸다. 강한 힘과 탄력으로 구사하는 무공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수공(手功)이었다.

파아악!

연호정이 모용군의 상단, 턱을 노리고 왼발을 차올렸다.

유연하고도 강인한 각법이었다. 와중에 가장 빈틈이 많은 곳을 노리는 감각이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났다.

부웅!

연호정의 발이 허공을 갈랐다.

각법을 피하고 부드럽게 밀어 내려던 모용군은 일순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살기에 눈을 빛냈다.

콰앙!

연호정의 발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어찌나 강력한 일격이었는지 발뒤꿈치가 청석 바닥을 다섯 치나 뚫고 들어가 버렸다.

“재미있는 체술이군.”

좌측으로 빠진 모용군의 자세는 처음과 똑같았다.

“상단 타격이 실패한 걸 알고 즉각 방향을 선회해 내리찍다니. 벼락처럼 빠른 반사 신경은 둘째 치고, 그만한 힘의 제어와 유연성은 천하 누구에게서라도 찾아보기 힘들지.”

우우우웅.

모용군의 오른손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고 푸른 진기가 어른거렸다.

“이번에는 내가 가겠네.”

훅!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올 걸 알았음에도 반응이 늦었다. 부드럽게 움직인다 싶더니만 어느새 코앞이다. 극상승의 보법이었다.

파바바바박!

연호정의 권장이 호왕의 기세를 뿜고, 모용군의 우장(右掌)이 푸른 대나무와 같은 기개를 발했다.

퍼퍼퍼퍼펑!

백호무를 연환기(連環技)로 쓰기 위해선 폭발적인 힘과 지치지 않는 지구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당연히 그 위력은 측정 불가다.

그 파괴적인 권법 절기를 모용군은 절묘한 수공으로 모조리 막아 내고 있었다. 신기(神技)에 이른 실력이었다.

퍼어엉! 찌이이익!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몸이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역시 강하군.’

비록 검을 들진 않았지만, 모용군은 진지하게 연호정을 상대하고 있었다.

육대세가 가주의 무력. 연호정은 모용군이 작정하고 내친 수공에서도 큰 타격을 받지 않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대단하네.”

펄럭.

모용군이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연호정의 권압(拳壓)에 찢어지고 터진 소맷자락이 흉하게 너덜거렸다.

“두 주먹만으로 나의 무공을 뚫어 내다니, 과연 벽산호장이라는 별호가 과하지 않아.”

연호정이 가슴을 어루만졌다.

명치에서부터 소용돌이 모양으로 찢어진 의복 속, 탄탄한 흉근과 상복근이 드러났다.

연호정이 또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웅성웅성.

어느새 수십 명의 무인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짧지만 호쾌한 접전에 그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제가 졌습니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십 년만 지나면 능히 천하를 오시하겠어. 감탄했네.”

모두가 들을 만큼 낭랑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은 모용군의 극찬에 놀라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아쉽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여기서 붙을 걸 알았으면 차라리 도끼를 들고 올 걸 그랬어요.”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역시나 놈은 자신이 굳이 이곳에서 비무를 벌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네의 본 실력을 꺼내 들었다면 신비감이 퇴색됐겠지.”

“그도 그렇겠습니다.”

“도박을 하려면 패를 가져와야지, 판돈으로 기죽이기 있나?”

“가주님의 반응을 보기 전까지는 그게 패인지, 판돈인지도 몰랐지 뭡니까?”

“뭐라? 하하하!”

모용군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저 무공과 관련된 얘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연호정의 패기와 모용군의 여유로운 대처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용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함세.”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양념을 치실 생각은 아니지요?”

“난 담백한 걸 좋아하지. 자네도 그랬으면 좋겠군.”

몽의를 죽이든 어디 멀리 보내든, 확실하게 마무리 지으라는 소리였다.

연호정은 모용군의 말을 결코 흘려듣지 않았다. 몽의를 끝까지 쥐고 흔든다면, 모용군도 선을 넘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 잘 됐구먼.”

뒷짐을 진 모용군이 탐랑각으로 발길을 옮겼다.

“양념은 안 치겠네. 대신 곁들일 채소 정도는 이해하게.”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독립유군에 자신의 사람 몇을 붙이겠다는 소리였다.

“제가 편식을 하는 편입니다만.”

“걱정 말게. 내가 키운 채소는 아니니까.”

“제 식성 나름이라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좋습니다.”

등을 돌린 모용군이 손을 흔들었다.

“잊지 말게. 이제 시작이라는 걸.”

연호정은 여유 있는 웃음으로 답했다.

“저는 이게 끝이었으면 합니다. 진심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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